보이그룹 ‘드리핀’. [사진 제공 · 울림엔터테인먼트]
케이팝이 꼭 선한 내용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정의에 대치되는 인물의 이미지는 이 산업 초기부터 꾸준히 나왔다. 1세대에서는 학교 폭력에 대한 복수, 해결사, 폭주족 등이 등장했다. 빅뱅 등으로 대표되는 2세대의 경우도 뮤직비디오 속 아이돌은 자주 경찰에 쫓기거나 죄수로 수감되거나 폭동과 소요를 일으키는 모습이다. 이는 미국 힙합 뮤직비디오로부터 익숙한 이미지들을 가져온 것이기도 하다. 사회 관념과 불화하는 청소년들의 심경을 대변하기도 했고, 때로는 단지 긴박하고 거창한 무드를 조성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그것이 최근 몇 년간 판타지가 주종을 이루는 통칭 ‘세계관’의 유행을 타면서 빌런으로 이행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관 유행 자체가 ‘어벤져스’ 시리즈 등 슈퍼히어로물의 종가인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향권에 있기도 하다. 꼭 아이돌이 아니더라도 힙합, R&B, 포크 등 장르를 막론하고 빌런이라는 표현은 가요 가사에 자주 등장한다. 빌런 개념이 일상화되고 가벼워진 탓도 있겠다. ‘콘셉트 빌런’처럼 특정 영역에 집착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도 쓰일 정도니 말이다.
흔히 쓰이는 클리셰에 창의력 더해야
드리핀의 미니앨범 ‘빌런’. [사진 제공 · 울림엔터테인먼트]
이쯤 되면 누구든 빌런이나 조커를 차용할 때 이전보다 훨씬 깊은 고민이 필요할 듯하다. 케이팝에서 콘셉트나 세계관은 더는 노래에 단순히 덧대어진 부가물이 아니다. 노래를 중심으로 한 종합예술을 하나로 묶는 열쇠 역할을 한다. 흔하기 때문에 더욱 흔히 쓰이는 클리셰를 그저 가져오는 것만으로는 케이팝에서 완성도, 더구나 치명적인 매력을 확보하기가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