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출신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1959년 5월 영국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리허설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GettyImages]
그 중 하나는 한 연주자가 인생의 서로 다른 시기에 녹음한 단일 곡을 바탕으로 각자의 버전에서 그 연주자의 캐릭터를 상상해보는 거였다. 이 수업의 '교재'로 쓰인 연주자는 글렌 굴드였고 음악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1955년, 1981년 그리고 2006년
1955년 녹음된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앨범. 변주곡 숫자 30개에 맞춰 굴드의 사진 30장이 실렸다. [위키피디아]
1981년의 레코딩은 거장의 비움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23세의 천재가 뿜어내는 현란한 테크닉과 비범한 곡 해석 따위 다 부질없다는 듯 말년의 굴드는 이렇다 할 기교도 부리지 않고 여유롭게 이를 연주했다. 학생들은 이 두 버전을 비교하며 괴짜라 불린 천재와 은둔한 거장, 한 사람의 두 가지 삶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풀어냈다. 그들의 글을 읽고난 뒤 제3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려줬다. 2006년 발매된 앨범이다.
옛날 음원이 발달된 음향 기술로 새롭게 포장되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모든 레코딩 소스를 전부 디지털로 되살려 최상의 음질로 재조합한 비틀스의 ‘Love’가 대표적이다. ‘태양의 서커스’ 공연용 음악으로 제작된 이 앨범은 마치 엊그제 비틀스가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 같다. 비틀스뿐 아니라 구시대의 음원들이 속속 디지털 리마스터링의 힘으로 새 단장을 하고 다시 발매된다. 선명한 음질을 자랑하며. 테크놀로지의 힘은 그만큼 놀랍다. 이런 작업은 모두 '음원'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즉 아티스트가 남긴 결과물에 음향 기술로 계속 새 옷을 입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원본이 존재한다. 아무리 때때옷을 입히고 꽃단장을 해도 몸통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3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몸통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이유는 이렇다. 이 앨범은 굴드가 직접 연주한 게 아니다. 프로그램에 의해 연주된 피아노 소리를 녹음한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원리는 간단하다. 프로그램이 굴드의 1955년 레코딩을 분석한다. 그래서 당시의 레코딩 기술로 녹음된 음원을 배제하고 스튜디오에서 울리는 그의 연주만을 남긴다. 이 데이터를 토대로 작동되는 피아노가 오리지널 연주를 재현한다. 어떤 건반을 얼마나 길게 눌렀는지는 물론이고, 건반을 누르고 페달을 밟는 물리적 과정까지 고스란히 재현된다. 따라서 1955년 미국 뉴욕 CBS 스튜디오에서 울리던 굴드의 피아노가 2006년 캐나다 토론토의 CBC 스튜디오에서 원음 그대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 연주를 녹음한 게 이 앨범이다.
시뮬라시옹 시대의 음악
1981년 녹음된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앨범. [예스24]
혼란은 가중된다. 통상, 예술은 사람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미디어 아트가 발달한 지금도 결국 붓이 프로그램으로 바뀌었을 뿐, 사람의 손이 만든다. 우연성의 예술이든 해프닝이든 뭐든, 어쨌든 인간의 땀이나 하다못해 잔꾀가 들어간단 얘기다. 하지만 이 ‘골드베르크 연주곡’에는 사람이 없다. 데이터와 프로그램, 그리고 기계 장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굴드가 연주한 바로 그 소리를 생생한 음질로 듣는다. 1955년 레코딩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풍성한 울림과 공간감, 세밀한 음감의 변화까지 고스란히 느낀다. 즉, 예술작품이 주는 감동을 이 앨범은 재현한다. 그렇다면 이 앨범은 예술이기도 하고, 예술이 아니기도 하다.
말장난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다. 테크놀로지가 보잘 것 없는 몸뚱이에 때때옷을 입히고 꽃단장을 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몸 그 자체를 새롭게 만드는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이 앨범을 시사한다. 프랑스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원본 없는 복제품)다. 그것도 원작의 위조와 모방이 아닌, 원작이 소멸된 자리에 독자적 현실로 존재하는 시뮬라크르다.
예술가가 증발된 예술
2006년 발매된 1951년 글렌 굴드 연주를 재현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앨범. [아마존닷컴]
이런 배경 설명 없이, 학생들에게 이 앨범을 들려줬다. 어떤 학생의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아무 소음도 없는 방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라고. ‘은둔한 노인이 아침에 일어나 하얀 눈으로 덮인 평원을 걷는다. 그가 가는 발자국이 곧 길이 됐다.’ 눈이 생활 소음을 지운 날, 여유롭게 아침 산책을 하는 굴드를 떠올렸던 것일까. 학생의 문장을 보고, 나는 이 작업을 실행한 인공지능(AI)이 어쩐지 낭만적으로 다가섰다. 모든 음악에는 문장이 담겨 있다. 사람이 연주하지 않은 음악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