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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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왕권 확립과 개혁은 내 운명

정조와 효의왕후의 건릉(健陵)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1-01-10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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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왕권 확립과 개혁은 내 운명

    정조의 친위부대 장용영의 모습일까? 우람하고 호탕한 건릉 무석인. 정조 시대의 국가적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

    건릉(健陵)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와 효의왕후(1753~1821) 김씨의 합장릉으로, 경기 화성시 안녕동 산1-1에 있다. 정조는 장헌(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됐다.

    정조는 출생과 관련해 상서로운 일이 많았던 임금으로 기억된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정조가 태어나기 얼마 전 신룡(神龍)이 여의주를 물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태어나기 하루 전에는 큰비가 내리고 뇌성이 일면서 구름이 잔뜩 끼더니 몇십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 모습을 도성 사람들이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실제 정조는 사도세자가 꿈 내용을 그린 그림을 동궁(창덕궁) 벽에 걸어놓은 뒤 태어났다.

    정조는 영조 28년(1752) 9월 22일 축시(丑時)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나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고 영조 51년(1775)에 대리 정사를 보고 52년(1776)에 즉위했다. 정조의 이름은 산(示示)이며 자는 형운(亨運)이다. 정조는 음성이 우렁차고 코가 우뚝하며 두 눈이 깊고 영채가 있으며 입이 크고 골상이 특이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영조는 친히 나아가 보고는 자신을 빼닮았다며 당일 원손으로 정했다. 어느 날 할아버지 영조가 고기반찬을 멀리하는 왕세손에게 그 이유를 물은즉, 삼남지방의 백성이 굶주린다는 말을 듣고 “굶주리는 백성을 생각하자 마음이 측은해 차마 젓가락이 가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런 기록은 정조의 문민정치, 베풂의 정치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아버지 원혼 위로하기 위한 지극한 효심

    정조는 1776년 3월, 영조 승하 6일째 되는 날 경희궁의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즉위하자마자 정조는 면류관을 벗고 영조의 상복을 다시 입고는 중외에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러나 선대왕(영조)께서 종통의 소중함을 생각해 나를 효장세자의 후사로 삼았으니, 예의를 엄하게 지키지 않을 수 없고 인정(정리)도 펴지 않을 수 없다. 불량한 무리가 이를 빙자해 나의 친부인 사도세자에 대해 추숭(追崇)을 논의하면 형률로써 논죄하고 선왕의 영령께도 고하겠다”고 유시했다. 또한 정조는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그의 이런 지극한 효심은 백성의 추앙을 받았다.



    정조는 즉위한 후 곧 규장각을 설치해 수만 권의 책을 갖추는 한편, 젊은 학자를 모아 학문을 연구하도록 했는데 연구 중에는 누가 와도 일어나지 않게 함으로써 연구에 정진토록 했다. 이후 규장각과 학자들은 정조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했으며 재위 24년간의 탕평책 실시와 개혁정치의 중심이 됐다.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 운영한 것도 정국 운영을 군주가 주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새로운 국가 건설과 당쟁을 종식하기 위해 화성(華城·현 수원)을 쌓고 천도를 꿈꿨으며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는 한편으로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줄이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제도 개혁을 꾀했다.

    정조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많은 얘기가 나오는 게 사실. 그의 독살설이 나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목덜미 종기와 열로 고생했지만 점차 회복되던 정조가 대비 정순왕후가 신하들을 물린 뒤 혼자 약제를 들고 들어간 뒤 갑자기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정순왕후는 당시 정조의 죽음을 예견한 듯 군대로 하여금 궁성을 호위하게 했고 약방제조를 물린 뒤 직접 약제를 들고 왕의 침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곡소리가 들렸고, 왕의 승하가 선포됐으며 왕세자(순조)에게 대보가 넘겨졌다.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는 열한 살의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고 친정 식구인 안동 김씨들을 조정에 끌어들여 조선 후기를 세도정치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했다.

    목덜미 종기로 고생하다 급서 독살설 파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왕권 확립과 개혁은 내 운명

    난간석의 능침과 전면이 확 열리도록 조영된 건릉의 능침.

    정조 재위 24년(1800) 6월 28일 저녁(유시)의 일이었다. 향년 49세. 창경궁 영춘헌에서 정조가 승하하자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다고 전한다. 그 며칠 전에는 경기 양주의 장단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갑자기 하얗게 말라 죽어 노인들이 거상도(居喪稻·큰 상이 일어남)의 징조라고 통탄했다. 정조의 장례 때 재궁에 넣은 의대는 선왕이자 할아버지가 입었던 영조의 금룡흉배와 생부 장헌세자가 입었던 곤포 등 총 56종에 달했다.

    그의 묘호는 정종(正宗), 능호는 건릉(健陵)이라 했고 능침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이 있는 현륭원 동쪽 청룡맥의 능선 아래 화성읍 강무당(講武堂) 터에 해좌사향(亥坐巳向·북서에서 남동향)해서 안장했다. 이후 순조 21년(1821) 9월 효의왕후를 현륭원 서쪽 구릉에 자좌원(子坐原·남향)으로 안장했는데 이때 순조의 장인이며 실권자였던 김조순 등이 ‘정조의 능침(강무당 터)이 길지로 염려되는 자리라 좋지 않다’며 정조의 능원을 왕후와 합장할 것을 주장해 천장됐다. 정조의 강무당 터 초장지는 현재도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대 능역 조영의 연구적 가치가 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왕권 확립과 개혁은 내 운명

    조선왕릉의 담은 원경을 위해 높게 쌓지 않았으며, 사선 담장이 아닌 계단형 곡장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건릉의 곡장.

    정조의 부인인 효의왕후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 본관이 청풍이며 현종의 비 명성왕후와 친정이 같다. 어머니는 남양 홍씨인 홍상언의 딸이다. 1753년 12월 13일 해시에 가회방(嘉會坊)에서 태어났는데, 출생 직전 가을에는 집안의 복숭아나무, 오얏나무 등 꽃나무가 제철이 아닌데도 꽃을 피웠다고 전한다. 1762년 세손빈이 됐으며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며 왕비가 됐다. 그녀는 평소 성품이 고결하고 시어머니 혜빈 홍씨를 지성으로 모셨으며 왕가의 자녀들을 돌보는 데 극진했다.

    기록에는 효의왕후에 대해 ‘좌우기거(左右起居)를 지성으로 살펴 그가 승하하자 육궁(六宮·后, 妃, 夫人, 嬪, 世婦, 女御 등 임금이 거느리는 여섯 계급의 궁녀)이 모두 감읍(感泣·감격해서 흐느낌)했다’고 적혀 있다. 효의왕후는 순조 21년(1821) 3월 9일 오시(午時)에 창경궁 자경전에서 승하했다. 그때 나이 69세. 소생 없이 승하한 그의 능은 현륭원의 서측 능선에 자리 잡고 능호를 정릉(靜陵)이라 하려 했지만 정조와 합장하면서 건릉이라고 했다.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만 있는 건릉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왕권 확립과 개혁은 내 운명

    (위) 건릉 장명등 중대의 팔면에는 매난국(梅蘭菊)의 무늬가 원형 속에 양각돼 있다. 사실적 묘사가 정교하다. (아래) 건릉 혼유석 고석의 귀면(鬼面). 능침에 들어오는 잡귀를 막는 기능을 한다.

    정조 묘호는 승하 후 종묘에 모셨을 때는 정종(正宗)이었으나 고종(1897년 8월) 때 연호를 광무로 쓰는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바뀌었다. 광무 3년 고종은 자신의 시조와 5대조까지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정조의 묘호를 정조선황제로, 효의왕후는 효의선황후로 정했다. 이때 황제로 추존된 왕은 태조 이성계, 장조, 정조, 순조, 헌종, 문조 등이다.

    건릉의 비각에는 융릉의 예와 달리 능을 옮기기 전의 비석은 남아 있지 않고 광무 3년 황제로 추존한 이후의 비각만 보존돼 있다. 천릉(遷陵) 전의 비와 합장 후 초기의 비는 초장지 등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어 초장지의 발굴 보존 등이 절실한 실정이다. 다행히 경기도 등의 지방자치단체에서 건릉 초장지 전면부를 보존하고 효의 공원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라 기대된다. 현재 비의 전면에는 ‘대한제국 정조선황제건릉 효의선황후부좌’라고 적혀 있는데, 순조 때 만든 정종과 효의왕후에 대한 비문 내용은 없다. 그러나 정종(정조)에 대한 기록은 국장 시 기록물인 ‘정종대왕건릉산릉도감의궤’ ‘정종대왕건릉천봉도감의궤’ ‘건릉개수도감의궤’ 등이 잘 보존돼 있어 문헌적 추정과 비교할 수 있다.

    건릉은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다. 세조 이후 능역 간소화를 위해 계속됐던, 회격실에 병풍석이 없는 난간석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부모의 능침인 융릉이 화려한 병풍석만 있고 난간석이 없는 것과 대조적이다. 석물의 배치와 조형은 현륭원(융릉)의 형식과 비슷하다. 즉 합장릉이면서 혼유석이 하나인 것이 이전에 조영된 조선시대 다른 합장릉에 혼유석이 2개인 것과 구분되는데, 이는 능제 간소화 정책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 왕실의 능원은 합장릉이 대부분이며 혼유석도 1개로 통일됐다. 장명등은 현륭원처럼 팔각 장명등이고 기단부는 향로와 같은 형태다. 중대의 창호 부분 팔면에 원을 그려 매난국의 무늬를 서로 어긋나게 새겨 넣은 것이 융릉과 같다. 문무석인의 조각이 사실적인 점이 눈에 띈다.

    융릉과 건릉 정자각 앞 제향공간에는 다른 능과 달리 신로와 어로 사이에 판석이 넓게 포장돼 있는데, 이는 두 릉이 고종 때 황제로 추존되면서 능제의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추정케 하는 시설이다. 능제 변화에 대한 계속적인 연구가 요구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건릉의 외금천교가 현재의 건릉 재실 앞 구도로 아스팔트에 묻혀 있으므로 발굴 복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건릉의 연지도 바로 옆 능역 안에 있는데, 그 이름이 ‘천년지(千年池)’다. 천년 동안 왕실이 이어져 영원하기를 기원하며 붙인 이름으로 추정된다. 중국 북경의 명십삼릉의 주산이 천수산(千壽山)임을 고려해볼 때 천년은 왕조의 영원성으로 해석된다.

    정조와 효의황후 사이에는 후손이 없었으며 의빈 성씨와의 사이에 문효세자가 있었으나 일찍 죽고, 후궁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 바로 제23대 왕 순조다. 능호는 인릉(仁陵)으로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산13-1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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