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자마자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수신 알림 소리가 울린다. 동해에 해돋이를 보러 간 지인이 보내온 첫 해 인증샷이었다. 무덤덤하게 답했지만 나 또한 오래전 첫 해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뜨거운 태양이 떠오르는 장관을 기다렸지만 회색빛 하늘 속에서 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시작!’ 신호가 없는 애매한 시작이었다. 그 후 딱 한 번 해돋이를 봤다. 경남 통영 숙소를 비집고 들어온 태양의 강렬한 빛과 뜨거운 열기에 눈이 저절로 뜨여 본의 아니게 일출을 보게 된 것이다. 바른 자세로 앉아 떠오르는 하늘의 한 지점을 바라봤다. 수평선의 섬 뒤에서 올라오는 해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다. 작은 태양이 있어야 할 위치에 자리를 잡는 동안 뿜어내는 그 힘에 경건한 마음이 넘쳐흘렀다. 하늘에 떠오른 점 하나가 생명의 빛을 비추기 시작하는 의식을 목격하자 살아 있음을 느꼈다. 새로운 시작점에서 살아갈 힘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말없이 말하는 침묵의 언어
크기로만 보자면 무한한 하늘 안의 태양은 작은 점에 불과하다. 크기와 힘은 비례하지 않는다. 떠오른 점 하나의 응축된 에너지 덩어리가 세상을 압도하니 말이다. 바실리 칸딘스키가 말하듯 점은 자기 위치에서 끊임없이 운동하며 내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간결하고도 확고한 힘이다. 자기 위치에 자리 잡고 묵직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없이 말하는 침묵의 언어’다. 점 하나를 딱 찍는 순간 확고한 의지를 선언하는 것이다.
언어에서는 마침표가 그런 기능을 한다. 문자메시지나 메신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같은 짧은 문장 쓰기가 일상화된 요즘 점은 더 바빠졌다. “응”이라는 짧은 대답과 마침표가 붙은 “응.”의 뉘앙스는 묘하게 다르다. 마침표가 붙으면 변화의 여지가 없이 감정을 끊어내는 기분이 든다. “응...”처럼 마침표 여러 개 붙은 경우는 어떤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말하기 힘든 여러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작은 한 점이 힘을 발휘하는 장면을 일본의 한 제품에서 발견했다. 디자인 스튜디오 유마카노(StudioYumakano)는 흔히 사용하는 십자나사못을 살짝 변형해 재미있는 제품을 선보였다. 이들은 나사못에 십자형 대신 웃는 얼굴을 디자인해 새겼다. 감정이 살아난 스마일 나사못이 벽에 고정돼 배시시 웃는다. 스치는 시선을 붙잡고 그냥 한번 웃어보라고 고개를 내미는 나사못의 애교에 보는 이도 절로 웃음이 난다. 스마일 나사못을 목격한 순간 웃음의 에너지가 전염되지 않는가. 보이지 않는 모서리에서 제구실을 다하며 진동하는 작은 점의 존재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고정된 힘에서 흐르는 힘으로
점은 칸딘스키가 말한 것처럼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때 나는 음과도 같다. 이때 점은 고정된 힘에서 시간을 따라 흐르는 힘으로 변화한다. 다양한 성격의 점을 연결하면 중심에서 울려 퍼지는 힘의 리듬이 드러난다. 단호한 소리, 여운을 남기는 소리 등 점은 더는 하나의 힘에 머물지 않고 전체 음악의 조화 속으로 들어간다.
어떤 광고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곧 음악이라고 말한다. 터키 방송사 아치크 라디오(Acik Radyo)가 제작한 인쇄 광고를 보면 사람들 모습이 마치 악보 속 음표 같다. 사진작가 해럴드 파인스타인(Harold Feinstein)이 찍은 1900년대 중반 코니아일랜드 사진으로 제작한 광고다. 사진에서 제각각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모습으로 악보 분위기를 연출했다. 광고 카피 또한 절묘하다. ‘Music of the People(사람들의 음악).’ 제 나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음악이라고 말한다.
악보 속 점이 음을 정의하듯 광고 속 사람들 모습도 삶을 구성하는 점과 같다. 사람들 모습은 불규칙한 점들의 나열인 듯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각 점에서 풍겨 나오는 울림으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음악이다.
오늘 새벽 하늘도 태양이 만드는 붉은 진동으로 물들었다. 떠오르는 해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유는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울림을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눈을 감으면 들이쉬고 내쉬는 숨의 리듬이 보인다. 나 또한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점이다. 여러 점과 어울려 새로운 선을 그려나가기 전 점의 공간에서 울림을 가다듬어본다.
신연우는 디자인을 중심으로 한 이미지 언어를 인문적으로 해석하고, 일상의 장면으로 연결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강의와 글쓰기 및 창작 활동을 병행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그냥 좋은 장면은 없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