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간판들. 조형성의 문제를 넘어서 공공의 공간을 침해할 뿐 아니라 소재도 반환경적이다.
그 순간부터 번호판과 같은 녹색의 난해한 도로표지판과 도로망에 숙명처럼 매이게 되어서일까, 아니면 매년 업그레이드되는 자동차 디자인과 색을 모른 척하며 30년을 지켜온 박정희 시대의 자동차번호판이 강요하는 엄숙주의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1973년 태어난 녹색 자동차번호판이 사라진다. 올해 7월 새로운 자동차번호판 시안이 나오면 1년~1년 반의 준비기간을 거쳐 늦어도 2005년 말에는 새 자동차에 새 번호판을 달 수 있다.
1974년 최초의 한국형 자동차 ‘포니’의 디자인이 이탈리아 디자이너 주지아로에게 넘어간 시기에 패키지로 이탈리아 도로표지판(이탈리아 국기의 그 녹색)에서 색을 따온 것으로 알려진 녹색번호판은 2004년 1월1일 ‘전국번호판’이 나오지 않았다면 더 오래갈 수도 있었다.
건설교통부(이하 건교부)는 지난 2년 약 5억원의 예산을 들여 ‘서울55’ ‘경기43’ 등 지역번호판을 전국적으로 묶어 관리하는 전산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번호판을 바꾸는 데 드는 연 350억원의 비용을 줄이고, 자동차 소유자의 번거로움도 덜어주겠다는 합리적 취지였다.
이에 따라 건교부는 지역이 빠지고 남은 번호판 공간을 뚱뚱한 글씨로 채운 새 전국번호판을 내놓았다. 30년 전 공무원들이 번호판 주물업자에게 ‘디자인’을 맡겼듯, 이번에도 전산 프로그램을 만든 교통개발연구원 공무원들이 모양을 만들었다.
시대를 못 읽은 뚱뚱한 번호판
‘전국번호판’ 제도에 따라 새로 부착되고 있는 번호판(왼쪽). 우리나라 번호판은 1962년 5월 처음 정부가 규격을 내놓았고 73년에 현재 녹색 페인트 번호판 디자인의 틀이 만들어졌다. 가운데 ‘서울 자 2356’이 최초의 정부규격번호판이다.
“자동차번호판은 작지만 중심에 오기 때문에 자동차의 스타일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도 글씨만 크게 잘 보이면 된다는 관료적 발상에 젊은 오너드라이버들을 중심으로 한 네티즌들의 불만이 쏟아진 것이죠.”(윤종영 교수·한양대 디자인기술공학센터장)
“새 번호판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는 자동차 디자인이 발전한 데 비해, 번호판은 유독 30년 전의 모양을 고수하고 있어 쌓였던 불만이 이번 일을 계기로 폭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7월에 시안이 나오면 전문가 공청회도 열고 여론도 수렴해 이번엔 제대로 만들어볼 작정입니다.”(이광원 행정사무관·건교부 자동차관리과)
그러나 여론 때문에 가로 배열 디자인에 유리한 알파벳이나 한글 자음 단독 사용이 불가능하고, 기능과 디자인에서 뛰어난 반사번호판을 채택하기 위해선 단속 우선주의를 앞세우는 경찰청과 협의를 거쳐야 하는 등 해결해야 할 난제도 적지 않다는 것이 담당자들의 말이다.
한편 새 자동차번호판에 대해 네티즌들이 분통을 터뜨리고 있던 2월23일 열린 우리나라 축구 대표선수들의 새 유니폼 패션쇼는 사이버 공간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날 선보인 유니폼 앞면 선수번호에 그려진 원이 “로또공처럼 보인다” “청소년 관람가능 인증표시처럼 보인다”며 축구팬들의 불만이 쏟아진 것이다. 옷 무게를 크게 줄이는 하이테크놀로지를 개발해 155g짜리 상의를 선보이고 회심의 미소를 짓던 나이키로서는 크게 당황했다.
새 기술로 선수 옷을 만들기까지 2년 정도 걸리기 때문에 보통 2년마다 새 유니폼이 나오죠. 올해 옷 무게를 줄인 유니폼에 대해 우리나라 선수들과 감독은 흡족해했습니다. 번호의 원은 2004년 나이키사의 디자인 테마로 미국, 멕시코, 네덜란드 등 10개국의 대표 유니폼에 반영됐습니다. 각국 전통과 문화적 터부와 부딪히는 점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난해 대한축구협회의 리뷰도 거쳤지요. 뒤늦게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저항이 있다고 보고하자 본사 디자이너들이 깜짝 놀랄 수밖에요.”(황은정·나이키코리아 마케팅PR팀)
최근 논란을 빚었던 국가대표 축구선수 유니폼.
그러나 적어도 대한축구협회는 새 유니폼의 앞면이 로또 및 성인인증표시 등 우리나라에서 부정적인 사인(sign)을 연상시킨다는 점을 인식했어야 했다. 약간의 글자 타입과 원 안에 글자를 배치하는 방법만으로도 저항감을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네티즌들의 뜨거운 찬반 논란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장 디자이너들의 반응은 뜻밖에 무덤덤했다. 그러나 그 무감함을 들여다보면 밑바닥에는 절망에 익숙해진 사람의 체념이 있었다.
“관료조직과 일해본 디자이너들은 이런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상상할 수 있다. 디자이너들이 아무리 좋은 안을 내놓고 실무자들을 설득해놓아도 높은 분의 ‘이걸로 하지’ 한마디로 프로젝트가 끝난다.”(김두섭, 디자이너)
“디자인의 중요성은 정부와 언론에서 만날 구호로 떠들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디자인이 공공의 광장으로 나오지 않는데 디자인 좀 바뀐다고 무슨 차이가 있나. 나는 내 방식대로 싸우겠다.”(디자이너 권혁수, 디자인사회연구소)
그러나 자동차번호판과 축구선수 유니폼을 놓고 벌어진 논쟁은 이제 사람들이 개인이 결정하는 사적 소비재뿐 아니라 공공 영역에서도 ‘디자인은 우리들의 얼굴’(최범 시각이미지 평론가)이라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스위스 베른의 소화기. 전통의 미감이 느껴진다.
반면 공적인 영역에서 디자인은 정통성 없는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무지막지한 표식 만들기였다. 세련된 자동차에 달린 촌스러운 번호판은 자본과 공공, 두 디자인 영역 사이의 심각한 갭을 보여준다. 일제시대와 개발독재를 거치며 공공이 모이고 쉬고 토론하는 공간 자체가 만들어진 적이 없었기에 산업디자인의 기형적 발전은 조악한 관제 디자인만 양산했다. 수십년간 관변 디자인업체들만 눈먼 돈으로 배를 불렸다. 오늘날 대부분 간판제작업자와 인쇄업자들이 ‘디자인’을 겸하고 있는 건 이 같은 관행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눈에 보이는 데마다 붙이는데 이건 공해를 넘어선 테러입니다. 디자인이란 덧붙이는 게 아니라 덜어냄으로써 본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식이죠. 우리 시골집이나 오래된 골목길을 보면 서구와는 완전히 다른 ‘정리’, 즉 디자인의 개념이 있어요. 디자인의 한국화를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반성하지요.”(이나미 디자이너·㈜바프 대표)
새로운 택시승차대. 미흡하지만 사용자를 배려했음을 알 수 있다.
변화의 요구가 없지는 않다. 서울시의 경우 2002년 ‘도시환경디자인심의위원회’를 시 조례로 설치하고 20여명의 전문가들을 위촉해 시 예산으로 수행하는 공공시설 사업에 대한 디자인심의를 받도록 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간판을 제외한 44종 공공시설물 디자인을 심의한다”고 말한다. 기다리는 사람을 배려한 택시 승차대, 지역특성을 살렸다는 지하철 캐노피 등이 이 위원회를 거쳤다. 그러나 한 심의위원은 “아무리 반려를 해도 업자들이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없고 큰 프로젝트에 대해선 실권도 없다.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혁수씨의 분노처럼 인문사회학적 인식 없이 공공 디자인이 시행될 때 또 다른 사회적 재앙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최근 종로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판정비사업이다. 도심의 공간과 건물의 관계에 대한 고민 없이 간판을 ‘한 군데로 몰아 정리하는’ 이 사업은 간판이 떨어져나간 건물의 몰골을 드러낼 뿐 아니라 전체주의 국가의 길거리 같은 인상을 준다.
입주자 하나가 바뀌거나 조명등을 교체할 때마다 중장비를 동원해야 하는 엄청나고 즉흥적인 발상 앞에선 입을 다물기 어렵다. 사실 간판 문제를 해결하려면 건물 외관을 정비해야 한다. 그럼에도 건물 외관을 정리하면 5000만원을 ‘대출’해주지만, 간판을 바꾸면 500만원을 그냥 주는 정책이 가져온 필연적 결과이다.
매우 거칠고 인상에 치우친 방식이 되긴 했지만 자동차번호판과 축구선수 유니폼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은 공공 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킨 좋은 계기가 됐다. 이제 서둘러야 할 일은 공공의 공간에 대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연구다. 디자이너들의 클라이언트는 자본과 국가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소수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네티즌들의 절대다수가 “제대로, 천천히 새 자동차번호판을 만들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데 합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청계천 복원과 간판 정비사업을 비롯한 모든 공공 프로젝트는 당장의 중단을 각오하고 충분한 반성과 논의 및 검토 후에 진행돼야 한다.
공공의 공간은 누구의 것도 아닌 공간이 아니며, 공공 디자인은 우리의 얼굴이다. 자동차번호판에서 청계천까지, 마음에 들 때까지 ‘깐깐하게’ 거부할 권리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