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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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학사 ‘공백 메우기’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5-02-04 14: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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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문학사 ‘공백 메우기’
    서재를 위한 책인지, 책을 위한 서재인지 아리송하던 시절에는 고급 장정의 백과사전과 세계문학전집이 인기였다. 나란히 꽂아두면 보기 좋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집집마다 장식용 세계문학전집 한 질씩은 갖고 있던 그때가 더 문화적이었던가. 이제 세계문학전집은 촌스러워 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을 체계적으로 독파하겠다는 의욕 넘치는 독자도 거의 없다. 선반 위의 세계문학전집은 세월의 먼지를 얹은 채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문학전집을 밀고 나간 출판사들이 있다. 120권으로 완간한 금성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과 혜원세계문학(혜원출판사), 최근 47권째 ‘호밀밭의 파수꾼’을 발간한 민음세계문학전집(민음사)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민음사는 세계문학전집을 발간하면서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그 시대의 언어로 새로 번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어쩌면 새로운 번역 이전에 공백부터 메우는 게 순서일지도 모른다.

    대산문화재단이 1999년부터 ‘외국문학 번역지원’사업을 실시한 것도 그런 이유다. 이 총서를 기획한 기획위원회(위원장 이인성 서울대 교수, 불문학)는 발간사에서 “근대 문학 100년을 넘었지만 이 땅의 세계문학은 늘 읽어온 ‘간판’ 작품들이 쓸데없이 중간(중복출판)되거나, 천박한 상업주의적 작품들만 새로 나오는 등, 세계문학의 수용이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자성과 함께 “세계문학의 올바른 이해와 향유 없이 한국문학의 세계시민화가 불가능하다”며 ‘문화적 이종교배’의 하나로 이 문학총서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첫 결실로 대산세계문학총서 5종 7권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하였다.

    이 총서의 첫번째 특징은 세계문학의 대명사인 헤밍웨이나 헤르만 헤세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첫 출간의 영예를 안은 것은 로렌스 스턴의 소설 ‘트리스트럼 샌디 1, 2’. 18세기의 로렌스 스턴은 혁신적인 소설기법으로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괴테, 니체, 쿤데라 등 현대작가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고, 종종 셰익스피어에 비견되기도 하지만 우리 나라에 소개될 기회가 별로 없던 작가다. ‘트리스트럼 샌디’는 그동안 상업성이 없거나 길고 난해하다는 이유로 국내에 소개되지 못한 외국 문학작품을 체계적으로 번역한다는 총서 기획 의도에 정확히 부합하는 작품이다.

    ‘트리스트럼 샌디’에 이어 총서 일련번호 3번을 달게 된 하이네의 ‘노래의 책’도 사연은 많다. 이 책을 번역한 고려대의 김재혁 교수(독어독문학)는 “우리 나라 독자에게 하이네가 연애시인으로 각인된 것은 하이네의 대표적 작품 ‘노래의 책’을 일부분만 발췌 소개한 데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소녀적 감상에 호소하는 연애시만 번역 소개하다 보니 하이네 문학 전체를 한쪽으로 판단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노래의 책’을 완역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사랑의 시 틈에서 하이네의 사회비판적·사회참여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총서 6번을 단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도 비슷한 운명이다. 프랑수아 비용의 ‘유언시’,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함께 프랑스 현대문학의 고전으로 통하는 아폴리네르의 ‘알코올’은 이규현씨에 의해 국내 처음으로 완역되었다.



    ‘노래의 책’으로 무책임한 발췌번역의 문제점을 충분히 경험했다면, 총서 4, 5번에 놓인 멕시코 작가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의 소설 ‘페리키요 사르내엔토 1, 2’로 영미 또는 유럽 문학권을 곧 세계문학으로 인식해 온 우리의 좁은 시야를 바꿀 수 있다. ‘페리키요 사르내엔토’는 비록 스페인어로 쓰였지만 멕시코인이 쓴 최초의 중남미 소설이라는 역사적 의미도 크다. 대산문화재단은 중남미 외에도 동유럽·아랍·아시아·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의 문학을 편견 없이 골고루 수용할 수 있도록 총서를 꾸밀 계획이다.

    끝으로 조라 닐 허스턴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대산세계문학총서가 지향하는 고전과 현대작품의 조화에 균형을 이뤄주는 작품이다. 미국 흑인 여성 문학의 어머니로 불리는 허스턴은 1937년 이 소설을 썼다. 90년대 미국 대학생들의 필독도서이던 이 소설을 이시영씨는 이미 96년에 번역을 마치고 출판할 곳을 찾아다녔으나 흑인 여성 작가의 소설은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폐기처분될 운명의 원고를 살려준 것이 대산의 번역지원 사업이었다.

    대산세계문학총서는 1차분 5종에 이어 7월부터 매달 1권 이상씩 출간된다. 현재 중국 남북조 시대의 시성 도연명의 ‘도연명전집’, 불가리아 작가 요르단 요브코프의 ‘발칸의 전설’, 스페인 현대희곡의 대가 바예호의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일본 나스메 소세키의 ‘행인’ 등이 출간을 기다린다. 문학사의 공백을 메워줄 이 작업에 대해 뿌듯함과 동시에, 가벼움의 시대에 이 책의 무게를 감당할 독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지 걱정스러움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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