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일 논현동 마루홀에서는 작곡가와 청중이 매우 긴밀한 호흡을 나누는 이색적인 작곡 발표회가 있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인 신동일씨가 작곡마당(이하 작곡마당)을 열고 6명의 아마추어 작곡가들을 불러모은 것.
작곡마당에 모인 작곡가들은 저마다 이력이 다채로웠다.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처럼 모음만으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무언가’ 2곡을 쓴 김상현씨는 음악학을 전공하는 학생이고, ‘시계와 거북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한 이지연씨는 작곡을 ‘포기했던’ 작곡학도이자 피아노 학원 강사다.
그리고 ‘2대의 플루트와 호른, 현악을 위한 음악’을 작곡한 김현석씨는 산업체에서 군복무를 하는 기계공학도. ‘독주 첼로를 위한 환상곡’을 작곡한 김수민씨는 어떤 작품을 쓸 것인지 고민으로 가득 차 있는 젊은 작곡과 재학생이다. ‘지는 잎새 쌓이거든’(외 1곡)이란 제목의 국악가요를 무대에 올린 김정희씨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작곡공부에 열을 올리는 주부다.
‘우예소라’라는 특이한 이름의 예비 작곡가는 단소와 첼로,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3개의 짧은 ‘아리랑 변주곡’을 썼다. 이 작품은 취미로 단소 연주를 하는 아버지를 위해 작곡한 것으로 이번에 아버지가 작품에 맞춰 개량한 단소를 들고 직접 무대에 올라 작곡마당의 분위기를 훈훈하게 했다. 작곡마당은 일반 작곡 발표회와 사뭇 달랐다. 현대적인 음악어법을 따른 아카데믹한 작품에서부터 일반인도 친숙하게 들을 수 있는 곡까지 작품의 질과 내용이 다양했다. 더 중요한 것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아마추어리즘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국내 미술계나 문학계는 아마추어 창작인들의 활동영역이 넓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의 통로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작곡분야는 도무지 아마추어리즘이 설 자리가 없다. 따로 작곡기법을 익혀야 하고, 작품을 연주할 공간과 연주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기존 작곡가들의 작품 발표회도 기법적인 우수성을 따지기 이전에 일반인의 관심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작곡 발표회가 청중에게서 외면 받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작품이 ‘맹목적인 창작 욕구’가 아닌 ‘발표를 위한 음악’이라는 데 있다. 이처럼 현실과 청중을 소외시킨 작품들은 스스로 소외되게 마련이다.
신동일의 작곡마당은 아마추어들의 무대였지만 진행방식도 모범적이었다. 기존 작곡 발표회는 연주가 끝나면 작곡가가 무대에 나와 잠시 인사하고 들어가는 것이 전부다. 손뼉을 치는 사람도 작곡가의 선후배 아니면 제자들이다. 그러나 작곡마당은 아주 작은 무대였지만 작곡가와 작품이 진정으로 청중과 소통하는 자리였다. 객석과의 소통을 위해 신동일씨는 연주 전 인터뷰 형식을 빌려 작품에 대해 작곡가 스스로 대답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직접 작곡가에게서 ‘왜 작곡하는가’ ‘이번 작품의 의미와 내용은 무엇인가’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쓸 것인가’에 대해 듣고 나면 연주를 감상하는 관객의 태도가 달라진다. 이번 발표회는 작곡가만큼이나 연주자들의 이력도 다채로웠다. 작곡가 자신이 직접 피아노 앞에 앉거나 북을 치기도 했고, 음대 재학중인 학생 연주자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기성 연주자들까지 무대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열성적으로 신예 작곡가의 탄생을 도왔다. 작곡마당은 신동일씨가 작곡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을 위해 마련한 것이다. 그늘에 가려져 있는 아마추어리즘을 방치한다면 우리 음악계는 가능성의 일부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만큼 신동일씨의 어깨는 무겁다. 만약 하이든에게 에스테르하치 후작이 없었다면, 베토벤에게 발트슈타인 백작이 없었다면 그들의 창작생활은 훨씬 고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리가 개인의 희생만으로 마련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신선한 감흥과 걱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확실한 것은 작곡마당에서 보인 창작 열의가 국내 음악계에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새로운 에너지원이 되리라는 기대다.
작곡마당에 모인 작곡가들은 저마다 이력이 다채로웠다.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처럼 모음만으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무언가’ 2곡을 쓴 김상현씨는 음악학을 전공하는 학생이고, ‘시계와 거북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한 이지연씨는 작곡을 ‘포기했던’ 작곡학도이자 피아노 학원 강사다.
그리고 ‘2대의 플루트와 호른, 현악을 위한 음악’을 작곡한 김현석씨는 산업체에서 군복무를 하는 기계공학도. ‘독주 첼로를 위한 환상곡’을 작곡한 김수민씨는 어떤 작품을 쓸 것인지 고민으로 가득 차 있는 젊은 작곡과 재학생이다. ‘지는 잎새 쌓이거든’(외 1곡)이란 제목의 국악가요를 무대에 올린 김정희씨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작곡공부에 열을 올리는 주부다.
‘우예소라’라는 특이한 이름의 예비 작곡가는 단소와 첼로,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3개의 짧은 ‘아리랑 변주곡’을 썼다. 이 작품은 취미로 단소 연주를 하는 아버지를 위해 작곡한 것으로 이번에 아버지가 작품에 맞춰 개량한 단소를 들고 직접 무대에 올라 작곡마당의 분위기를 훈훈하게 했다. 작곡마당은 일반 작곡 발표회와 사뭇 달랐다. 현대적인 음악어법을 따른 아카데믹한 작품에서부터 일반인도 친숙하게 들을 수 있는 곡까지 작품의 질과 내용이 다양했다. 더 중요한 것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아마추어리즘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국내 미술계나 문학계는 아마추어 창작인들의 활동영역이 넓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의 통로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작곡분야는 도무지 아마추어리즘이 설 자리가 없다. 따로 작곡기법을 익혀야 하고, 작품을 연주할 공간과 연주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기존 작곡가들의 작품 발표회도 기법적인 우수성을 따지기 이전에 일반인의 관심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작곡 발표회가 청중에게서 외면 받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작품이 ‘맹목적인 창작 욕구’가 아닌 ‘발표를 위한 음악’이라는 데 있다. 이처럼 현실과 청중을 소외시킨 작품들은 스스로 소외되게 마련이다.
신동일의 작곡마당은 아마추어들의 무대였지만 진행방식도 모범적이었다. 기존 작곡 발표회는 연주가 끝나면 작곡가가 무대에 나와 잠시 인사하고 들어가는 것이 전부다. 손뼉을 치는 사람도 작곡가의 선후배 아니면 제자들이다. 그러나 작곡마당은 아주 작은 무대였지만 작곡가와 작품이 진정으로 청중과 소통하는 자리였다. 객석과의 소통을 위해 신동일씨는 연주 전 인터뷰 형식을 빌려 작품에 대해 작곡가 스스로 대답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직접 작곡가에게서 ‘왜 작곡하는가’ ‘이번 작품의 의미와 내용은 무엇인가’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쓸 것인가’에 대해 듣고 나면 연주를 감상하는 관객의 태도가 달라진다. 이번 발표회는 작곡가만큼이나 연주자들의 이력도 다채로웠다. 작곡가 자신이 직접 피아노 앞에 앉거나 북을 치기도 했고, 음대 재학중인 학생 연주자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기성 연주자들까지 무대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열성적으로 신예 작곡가의 탄생을 도왔다. 작곡마당은 신동일씨가 작곡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을 위해 마련한 것이다. 그늘에 가려져 있는 아마추어리즘을 방치한다면 우리 음악계는 가능성의 일부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만큼 신동일씨의 어깨는 무겁다. 만약 하이든에게 에스테르하치 후작이 없었다면, 베토벤에게 발트슈타인 백작이 없었다면 그들의 창작생활은 훨씬 고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리가 개인의 희생만으로 마련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신선한 감흥과 걱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확실한 것은 작곡마당에서 보인 창작 열의가 국내 음악계에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새로운 에너지원이 되리라는 기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