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출간된 마블코믹스의 ‘캡틴 마블’ 표지(왼쪽)와 영화 ‘캡틴 마블’.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었다. [위키피디아,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런데 이 두 영화 속 슈퍼히어로의 이름이 본디 ‘캡틴 마블’로 똑같았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화 속 캡틴 마블은 외계문명에 납치돼 엄청난 전사로 새롭게 태어난 여자 전투기 조종사 캐럴 댄버스다. 반면 샤잠은 ‘샤잠!’이란 주문을 외우면 슈퍼맨급의 성인 히어로로 변신하는 14세 고아 소년 빌리 뱃슨이다. 그러니 두 히어로의 이름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모든 슈퍼히어로의 출발점인 슈퍼맨 이야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DC코믹스에서 슈퍼맨 만화를 처음 선보인 것은 1938년 4월이다. 이후 슈퍼맨은 모든 최초 기록을 갈아치운다. 신문 연재만화와 TV 애니메이션을 거쳐 드라마 시리즈까지. 그런데 영화만은 예외였다. 최초 슈퍼히어로 영화는 1941년 개봉한 ‘캡틴 마블의 모험’이었다.
‘원조’를 압도한 ‘짝퉁’ 슈퍼맨
영화 ‘샤잠!’(왼쪽)과 DC코믹스가 1973년 새롭게 출간한 만화 ‘샤잠!’.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위키피디아]
1940년 2월(발행일자는 1939년 12월) 첫 모습을 드러낸 캡틴 마블은 여러모로 짝퉁 슈퍼맨이었다. 엄청난 힘과 스피드, 총알도 튕겨내는 방탄 능력에 딱 달라붙는 슈트, 펄럭이는 망토, 심지어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각진 외모까지. 게다가 변신하기 전 슈퍼맨이 신문기자라면 캡틴 마블은 신문배달원이라는 공통점까지 지닌다.
하지만 인기는 원조인 슈퍼맨을 앞질렀다. 슈퍼히어로 만화의 황금기였던 1940년대 캡틴 마블의 인기는 슈퍼맨을 능가했다. 슈퍼맨을 닮았지만 슈퍼히어로 만화의 주 구독층인 10대의 입맛에 맞게 열두 살(영화에선 열네 살) 소년이 어른으로 변신한다는 점과 그리스 신화 및 중세 마술을 접목한 점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DC코믹스가 가만히 두고 봤을 리 없다. 영화화가 먼저 되면서 만화 판매량까지 슈퍼맨을 따라잡는 것을 보고 1941년 저작권 침해 소송을 낸다. 이 소송은 1953년까지 12년간 이어지며 ‘슈퍼히어로 역사상 최장 소송’이 된다. 1951년 1심 판결은 캡틴 마블의 승리였다. 법원은 슈퍼맨의 상당 부분을 베꼈다고 판단했지만 DC코믹스가 슈퍼맨을 신문에 연재하면서 저작권 고지를 소홀히 했기에 저작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슈퍼맨 저작권까지 잃게 생긴 DC코믹스는 놀라서 바로 항소했고 2심 재판 도중 슈퍼맨에 대한 저작권을 다시 인정받게 된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감을 감지한 포셋코믹스는 1953년 ‘캡틴 마블’ 시리즈를 더는 출간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40만 달러(현 가치로는 400만 달러·약 45억5400만 원)의 합의금을 지급하고 DC코믹스와의 소송을 종료한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판매량 1등을 질주하던 ‘캡틴 마블’ 만화 판매량이 종전과 함께 절반으로 뚝 떨어지자 아예 출판 모기업에서 만화사업을 사실상 접어버리며 내린 결정이었다.
여성 히어로로 부활한 캡틴 마블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슈퍼히어로물은 1960년대 제2 전성기를 맞는다. 이때 DC코믹스의 라이벌로 떠오른 만화사가 마블코믹스다. 1939년 타임리 퍼블리케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 만화사는 슈퍼히어로물 최전성기인 1940년대 ‘캡틴 아메리카’로 쏠쏠한 재미를 봤다. 그러다 1961년부터 마블코믹스로 이름을 고친 뒤 ‘판타스틱 포’ ‘헐크’ ‘스파이더맨’ ‘토르’ ‘앤트맨’ ‘아이언맨’ ‘X맨’ ‘닥터 스트레인저’ ‘데어데블’ ‘블랙 팬서’를 줄줄이 발표하며 제2 전성기를 주도한다.그런데 만화사 이름이 마블인데 정작 그 이름이 들어간 ‘캡틴 마블’은 엉뚱한 만화사의 대표작이었다. 이를 의식한 마블코믹스는 1967년 ‘캡틴 마블’ 캐릭터를 처음 선보인 후 2년에 한 번씩 캐릭터를 바꿨고 결국 1972년 해당 캐릭터의 저작권을 확보했다. 마블코믹스 최초의 캡틴 마블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외계문명 크리에서 지구를 감시하라며 미군 장교로 변신시켜 잠입케 한 남자 외계인 마벨(Mar-Vell)이다. 마벨은 크리족에 의해 유전자 변형이 이뤄진 니트로라는 빌런(슈퍼히어로물 속 악당)에 의해 신경가스에 노출됐다 치명적인 암에 걸려 죽는다.
이후 다양한 캐릭터가 ‘캡틴 마블’을 맡지만 2012년 여자 공군 조종사 캐럴 댄버스가 그 역할을 맡게 된다. 올해 영화화된 작품은 이를 토대로 했다. 원작 만화에선 남자였던 마벨이 여기에선 지구로 잠입해 은하계 간 초고속 우주여행이 가능한 엔진을 개발한 여자 과학자로 등장한다. 댄버스가 마벨의 이름을 이어받으면서 비슷한 영어발음을 따 ‘캡틴 마블’이 된다는 설정은 포셋코믹스 ‘캡틴 마블’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고대로부터 샤잠이라는 비밀스러운 이름을 이어받는 계승자가 마법 능력을 갖춘 슈퍼히어로가 되기 때문이다.
슈퍼맨 친구가 된 샤잠
1 영화 ‘샤잠!’과 ‘슈퍼맨’ 주인공 포스터. 2 ‘슈퍼맨’과 샤잠이 ‘캡틴 마블’이던 시절의 표지. 3 ‘슈퍼맨 대 샤잠!’ 2013년 2월호 표지 이미지. [사진 제공 ·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위키피디아, DC코믹스]
‘캡틴 마블’이라는 캐릭터명은 마블이 확보한 바람에 정식으로 쓸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빌리 뱃슨이 슈퍼히어로로 변신할 때 외치는 주문 ‘샤잠!’을 제목으로 쓰면서 소제목으로 ‘오리지널 캡틴 마블’을 붙였다. 하지만 곧바로 마블코믹스 측의 항의를 받은 데다 대다수 사람이 샤잠을 해당 캐릭터의 이름으로 받아들이자 1974년부터 샤잠을 공식 캐릭터명으로 삼고 지난해 12월까지 일군의 작품을 발표해왔다.
샤잠의 이런 이질적 혈통은 영화 ‘샤잠!’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주인공 빌리 뱃슨이 다니는 학교 이름이 ‘포셋센트럴’이라는 점은 포셋코믹스에 대한 오마주다. 또 빌리 뱃슨이 닥터 시바나에게 쫓겨 군중 속에 숨어들었을 때 사람들이 그를 알아봐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나게 되자 “저 그 사람 아니에요. 짝퉁이에요, 짝퉁!”이라고 외치는 장면은 샤잠의 흑역사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다. 영화 막판 그의 영원한 라이벌 슈퍼맨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것 역시 그들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을 위한 달콤쌉쌀한 디저트다.
샤잠 처지에선 슈퍼맨 짝퉁 취급이 억울할 수도 있다. 슈퍼맨이 처음 등장했을 땐 하늘을 날지 못했지만 샤잠이 하늘을 나는 것을 보고 그 능력이 추가됐기 때문이다. 또 슈퍼맨의 친구이자 빌런인 렉스 루터가 대머리가 된 것 역시 샤잠의 빌런인 닥터 시바나가 대머리로 그려진 것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 더 있다. 원조 슈퍼히어로인 슈퍼맨은 너무 완벽한 존재라 약점이 없다는 문제를 겪었다. 고향인 크립턴 행성의 운석이 그의 아킬레스건이라는 서사는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 반면 손가락으로 번개까지 쏠 수 있어 슈퍼맨을 능가하는 듯 보이는 샤잠은 태초부터 결정적 약점을 내재하고 있었다. 몸은 어른인데 마음은 어린이라는 점이다. 슈퍼히어로 영화가 개봉하면 득달같이 달려가 보면서도 “너무 어린애 취향이야”라고 투덜대는 어른아이(키덜트)를 거울처럼 비추는 존재, 그게 바로 샤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