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 극단 프랑코포니]
매년 3월 20일(프랑코포니의 날)을 전후해 우리나라에서도 프랑스어권 문화를 소개하는 영화제, 공연, 강연회, 요리축제가 이어지는데, 그 가운데 백미는 단연 ‘극단 프랑코포니’의 연극 ‘아홉소녀들(Neuf Petites Filles)’이다. 올해로 창단 10주년을 맞는 극단 프랑코포니는 불문학자인 임혜경 숙명여대 교수와 연출자인 까띠 라뺑 한국외대 교수가 중심이 돼 만들었으며, 프랑스어권 현대연극을 발굴해 국내에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검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배우 9명이 무대에 등장해 마치 모델처럼 포즈를 취한다. 곧이어 조명이 어두워지면 배우들은 양쪽으로 나뉘어 교복을 연상케 하는 빨간 타이와 치마, 흰 블라우스로 갈아입기 시작한다. 이제 이들은 소녀가 돼 그들만의 놀이를 시작하는데, 경악스러운 놀이 주제로 관객의 낯은 달아오른다. 어린이가 순수한 것은 그들의 타고난 ‘맑은 심성(pure)’ 때문이 아니라 뭐가 죄인지 모르는 ‘순진무구함(innocent)’ 때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어른의 거울인 소녀들은 놀이를 통해 페미니즘, 성폭력, 차별, 비만, 소외, 승자독식, 왕따, 동성애, 이주민 문제 등 다양한 주제를 적나라하게 다룬다. 파워게임 속 가해자(지배자)와 피해자(희생자)의 존재가 명확하게 부각되는 소녀들의 잔인한 이야기에서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가 그대로 드러난다.
90분간 펼쳐지는 23개 ‘놀이 에피소드’에서 배우들은 정해진 배역 없이 에피소드마다 다양한 역할을 한다. ‘프티트 피유(Petite Fille)’는 보통 취학 전 아동부터 중학생까지 소녀들을 지칭하지만 무대 위 여배우들은 중학생이라 하기에도 무척 성숙해 보인다. 소녀를 연기하는 남자 배우도 3명이나 있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극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의상(디자이너 박소영)의 힘이다.
원작자인 상드린느 로쉬(48)는 프랑스에서 주목받는 극작가 겸 연출가이자 배우다. ‘아홉소녀들’은 이미 브라질어, 슬로베니아어, 덴마크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로 번역, 공연된 바 있다. 기존 무대언어 방식을 뒤집는 독특한 전개로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세련되고 모던한 무대장치와 까띠 라뺑의 감각적인 연출이 주는 색다른 프랑코포니적인 감수성에서 동시대의 보편적 사회문제를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