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이후 관세청의 업무는 국경 관리에서 세수 확보로 확대됐다.
지난 2008년 관세청 원산지검증과 사무실에 순간 긴장감이 돌았다. 원산지 검증시스템 쪽으로 팀원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해당 모니터에는 스위스산 금괴 수입량이 가파르게 증가폭을 그리고 있었다. 한-EFTA FTA 체결 직후와 시점이 정확히 일치했다. EFTA는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4개국 지역경제기구.
의심스러운 징후에 검증과는 즉각 정보수집에 들어갔다. 금괴 공급자들을 추적한 결과 정체가 모호했다. 스위스산 금괴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검증과는 스위스 측에 원산지 검증을 요구했다. 확인 결과 수입된 금괴는 반쪽짜리임이 드러났다.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저순도 금을 스위스에서 고순도로 가공해 한국으로 수출한 것. 관세청은 금괴 위반사례 16건에 대해 모두 190억 원을 추징했다.
데이터 시스템과 첩보 토대로 원산지 검증
한국은 이제 막 FTA(자유무역협정) 걸음마를 뗐다. 2004년 칠레를 시작으로 싱가포르, EFTA, 아세안, 인도 등 5개 경제권 16개국과 FTA를 맺었다. 올해 안에 한-EU, 내년 이후 한-미 FTA가 발효되면 본격적인 FTA 시대가 열린다. 캐나다, 멕시코, 페루, 호주, 뉴질랜드, 콜롬비아, 터키 등 8개 경제권과 협상을 진행 중이다.
FTA라면 보통 외교통상부(이하 외통부)를 떠올리지만, 관세청의 역할도 크다. 각 협정의 관세율을 정하고 수출입 물품의 원산지 인증·검증 작업을 하는 곳이 관세청이기 때문이다. 외통부가 협상의 선봉장이라면 관세청은 집행을 담당하는 곳이다. 관세청 FTA 종합대책본부 원산지검증과 김석오 사무관의 설명.
“관세청의 전통 업무는 국경 관리다. 공항과 항구로 들어오는 수입품을 검역하고 밀수품을 적발한다. FTA 체결 이후 원산지 관련 업무가 중요해지면서 업무 범위도 넓어졌다. FTA 종합대책본부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수출품에 대한 원산지 인증과 수입품에 대한 원산지 검증은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인증한 자국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상대국에서 다시 검증을 요청해온다. 간단해 보이지만 인증과 검증 모두 까다로운 작업. LCD 제품 하나를 인증하려면 사용한 부품 2만 개에 대한 원산지 증명을 거쳐야 한다. 협정과 품목마다 인증 기준과 관세 적용률이 달라 관세 혜택을 추정하는 일도 쉽지 않다.
수입품에 대한 검증 작업도 머리 아프긴 마찬가지. 과거 데이터를 토대로 한 분석시스템 결과와 첩보를 토대로 위험 품목을 추린 뒤, 수출업체와 원산지 공급업체를 추적해야 한다. 거액의 추징금을 물린 스위스 금괴 건은 데이터 시스템을 통해 발견한 성과였다.
원산지 검증은 직접 검증과 간접 검증으로 나뉘는데 수출 국가가 작업하면 간접, 수입 국가가 상대국으로 가서 하면 직접 검증이라고 한다. FTA 종합대책본부 총괄과 최연수 사무관은 “협정마다 규정이 다르지만 유연하게 진행한다. 직접 검증이 원칙이라도 거리가 멀거나 위험성이 적으면 간접 검증을 하기도 한다. 미국은 수십 차례 외국에 드나들며 엄격하게 직접 검증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적극적으로 FTA 대비해야
“축하합니다. 이제 복잡한 과정 없이 관세 특혜를 받게 됐네요.”
8월 3일 관세청 부산 세관 직원들이 농심 해외영업팀 직원들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이날 농심은 라면과 스낵 품목에서 한-아세안 FTA 원산지 인증 수출자로 지정됐다. 농심은 향후 3년간 아세안 지역에 ‘신라면’과 ‘새우깡’ 등 스낵을 수출할 때 손쉽게 관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추정 혜택규모는 2009년 교역량 기준 약 98만 달러. 농심의 한 직원은 “수많은 하청업체를 찾아다니며 라면 수프 원산지를 일일이 확인한 끝에 결실을 맺은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 간 관세장벽을 허무는 FTA는 기업에게 위기이자 기회다. 수입업체는 관세 없이 저렴하게 물건을 사고, 수출업체는 시장을 넓힐 수 있다. 어떻게 대응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기업의 운명이 갈리는 것이다. 한-EU FTA 체결로 예상되는 관세절감 혜택은 연간 최대 15억 달러, 한-미 FTA의 혜택은 연간 6억 달러에 이른다. 경제규모는 미국이 앞서지만 협정 체결 품목이 다르기 때문이다.
FTA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만들려면 사전 준비가 중요하다. 기업으로선 초반에 승부를 봐야 한다. 하지만 지난 4월 무역협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75%가 FTA 활용을 포기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 김 사무관은 “어렵다고 손을 놓고 있으면 해당 기업만 손해”라고 강조했다.
“원산지 인증 절차는 까다롭다. 협정마다 인증 기준이 다르고 품목별 관세 혜택도 제각각이라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된다. 기업들은 도움 받을 곳이 마땅치 않아 그냥 덮어두는데 포기해선 안 된다. 관세청에 문의해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상대국에 맞설 수 있다. 원산지 정보를 주고받는 관행이 정착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EU나 미국과의 FTA 협정을 앞두고 FTA 종합대책본부는 더욱 분주해졌다. EU와 미국 시장은 기존 협정국들과 비교할 수 없이 방대하다. 규모가 큰 만큼 혜택과 위반 사례가 늘어날 가능성도 크다. 수출입 품목도 기존 협정국들과 차이가 있다. 기존 국가들은 우리와 수출입 품목이 겹치지 않아 평화로운 윈-윈 관계를 유지했고, 원자재가 대부분이어서 인증과 검증 절차도 비교적 수월했다. 하지만 미국과 EU는 우리의 주력 수출품목과 겹쳐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신경전이 치열하다. 세수 확보와 자국 보호를 위한 국가 간 기 싸움도 팽팽하다. 검증에 검증으로 보복하는 악순환을 방지하려면 철저한 인증 작업이 중요하다.
최 사무관은 “스위스 금괴 추징 이후 스위스 관세청에서 난데없이 우리 자동차에 대한 검증을 요구해왔다. 외교문제로 비화하지 않도록 양국 간 접점을 찾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국과 EU는 FTA 선진국이다. 반세기 이상 시행착오를 거쳐 원산지 시스템은 물론 검증 노하우도 탁월하다. 원산지가 허위로 판명되면 관세청은 수입업체에 관세를 물리고, 수입업체는 다시 수출업체에 소송을 제기하는 등 큰 출혈을 치러야 한다.
김 사무관은 “세계 시장은 이미 개방됐다. FTA에 걸맞은 기업으로 도약하려면 관세청에서 무료 컨설팅을 미리 받기를 권한다. 다소 어렵고 귀찮아도 체질 개선을 하고 나면 FTA 무대의 강자가 될 수 있다”고 당부했다.
한국은 현재 5개 경제권 16개국과 FTA 협정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