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눈 오는 날 살해당한다. 참혹한 살인이다. 인간의 몸이 고깃덩어리가 되는 순간이며, 시간을 돌이킬 수도 없다. 살인마는 늘 천사 모양의 날개를 단 백미러로 세상을 훔쳐본다. 약혼녀를 잃은 사내는 장례식장에서 주먹을 부르르 쥐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복수를 다짐한다.
장르적으로 보았을 때, ‘악마를 보았다’는 스릴러라고 하기에는 대단히 부적절한 구석이 있다. 스릴러의 경우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대결의 합이 장르적 쾌감을 준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연쇄살인마에게 위치추적기를 삼키게 함으로써 추적의 아슬아슬함을 일찌감치 거세해버린다. 게다가 플롯은 초등학생도 그 허술함을 지적할 수 있을 정도로 벙벙하다. 장인과 처제를 몰살하겠다고 선언한 악마(최민식 분)를 쫓아가면서, 주인공 수현(이병헌 분)은 장인에게는 애타게 전화를 하지만 처제에겐 한 통도 하지 않는다. 참 똑똑한 주인공이 아닌가.
그렇다면 플롯과 스릴의 쾌감을 희생하고라도 김지운 감독이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총력을 다해 폭력을 바라보게 하기보다는 그것을 ‘체험’하게 만든다. 전작 ‘달콤한 인생’이 매끄러운 질감의 우아한 액션 관광이었다면, ‘악마를 보았다’가 지향하는 폭력은 포악하고 구체적이며 심지어 통제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수현의 약혼녀는 안전한 차 안에서 문을 잠근 채 수현과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고 있었지만 살인마의 엄습을 피할 수 없었다.
연출은 시종일관 살인자와 피해자의 시점 숏으로, 그것도 거의 매 장면이 클로즈업으로 점철돼 있다. 영화 속 칼날이 영화 밖 관객에게 떨어진다. 즉 연쇄살인범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관객, 악마와 동일시하는 관객이라면 그 역시 악마가 돼야 하는 상황. 반대로 사지 절단당하는 피해자와 동일시하는 관객은 극단의 공포가 덮친다. 이러한 분열증적 관람 경험에서 관객이 느끼는 메스꺼움과 불편은 누군가에게 계속 둔기로 얻어맞는 것처럼 (실제로 영화 초반부의 살인은 모두 둔기로 이뤄진다) 고약하다.
2시간 동안 부지런히 두 눈으로 주워 담은 피의 대가로 ‘악마를 보았다’는 폭력의 전염성과 폭력의 기원에 대해 성찰한다. “사람이 짐승을 상대하자고 짐승이 되면 되겠냐”라는 대사는 감독이 관객에게 쥐어주는 밑줄 긋는 주제다. 사랑하는 약혼녀를 참혹하게 잃고, 오로지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가는 수현은 결국 악마와 싸워서 악마와 닮아버린다. 게다가 반복되는 살인과 복수에 지쳐갈 즈음에는 슬그머니 연쇄살인범의 폭력에 무감각해지기까지 한다. 분노는 그토록 쉽게 전염되고, 복수는 그토록 쉽게 정당화되며, 폭력은 그토록 쉽게 무감해지는 것이다.
문제는 관객에게 가하는 무자비한 폭력과 탈(脫)동일시 시험은 이미 스탠릭 큐브릭, 가스파 노에 같은 진짜 악마들이 센세이셔널한 방식으로 해봤다는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는 큐브릭의 비전과 노에의 메시지, 잔인한 사적 복수의 이미지(잘린 귀, 잘린 머리통)를 한국적인 장르 안에서 극단의 경지로 밀고 나간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튀는 피와 너덜너덜한 살점을 걷고 나면 앙상한 플롯, 완급 없는 리듬, 실종된 스릴, 새로울 것 없는 메시지만 무참히 나뒹군다.
이왕 악마를 보아야 한다면 창의적이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강렬한 도발이라는 이름의 악마를 보고 싶다. ‘악마를 보았다’는 관객에게 장르적 쾌감도 없는 무간지옥의 영화 경험을 뇌에 쑤셔 넣은 채 그냥 떠나버린다. 이미 각인된 이미지에 총체적인 심리적 억압기제를 발동할 수밖에 없는 사후 숙제만 남긴 채.
장르적으로 보았을 때, ‘악마를 보았다’는 스릴러라고 하기에는 대단히 부적절한 구석이 있다. 스릴러의 경우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대결의 합이 장르적 쾌감을 준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연쇄살인마에게 위치추적기를 삼키게 함으로써 추적의 아슬아슬함을 일찌감치 거세해버린다. 게다가 플롯은 초등학생도 그 허술함을 지적할 수 있을 정도로 벙벙하다. 장인과 처제를 몰살하겠다고 선언한 악마(최민식 분)를 쫓아가면서, 주인공 수현(이병헌 분)은 장인에게는 애타게 전화를 하지만 처제에겐 한 통도 하지 않는다. 참 똑똑한 주인공이 아닌가.
그렇다면 플롯과 스릴의 쾌감을 희생하고라도 김지운 감독이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총력을 다해 폭력을 바라보게 하기보다는 그것을 ‘체험’하게 만든다. 전작 ‘달콤한 인생’이 매끄러운 질감의 우아한 액션 관광이었다면, ‘악마를 보았다’가 지향하는 폭력은 포악하고 구체적이며 심지어 통제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수현의 약혼녀는 안전한 차 안에서 문을 잠근 채 수현과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고 있었지만 살인마의 엄습을 피할 수 없었다.
연출은 시종일관 살인자와 피해자의 시점 숏으로, 그것도 거의 매 장면이 클로즈업으로 점철돼 있다. 영화 속 칼날이 영화 밖 관객에게 떨어진다. 즉 연쇄살인범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관객, 악마와 동일시하는 관객이라면 그 역시 악마가 돼야 하는 상황. 반대로 사지 절단당하는 피해자와 동일시하는 관객은 극단의 공포가 덮친다. 이러한 분열증적 관람 경험에서 관객이 느끼는 메스꺼움과 불편은 누군가에게 계속 둔기로 얻어맞는 것처럼 (실제로 영화 초반부의 살인은 모두 둔기로 이뤄진다) 고약하다.
2시간 동안 부지런히 두 눈으로 주워 담은 피의 대가로 ‘악마를 보았다’는 폭력의 전염성과 폭력의 기원에 대해 성찰한다. “사람이 짐승을 상대하자고 짐승이 되면 되겠냐”라는 대사는 감독이 관객에게 쥐어주는 밑줄 긋는 주제다. 사랑하는 약혼녀를 참혹하게 잃고, 오로지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가는 수현은 결국 악마와 싸워서 악마와 닮아버린다. 게다가 반복되는 살인과 복수에 지쳐갈 즈음에는 슬그머니 연쇄살인범의 폭력에 무감각해지기까지 한다. 분노는 그토록 쉽게 전염되고, 복수는 그토록 쉽게 정당화되며, 폭력은 그토록 쉽게 무감해지는 것이다.
문제는 관객에게 가하는 무자비한 폭력과 탈(脫)동일시 시험은 이미 스탠릭 큐브릭, 가스파 노에 같은 진짜 악마들이 센세이셔널한 방식으로 해봤다는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는 큐브릭의 비전과 노에의 메시지, 잔인한 사적 복수의 이미지(잘린 귀, 잘린 머리통)를 한국적인 장르 안에서 극단의 경지로 밀고 나간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튀는 피와 너덜너덜한 살점을 걷고 나면 앙상한 플롯, 완급 없는 리듬, 실종된 스릴, 새로울 것 없는 메시지만 무참히 나뒹군다.
이왕 악마를 보아야 한다면 창의적이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강렬한 도발이라는 이름의 악마를 보고 싶다. ‘악마를 보았다’는 관객에게 장르적 쾌감도 없는 무간지옥의 영화 경험을 뇌에 쑤셔 넣은 채 그냥 떠나버린다. 이미 각인된 이미지에 총체적인 심리적 억압기제를 발동할 수밖에 없는 사후 숙제만 남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