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을지로에 설치한 LED 전자현수막은 LG CNS 직원들의 아이디어가 모아져 탄생했다.
2008년 4월 1일. 인터넷 세상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구글코리아가 만우절을 맞아 ‘사투리 번역 서비스’를 제공한 것. 이 프로그램은 구글코리아 직원들의 ‘자발성’이 만들어낸 결과다. 마케팅팀의 한 직원이 “사투리를 번역해주는 서비스를 만들어보자”며 전 직원에게 e메일을 보냈고, 7명이 “나도 해보고 싶다”고 나서 ‘방언팀’이 꾸려졌다. 이들이 개발해 제공한 사투리 번역 서비스는 비록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지만, 덕분에 누리꾼들은 구글코리아의 ‘검색 열정’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요즘 서울 번화가에서는 LED 전자현수막이 종종 눈에 띈다. 이 신기한 ‘물건’은 다름 아닌 LG CNS 직원들의 아이디어가 더하고 보태진 결과. 한 직원이 사내 인트라넷 ‘신사업 제안’ 게시판에 “천으로 된 현수막은 도시 미관을 떨어뜨린다. 전자종이처럼 새로운 매체를 활용해 예쁜 광고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한 것이 실마리가 됐다. 그 뒤 “전자종이는 언제 상용화될지 모른다. 다른 방법을 찾자” “그렇다면 LED가 어떨까?”라는 댓글이 연이어 달렸다. 이어 전략마케팅팀의 검토를 거쳐 사업화 결정이 났고, LG CNS는 정보기술(IT) 융합사업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하게 됐다.
지구촌 장삼이사가 모여 8년 만에 1000만 단어 이상의 정보를 구축한 온라인 무료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 세계적 과학저널 ‘네이처’가 인정했듯, 이 자발적인 참여가 낳은 지식의 정확성은 권위 있는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와 비교해 별반 차이가 없다.
국내 기업도 ‘나보다 우리’ 동참
비즈니스 영역에서도 위키피디아로 대표되는 집단지성의 힘은 경외의 대상이다. 선진 기업들은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 집단지성 활용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문가, 일반인 가릴 것 없이 비즈니스 및 기술 아이디어를 나누는 델(DELL)의 ‘아이디어스톰’, 여러 국가의 비즈니스맨과 자유토론을 벌이는 IBM의 ‘이노베이션 잼’, 전 세계에 지역 전문가 그룹을 두고 기술 및 소비자 동향을 연구하게 하는 마스터카드, 회장 대신 투자위원회가 수억 달러의 투자 결정을 내리는 시스코 등이 대표적인 예다. 국내 기업도 전통적인 상명하달 방식에서 ‘나보다 우리(We Than Me)’라는 패러다임으로 전환해나가는 데 예외일 리 없다. 앞서 언급한 두 사례는 한국판 집단지성의 성과다.
국내 기업이 즐겨 쓰는 집단지성 방법 중 하나는 ‘고객과의 대화’다. 더 나은 제품을 만들려면 소비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법. 농심의 ‘채식주의 순’ 라면만 해도 소비자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제품이다.
이 라면은 2004년 처음 출시했는데, 반응이 좋지 않아 1년 만에 판매를 중단했다. 하지만 회사 홈페이지 게시판과 전화, e메일 등을 통해 “고기가 안 들어가 내가 먹기 제격이었는데 아쉽다”(스님), “담백해서 좋았는데 왜 요즘 안 파느냐”(다이어트 중인 여성)는 건의가 속출했고 “이슬람교도를 위해 고기가 안 들어간 라면을 만들어달라”는 제안까지 접수됐다. 이에 힘입어 지난해 농심은 기존의 ‘기름에 튀기지 않은 야채라면’ 콘셉트를 ‘기름에 튀겼지만 맛있는 야채라면’으로 전환해 업그레이드형 ‘채식주의 순’을 재출시했다. 농심 윤성학 과장은 “매출 비중은 작지만 틈새시장을 개척했다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청정원이 지난해 12월 출시한 ‘카레여왕’은 잘 개어지고 채소가 먹음직스럽게 들어간 카레라는 평판을 듣는다. 이 또한 고객들의 ‘날카로운’ 지적 덕분이다.
국내 기업들이 즐겨 쓰는 집단지성 방법 중 하나는 ‘고객과의 대화’. 고객의 아이디어에 힘입어 출시한 제품들. 청정원 ‘마시는 홍초’, 농심 ‘채식주의 순’, 청정원 ‘카레여왕’, 한샘 ‘패리스 붙박이장’(왼쪽부터).
삼성전자 햅틱 아몰레드.
종합가구회사 한샘의 최근 히트상품 중 하나인 패리스 붙박이장은 보통의 장롱과 달리 위아래 색깔이 다른 ‘콤비도어’를 장착했다. 제품 출시 전 회사 측은 “콤비도어가 성공한 적 없다”며 반대했지만, 한샘의 고객모니터그룹 ‘한센스’는 “콤비도어가 더 신선하고 예쁘다”는 의견을 냈다. 한센스 프로그램 담당자인 허진선 대리는 “일종의 모험이었지만 최종적으로 소비자 뜻을 따르기로 했고, 덕분에 좋은 성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필요할 때마다 고객 의견을 구했던 한샘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아예 고객모니터그룹 운영을 정례화했다. 30여 명으로 구성된 한센스는 한샘의 요청에 따라 수시로 모여 의견을 나눈다. 한샘은 이 프로그램이 타깃 고객층을 대변할 수 있도록 30평 이상의 자가 소유 아파트에 거주하는 주부 중 인테리어에 관심 많은 이를 선발한다.
청정원도 주부 모니터 요원 제도를 운영한다. 180명의 주부가 ‘카레여왕’과 같은 신제품 출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제품 디자인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청정원의 인기제품인 ‘마시는 홍초’의 병 디자인이 지금처럼 감각적일 수 있었던 것은 미대 출신 주부 모니터 요원의 공이 컸다. “예뻐지고 싶어서 홍초를 마시는데, 용기가 식용유 병처럼 생긴 건 문제가 있다”고 건의했던 것.
아이디어 제안, 보완, 수정이 ‘대박’으로
이렇듯 소비자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것은 소비재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서비스업계 또한 ‘고객 브레인 모시기’에 동참하고 있다. LIG보험은 고객 불만사항을 분석하고 있는데, 오는 7월 발전적 지적을 해준 고객들을 ‘모셔와’ CEO와 식사하는 자리를 갖고 감사패를 전달하는 ‘LIG 발전기여상’ 수상식을 열 예정이다.
국내 기업의 집단지성 활동은 사내(社內)로도 확산 중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지식과 경험, 아이디어 등을 공유하는 것은 웬만한 기업 사이에선 일반화됐다.
LIG보험 직원들은 사내 인트라넷 ‘지식위키’에 업무 관련 뉴스는 물론 영업 노하우, 세미나 자료, 홍보자료 등을 올려놓는다. 이 회사 조윤상 씨는 “특히 보상사례나 판례 자료가 직원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며 “묻고 답하는 기능도 있어, 직원들의 질문에 유관부서가 즉각 답변을 올린다”고 전했다. ‘인맥이 곧 파워’인 건설업계에서는 직원들의 인맥을 인트라넷을 통해 공유한다. 우미건설의 ‘지인함’이 그 예인데, 직원들은 자신이 알고 지내는 인물을 친밀도에 따라 A·B·C 등급으로 분류해 지인함에 게재한다. 우미건설 안수한 정보전략팀장은 “이러한 ‘인맥지도’는 사업진행을 원활히 하는 주요한 수단 중 하나”라고 말했다.
사실 소속 직원만큼 회사에 정통한 전문가는 없다. 이들의 지식과 아이디어가 성과 창출에 유용함은 물론이다. 스타벅스 매장에 가면 비료나 방향제로 유용한 커피 찌꺼기를 무료로 나눠준다. 예전에는 종이봉투에 담아주었는데, 얼마 전부터 은색 봉투로 바꿨다. 이 봉투는 빛과 산소를 차단하는 원두포장재. 스타벅스의 한 매장 직원이 “커피 찌꺼기를 배포할 때 그냥 버리는 원두포장재를 재활용하자”고 제안한 게 계기가 됐다. 스타벅스코리아는 2008년부터 매장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사내 게시판을 통해 수집, 서비스 개선에 적극 반영하고 있다. 직원 참여율은 30%, 아이디어 반영률은 40%로 꽤 성적이 좋은 편이다.
한국지식경영학회장을 지낸 광운대 이홍 교수(경영학)는 “기업의 지식공유 시스템은 날로 진화해 단순한 정보 취합에서 위키피디아처럼 지식의 수정, 보완까지 이뤄지는 추세”라고 전했다. 실제로 포스코, KT 등 선도기업은 위키피디아 형태의 지식공유로까지 진척시키고 있다. 앞서 언급한 LG CNS의 LED 전자현수막도 사내 지식을 모으는 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이 회사 김종욱 과장은 “자기 아이디어가 현실화된다는 짜릿함 때문에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내놓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브레인 참여 “활성화 여부가 관건”
구글코리아는 매주 금요일 전 직원이 ‘TGIF’라는 친목도모 시간을 갖는다. 덕분에 말단 직원들도 의견을 적극 개진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우미건설 또한 직원들의 아이디어 덕분에 생산비용을 줄였다. 통상 건설회사에서는 건설을 시작하고 마치는 단계에만 각각 착공(鑿空)보고서와 준공(竣工)보고서를 작성하기 때문에, 준공보고서가 나오고 나서야 해당 프로젝트의 문제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직원들의 제안을 수용해 전체 공정을 40여 개로 나눈 뒤 ‘공정별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한 뒤로는 문제점을 바로 고칠 수 있게 됐다. 한 공사현장에서 공사하다 잘못된 점이 있어 공정별 보고서에 기재하면, 다른 공사현장에서 이를 반면교사 삼는 것이다.
직원과 고객의 두뇌를 빌리는데, 사외 전문가 브레인을 빌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국내 기업은 협력사, 교수나 전문연구원 등 전문가 집단을 통해 더 나은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27년째 진행하고 있는 유한킴벌리의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활동이다. 유한킴벌리는 산림청 관계자, 국립한림과학원 관계자, 생명의 숲 활동가가 모인 ‘조림사업운영위원회’를 통해 나무 심을 곳과 심을 품종 등 ‘적지(適地)’와 ‘적수(滴樹)’를 찾는다. 포스코는 ‘글로벌 학습조직(CoP·Community of Practice)’을 통해 협력사, 해외법인, 대학, 연구소 등과 협업한다. 포스코 관계자는 “2005년 828명이 글로벌 학습조직에 참여했는데, 현재 3만5300여 명으로 크게 늘었다”며 “인적 네트워크를 공고히 하는 것은 물론 연구 활동, 정보 및 업무 교류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소비자 의견을 경청하는 데서 시작한 국내 기업의 집단지성은 인터넷 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차 진화하고 있다. 사내는 물론 사외 전문가의 브레인을 빌릴 수 있는 통로가 온·오프라인 모두 잘 구축됐기 때문에 앞으로 집단지성의 시도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솔루션을 구축했다고 모든 기업이 집단지성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브레인’이 참여하지 않으면 솔루션은 ‘빈집’이 되고 만다. 전략 컨설팅기업인 이언그룹 유용미 시니어 컨설턴트는 “기업의 집단지성은 목표가 분명하고 참여자가 서로 잘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적다”며 “다만 얼마나 활성화하느냐에 성패가 달렸다”고 지적했다. 카이스트 테크노경영대학원 김영걸 교수는 “활성화에 실패한 기업이 있는 게 현실이라 하더라도 지식 공유 패러다임은 여전히 발전하는 추세”라며 “앞으로는 해외 전문가 및 소비자까지 연결해 집단지성을 시도하는 국내 기업이 점차 많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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