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남자’는 뻔뻔하고 천박한 우리 시대 중년의 자화상이다.
윤상수는 천박한 속물이다. 노래방에서는 하룻밤 즐길 유부녀 도우미를 찾고, 계약에 필요하다면 엄마뻘 사모님을 유혹하는 일도 불사한다. 그에게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행위가 아니라 사회가 남자에게 허락한 권력이다. 때로 그는 이 권력을 권리처럼 돈벌이에 이용한다. 그렇다면 윤상수는 천박해서 칼에 찔린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의 속물근성으로 칼을 맞는다는 것은 어쩐지 불합리해 보인다. 사실 윤상수 정도의 속물은 대한민국의 이웃집만큼이나 많고 많으니 말이다.
어떤 점에서 윤상수는 2010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40대의 중간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갖지 않으면 남이 빼앗아갈까봐 아등바등 돈에 매달리는 속물적 삶이 바로 지금, 이 땅의 현실이다. 윤상수의 생활방식에서 진심이나 윤리 등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한때 운동권이기도 했고 시골 출신에 소박한 녀석이었지만, 이런 과거의 모습은 현재의 그를 도저히 설명해줄 수 없다.
돈벌이를 위해 몸 로비를 하는 남자, 가슴 성형수술을 해달라고 칭얼대는 어린 애인을 둔 남자, 꽤 잘나가는 부동산중개업자. 그는 한때 이 땅의 윤리이고자 했던 386세대의 현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소년이 여자를 연애 대상으로 여기는 순간 남자가 된다면, 남자는 돈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순간 아저씨가 된다. 윤상수는 어느새 속물이 돼버린 우리 사회 아저씨의 표본인 것이다.
윤상수는 원하는 토지계약을 따내기 위해 리조트 사업에 반대하는 환경운동가의 뒤를 캔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속담은 윤상수에게 유용한 무기가 된다. 아무렇지 않게 상대의 트라우마를 파헤치고 원하는 바를 얻어낸다. 환경이니 윤리니 하는 거창한 말은 환전 불가능한 것이니 폐기처분한다. 그에게 돈이 안 되고, 쾌락이 안 되는 것은 쓸모없는 게 아니라 죄악이다.
문제는 윤상수만 세상만사에 찌들어 아저씨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10년 묵은 혼수가구처럼 늘 제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아내는 자기의 죽마고우와 바람을 피우고, 자기보다 어린 사기꾼에게 농락당하며 계약을 뺏긴다. 계약 건으로 알게 된 조폭은 수익이 나지 않을 경우 각오하라며 목줄을 조여온다. 그러고 보니 평범한 남자 윤상수의 주변에는 평범하지 않은 일투성이다.
자, 그럼 누가 이 남자의 배에 칼을 꽂은 것일까. 영화는 윤상수가 칼을 맞는 장면에서 시작해 그 장면으로 되돌아와 끝난다. 감독도 역시 묻는다. ‘과연 이 평범한 남자가 칼에 찔리는 이유는 뭘까요?’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도 있다. ‘혹시 지금 이 영화를 보는 당신 역시 이 남자만큼 속물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감독은 이웃집 남자가 곧 우리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평범한 속물의 비범한 죽음이 주는 아이러니, ‘이웃집 남자’는 그런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