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7일자 일간지 사회면에 실린 기사의 요지는 이렇다. 2006년 성매매를 하다 임신한 여중생 김은지(가명) 양을 “낙태시켜주겠다”며 자기 자취방으로 유인해 강간한 것도 모자라, 성매매까지 시킨 소방공무원이 경찰에 붙잡혔다는 것. 게다가 당시 은지 양은 이미 상습적으로 외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하던 상태. 짧은 기사에 드러난 은지의 삶은 더 이상 나쁠 수 없어 보였다.
3월 18일 이 사건을 담당한 서울 서부경찰서 이호 경장을 찾았다. 신문에 보도된 그녀의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수소문 끝에, 스무 살이 된 그녀가 경기도 화성의 한 아파트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산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3월 20일 화성에서 그녀를 만났다.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
“다시 돌아가면 다 찔러 죽일 거예요.”
은지는 수북이 자란 앞머리로 얼굴을 가렸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일까봐 계속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어내렸다. 피부는 아기처럼 희고 보드라웠다. 키가 150cm도 되지 않는 작은 몸. 입에 담기도 힘든 일을 견뎌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은지는 1999년 아홉 살 때 작은외삼촌의 친구인 장모 씨에게 강간을 당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엄마한테 말해봤자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을 거예요. 엄마는 똑똑하지 않으니까.”
은지의 어머니는 정신지체 2급의 장애인. 아버지도 간질을 앓고 있어 발작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멀쩡할 때는 술을 마시고 엄마와 은지, 네 살 어린 남동생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때 누군가한테 내가 당한 일을 말했다면, 내 인생이 이토록 망가지지는 않았을까요?”
6년 후 끔찍한 일이 또다시 발생했다. 이번에는 큰외삼촌이었다. 은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다르게 몸도 정상이고 말도 통하는 큰외삼촌 오모 씨를 잘 따랐다. 외삼촌은 곧잘 은지를 시내 PC방에 데리고 갔다. 2005년 9월 당시 열다섯 살이던 은지는 그날도 외삼촌에게 PC방에 가자고 졸랐다. 외삼촌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은지를 차에 태웠다. PC방에 갔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외삼촌은 악마로 변했다. 그는 순식간에 보조석에 앉은 은지의 작은 몸 위에 올라탔다. 돌아오는 길, 그는 숨죽여 우는 은지에게 말했다.
“외할아버지 쓰러지시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몸이 성치 않은 부모님 대신 은지 남매를 키운 외할아버지는 은지에게 부모 이상이었다. 아버지의 폭력에 못 이겨 맨발로 집을 뛰쳐나올 때마다 외할아버지 댁에 몸을 숨겼다. 그런 외할아버지는 장손인 큰외삼촌을 유독 아꼈다. 결국 은지는 이 사건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외삼촌의 성폭력은 그 후 3개월에 걸쳐 세 차례 더 있었다. 한 번은 “임신하면 위험하니까” 직접 피임도구까지 가져왔다. 일을 치른 후에는 꼭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때마다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곁들였다. 도망갈 곳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애 지워주실 분 찾습니다”
열두 살 어린 나이로 성폭행당한 ‘나영이’가 그린 그림. 성폭행 피해 아동들은 평생 씻지 못할 상처를 안고 산다.
“서울 와서 살고 싶니? 여기 좋은 일자리가 있는데, 밥도 주고 잠잘 곳도 준단다.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은지는 그길로 집을 나와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왔다. 그는 은지를 경기도 의정부로 데려가 겁탈한 후 윤락행위를 시켰다. 은지는 “매일 밤 택시에 태워져 남자들에게 ‘배달’됐다”고 표현했다. 어느 날 경찰이 들이닥쳤다. 은지는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붙잡혔다. 서울에 올라온 외할아버지는 6개월 만에 만난 손녀를 붙잡고 울고 또 울었다. 외할아버지는 조사를 마치지도 않은 채 은지를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집안 망신 그만 시키라”는 이유였다. 집에 돌아와 지내던 2006년 8월경, 은지는 몸이 이상해진 것을 느꼈다. 혹시나 해서 임신테스트를 해봤더니 임신이었다.
“어떻게 하면 뱃속의 아이를 지울까만 걱정했지, 아이를 낳겠단 생각은 해본 적 없습니다.”
이번에도 가족, 친구, 학교에 도움을 청하는 대신 인터넷에서 고충을 털어놨다. 인터넷 채팅방에서 만난 손모 씨는 “애를 지워줄 테니 수원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만나자마자 임신 3개월인 은지를 성폭행했고 이후 석 달 동안 계속 괴롭혔다. 태아를 걱정하기는커녕 “이미 홑몸이 아니니 내 아이를 임신할 걱정 없어 좋다”며 피임도구도 없이 성관계를 요구했다. 임신 6개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다시 은지는 컴퓨터 앞에 앉아 새로운 대화방을 만들었다.
“제발 애 좀 지워주세요.”
새로운 남자가 “도와주겠다”며 나타났다. 소방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당시 29세의 천모 씨. 하지만 천씨는 은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성폭행했다. 새로운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 역시 애를 지워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낮에는 주변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밤에는 그녀를 범했다. 2007년 1월경 그는 은지를 컴퓨터 앞으로 데리고 갔다.
“내 집에 사니까, 이제 돈을 벌어야지 않겠니?”
그는 인터넷 채팅방을 만든 뒤 접속한 남자에게 마치 자신이 미성년 여자아이인 척 대화를 하다가 은지를 차에 태워 어딘가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낯선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은지를 자신의 차에 태워 한적한 곳으로 가서는 성행위를 요구했다. 이후 성매매는 수차례 이어졌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감금이나 폭력은 없었다. 그런데도 은지는 천씨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은지는 한참 머뭇거리다 “배부른 채로 갈 데가 없었다”고 했다. 연세대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는 “어렸을 때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아이들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갈 곳 없는 가출 청소년 은지는 성매매의 늪에 빠져들었다.
신 교수는 또한 성폭행 피해 아동 중에 성적으로 너무 조숙해져서 무분별하게 성적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은지가 이에 해당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성행위 도중 느끼는 감정을 사람 사이의 친밀감으로 오해해 성매매를 멈추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임신 8개월. 배가 점점 불러와 임신부 티가 났다. 천씨는 그래도 계속 은지를 성매매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배 위에 손을 올려놓으면 티가 안 날 거야”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남자들은 은지가 임신 중인 걸 알고도 그녀의 성을 샀다. 은지는 그렇게 총 7명의 남자에게 20회 정도 몸을 팔았다. 모든 성행위는 상대 남자의 차 안에서 벌어졌다. 5만 원을 받을 때도 있고, 10만 원을 받을 때도 있었다. 천씨는 그중에서 1, 2만 원을 은지에게 주었다.
2007년 4월, 방에 혼자 앉아 있던 은지의 몸에서 신호가 왔다. 땀을 흘리며 겨우겨우 집 밖으로 나갔지만, 양수가 터져 길 위에 쓰러졌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차가운 길바닥에 엎어져 그녀가 소리쳤다. 지나가던 한 남자가 그녀를 수원 아주대병원까지 실어다줘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출산 이틀 후, 은지는 병원에서 소개해준 시민단체가 요구하는 대로 그들이 병원비를 내주는 대신 ‘아이를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썼다. 다시 혼자가 됐지만 갈 곳이 없었다. 천씨에게 전화를 걸어 “너무 아프다. 몸 괜찮아질 때까지만 있겠다”고 부탁했다. 천씨의 집에서 2개월을 더 보낸 후 여름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고향에서 답답함을 참지 못한 은지는 다시 수원으로 갔다. 현재 남자친구인 김모(34) 씨를 만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은지는 김씨를 만난 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채팅방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새벽 3시 수원의 한 주택가에서 직접 얼굴을 대했다.
기적적으로 남자친구를 만나다
“은지를 처음 봤을 때 너무 얇은 셔츠를 입고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고 있었어요. 얼굴은 계속 손으로 가린 채 보여주지도 않았죠. 차에서 내리라고 했더니 ‘3만 원만 달라’고 하더군요. 그런 애를 어떻게 혼자 보내요. 일단 집에 데려왔죠.”
둘은 2월경부터 함께 살았다. 2009년 3월 김씨는 정식 교제를 허락받기 위해 은지의 고향에 내려갔다. 그곳에서 은지의 조부모, 부모, 큰외삼촌을 만났다.
“그 자식(외삼촌)이 저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손을 떨더군요. 그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맘때 그는 성기가 따끔거리고 아파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성병이었다. 그는 충격을 받고 은지도 검사를 받게 했다. 은지는 “7가지 성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산후 조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성매매를 너무 많이 해서 몸이 상할 대로 상했다. 병원은 19세 은지에게 “만약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자궁 전체를 들어내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다. 치료 과정에서 김씨는 은지가 출산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불같이 화가 났지만 상처받은 은지를 감싸 안기로 결심했다. 그는 은지의 인생을 망가뜨린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몇 차례 시민단체, 경찰 등을 찾았지만 어디서도 적극적으로 수사에 착수하지 않았다.
“증거가 없어 자백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어요.”
절망에 빠져 포기하려고도 했지만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는 그녀의 새 출발을 돕기 위해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데다 은지의 과거 문제도 있어 둘 관계를 왜곡해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 정말 은지를 사랑합니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어긋난 인생을 사는 은지가 한 번만이라도 인간답게 살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6년 만에 공부 시작, 조금씩 미소 찾아
이호 경장은 2010년 1월 은지와의 첫 만남을 생생히 기억한다. 긴 머리의 은지는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경장은 “어떻게 이렇게 작은 아이가 그 험한 일을 겪었나 싶어” 더 열심히 수사에 나섰다. 동거 사실을 부인하는 천씨 때문에 경기도 수원 장안구 전체를 뒤졌다. 결국 “은지를 본 적이 있다”는 편의점 주인을 발견해 천씨의 진술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는 은지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며칠 후,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이제 기억이 났어요. 다 말할게요.”
경찰은 전북 익산에서 일하던 외삼촌과 충남 논산에서 2008년부터 소방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천씨를 붙잡았다. 손씨는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잡지 못했고, 장씨와 이씨는 각각 청소년 성폭행과 성매매 알선 혐의로 교도소 복역 중이다. 그들은 은지와 관련된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이 경장은 “증거가 충분치 않아 혐의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지만 끝까지 수사해 나머지 사람도 다 기소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3월 19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검사. 법정에서 만난 천씨의 변호사는 기자에게 은지와 천씨가 주고받은 e메일을 보여주며 “둘은 동거하지 않을 때도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성매매는 은지가 스스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은지가 성매매 한 후 돈을 내민 것 역시 “은지에게 가방과 옷 등을 사줬을 뿐, 천씨 개인적으로 쓴 적은 없고 은지가 자기 의지로 준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은지는 “그 사람, 정말 그렇게 말해요?”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더욱 기가 찬 것은 외가의 반응이다. 10년이나 상처를 안고 살았던 은지를 위로하기는커녕 “네 외삼촌이 잘못 됐으면 좋겠느냐”며 모든 걸 부인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심지어 도와준 남자친구 김씨에게 “은지가 만 20세가 되기 전부터 동거했으니 원조교제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한다. 묻어두면 될 것을 들춰내 집안 망신을 시켰다는 이유에서다. 이제 그녀에게는 돌아갈 고향도 없다. 대신 은지는 검정고시 공부에 푹 빠졌다. 6년 만에 다시 연필을 잡았다. 4월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바로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고 말한다.
“예쁜 옷도 입고 화장도 멋있게 할 거예요.”
따뜻한 사무실, 컴퓨터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듯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수줍게 웃어 보인다. 언제쯤이면 은지가 머리카락을 거둔 채 민얼굴로 밝은 빛을 마주하게 될까.
‘우리 아이 지킴이 날’ 행사에 참여한 청소년들. 언제쯤 이 아이들이 성폭행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