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껏 숨고 도망쳐도 터미네이터는 늘 적보다 한발 앞선다. 비결은 상대의 위치와 움직임을 꿰뚫는 만능안경. 눈에 담는 즉시 키, 거리, 이동경로 등 관련 정보가 와르르 쏟아진다. 곧 이 ‘터미네이터 안경’을 쓸 날이 올지 모른다. 현실에 더해진 가상,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이 우리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증강현실은 현실 위에 가상의 정보를 덧입힌 기술. 1990년 보잉사가 직원들에게 조립과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처음 사용했다. 대학과 기업 연구실에 머무르던 증강현실이 문을 박차고 나온 것은 2009년.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증강현실을 활용한 애플리케이션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덩달아 주목을 끌었다. 지명과 건물의 정보를 보여주는 ‘wikitude’ ‘layar’, 인근 커피숍을 보여주는 ‘iNeedCoffee’, 별자리 정보를 알려주는 ‘Pocket Universe’가 대표적이다.
이런 바람을 타고 증강현실을 선점하려는 기업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지난해까지 국내 총 93건이던 증강현실 관련 기업특허가 2004년 8건, 2007년 11건, 2008년 18건, 2009년 30건으로 껑충 뛰었다. 증강현실 개발업체인 제니텀의 강범석 이사는 “최근 의뢰 고객이 많이 늘었다. 현재 카드업체, 신용기관 등 다양한 곳에서 모바일 기반 애플리케이션을 준비 중이다”라고 말했다.
GPS 토대로 한 현장가이드
이미 상용화됐거나 곧 상용화될 증강현실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가상 인물인 세 아이의 엄마 강현실 씨를 통해 들여다봤다. KT경제경영연구소 최현실 연구원, 삼성경제연구소 정동영 수석연구원, 광주과학기술원 황재인 박사, 우리들생명과학기술연구소 정지훈 소장, 제니텀 강범석 이사 등에게 도움말을 받았다.
3월 막바지, 아직 봄인 척하는 겨울. 손이 곱을 정도로 날이 쌀쌀하지만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개학 후 오랜만에 학교에서 몸을 푼 아이들이 놀러 가자고 징징댄 지 2주. 이번 주말에는 기필코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어디로 갈까. 머리로 고민하기 전에 강씨는 얼마 전 장만한 스마트폰을 꺼내 ‘acrossair’에 들어간다. ‘박물관’ ‘공원’ ‘쇼핑’ ‘극장’…. 검색어를 누르면 갈 만한 곳의 그래픽이 화면에 둥둥 떠다닌다. 그가 선택한 곳은 종로구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 가깝지만 교외에 나온 기분을 느낄 수 있고 문화재 공부까지 할 수 있어 일석삼조다. 신나서 날뛰는 초등학교 3학년 우등이, 1학년인 쌍둥이 우직이와 듬직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평소 자가용을 타지만 오늘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한다. 아이들과 손을 꼭 잡고 지하철역을 오르내리며 모처럼 가족다운 기분을 내고 싶다. 충정로로 이사 온 지 두 달. 아직 이곳 지리에 익숙하지 않다. 강씨는 스마트폰에서 ‘Odiyar(어디야)’ 버튼을 눌러 인근 지하철역을 확인한다.
‘충정로역 1번 출구 도보 7분’ ‘충정로역 9번 출구 도보 5분’. 카메라를 통해 비치는 길 위로 인근 역 정보와 화살표가 뜬다. 화면 속 표지를 따라가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다는 듬직이.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든 강씨는 ‘arPharm(약국 찾기)’에 들어가 인근 약국을 검색한다.
강씨가 다운받은 ‘증강현실’ 애플리케이션은 모두 5개. “그거 없이 어찌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친구의 강력 추천에 콧방귀를 뀌었지만, 쓰는 순간 모르고 살았던 지난날이 억울해졌다. 검색창에 ‘증강현실’의 약자인 ‘ar’을 치자 쏟아지는 국내외 애플리케이션. 그중 평점이 높고 저렴한 것만 골라 받았다. 언제 어디에 있든 장소, 교통편, 편의시설 등을 알려주는 ‘Layar’ ‘acrossair’ ‘Odiyar’는 이제 습관적으로 찾는 애플이 됐다. 증강현실 애플은 빠르고 재미있고 간편해 유저(사용자)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키보드에서 터치로 진화한 인터페이스가 화면을 비추는 것만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3차원으로 튀어나온 나비와 무당벌레
고궁박물관에 도착하니 가슴이 탁 트인다. 같은 서울이지만 녹색식물이 많아 눈이 편안하고 코끝도 싱그럽다. “엄마, 우리는 책 없어요?” 멀리서 보이는 또 다른 가족. 두꺼운 여행책자를 든 부모가 우등이 또래의 아이들에게 손짓 발짓을 하며 열렬히 설명하고 있다. 부러운 표정을 짓는 우등이에게 강씨는 “책은 무거워서 집에 두고 왔다”며 다시 휴대전화를 꺼내 든다.
“이곳은 고궁박물관입니다. 1908년 창경궁 내 황실박물관으로 개관했습니다.”
왕관과 어의를 걸친 왕이 화면에 등장해 낮은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한다. 문화관광부가 시험 서비스 중인 문화재 설명 애플리케이션이다. 올해 말에는 전국 모든 문화재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처음에는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싫증나 딴청을 피우는 아이들. 강씨가 애교둥이 ‘해치’로 가이드를 바꾸자 다시 설명에 집중한다.
고궁에서 3시간 남짓 걷고 뛰고 뒹굴더니 셋 모두 배고프다고 아우성. 광화문을 거쳐 명동까지 걸어가 점심을 먹기로 한다. 종로를 벗어나기 전 아파트 ‘용비어천가’에 들러 부동산 애플을 켜서 시세를 확인. 부동산뱅크의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하는 애플을 켜자 카메라 모두 화면 위로 뜨는 정보는 ‘가구 수 675가구, 입주 연도 2004년 12월, 그중 평수 106㎡의 매매가는 상한가 3억2000만 원, 하한가 2억7000만 원’.
드디어 명동. “뭘 먹을까?” 온갖 음식을 호명하던 우직이와 듬직이가 동시에 외친다. “엄마, 화장실 완전 급해요.” 이리저리 둘러봐도 복잡한 명동 거리. 덩달아 다급해진 강씨는 서울시에서 서비스하는 ‘공중화장실’ 버튼을 누른다. 화면 속 명동 거리 위로 뜬 화살표 그래픽을 따라 서쪽으로 54m 이동했다.
돈가스를 먹기 전 가게 앞에서 ‘sekai camera’를 실행한다. “주인장 아저씨 친절, 맛도 좋아요!” “2월 28일 왔다 갑니다.” 애플리케이션이 강씨의 현재 위치와 가게 모양으로 해당 돈가스 가게를 인식하자 말풍선과 음성 파일이 줄줄이 뜬다. 다른 유저들이 올린 사진·음성·텍스트다. 점심 먹고 나오는 길, 강씨도 “나베(일본식 냄비 요리)가 특히 맛있다”고 텍스트를 올린다.
아이들의 장난감 타령이 시작됐다. 평소에는 투닥투닥 하루 스무 번도 싸우지만 장난감 가게 앞에서는 음정 박자 맞춰 한목소리다. 애교 섞인 협공에 마음이 약해진 강씨. 결국 “2만 원 이하 하나씩”이라는 단서를 달고 가게로 들어선다. 바글바글 와글와글. 곳곳을 휘젓는 꼬마들의 부산과 비명으로 눈과 귀가 어지럽다. 정신 차리고 둘러보니 아이들은 벌써 각개전투. 저 멀리 레고 코너에 우등이가 보인다. “하나만 고르라고 했잖아.” 팔뚝만 한 레고 상자 3개를 들고 고민하던 우등이는 구석의 기계로 다가가 차례로 상자를 갖다 댄다. “군함 모형 레고로 할래요!” 스크린에 뜬 조립모함의 완성 모습을 보고 우등이가 단박에 결정을 내린다.
녹초가 돼 집으로 돌아온 강씨. 아이들은 각자 방으로 흩어진다.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지만 아이들은 같이 노는 법이 없다. 3형제 모두 각자의 친구에게 몰두해 있기 때문. 우등이의 단짝 친구는 전자책과 전자카드. 특히 ‘멀고 먼 우주’ 책과 ‘곤충세계’ 카드를 좋아한다. 웹캠에 2차원 책을 갖다 대면 아스라한 보랏빛 우주를 배경으로 별과 우주선이 나타나고, 카드를 대면 0.5mm 두께에 박제됐던 곤충이 하나둘 입체를 입고 튀어나온다. 듬직이가 푹 빠진 게임은 광주과학기술원이 개발한 ‘가든 얼라이브’. 처음엔 빈 화분이었지만 물과 영양분을 줘 잎이 훌쩍 자랐다.
게임·교육 분야에서 특히 주목
같은 시간, 강씨는 인터넷 쇼핑을 위해 컴퓨터를 켰다. 옷을 입어볼 수 없는 인터넷 쇼핑은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자신과 어울리지 않을 위험이 있다. 늘씬한 모델이 걸친 것과 느낌도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이제는 안심하고 쇼핑을 한다. 웹캠을 켜고 마음에 드는 제품을 선택하면 가상이긴 하지만 여러 옷을 마음껏 입어볼 수 있다. 코디룸 서비스는 미국의 ‘zugara’가 대표적. 국내에서는 한울네오텍이 헤어스타일 체험 시뮬레이션을 준비 중이다.
남편은 야구경기 재방송에 정신이 팔려 있다. TV 화면 속 입간판 위엔 곧 열릴 경기 정보가 떠 있다. 앞으로는 입장권에 휴대전화를 비추면 좌석 위치를 찍어주는 서비스도 가능하단다.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맞는 꿀맛 같은 드라마 타임. 오늘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는 좀 답답하다. 인턴들이 시체를 훔쳤다. 수술 실습을 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라 시체를 훔쳐서라도 메스를 잡기 위해서다. 독한 인턴 하나는 서로의 몸으로 연습하자며 아예 마취를 하고 드러누웠다. 드라마를 보며 “증강현실 기술이 발달하면 의료 분야 수련과 교육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한 의사 동생의 말을 떠올린다.
“지금 증강현실은 대부분 GPS 기반 형태야. 영상 기반 형태는 광고나 방송에서 주로 쓰지. 바코드를 갖다 대면 화면에서 차가 튀어나오는 BMW, 운동화를 대면 영상이 뜨는 아디다스 운동화 광고나 선수 아래로 정보가 따라다니는 동계올림픽 화면처럼. 이 영상 기반 기술이 발달하면 의료 분야에서는 굉장히 유용하게 쓰일 거야. 내부 장기를 빔 프로젝터로 쏘아서 간접 수술 연습을 할 수 있고, 3차원 맵을 마련하면 보이지 않는 곳의 병소도 정확하게 수술할 수 있을 테니까. 영상 기반 기술이 발달하면, 세상이 한 번 더 바뀔 거야.”
증강현실은 현실 위에 가상의 정보를 덧입힌 기술. 1990년 보잉사가 직원들에게 조립과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처음 사용했다. 대학과 기업 연구실에 머무르던 증강현실이 문을 박차고 나온 것은 2009년.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증강현실을 활용한 애플리케이션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덩달아 주목을 끌었다. 지명과 건물의 정보를 보여주는 ‘wikitude’ ‘layar’, 인근 커피숍을 보여주는 ‘iNeedCoffee’, 별자리 정보를 알려주는 ‘Pocket Universe’가 대표적이다.
이런 바람을 타고 증강현실을 선점하려는 기업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지난해까지 국내 총 93건이던 증강현실 관련 기업특허가 2004년 8건, 2007년 11건, 2008년 18건, 2009년 30건으로 껑충 뛰었다. 증강현실 개발업체인 제니텀의 강범석 이사는 “최근 의뢰 고객이 많이 늘었다. 현재 카드업체, 신용기관 등 다양한 곳에서 모바일 기반 애플리케이션을 준비 중이다”라고 말했다.
GPS 토대로 한 현장가이드
이미 상용화됐거나 곧 상용화될 증강현실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가상 인물인 세 아이의 엄마 강현실 씨를 통해 들여다봤다. KT경제경영연구소 최현실 연구원, 삼성경제연구소 정동영 수석연구원, 광주과학기술원 황재인 박사, 우리들생명과학기술연구소 정지훈 소장, 제니텀 강범석 이사 등에게 도움말을 받았다.
3월 막바지, 아직 봄인 척하는 겨울. 손이 곱을 정도로 날이 쌀쌀하지만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개학 후 오랜만에 학교에서 몸을 푼 아이들이 놀러 가자고 징징댄 지 2주. 이번 주말에는 기필코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어디로 갈까. 머리로 고민하기 전에 강씨는 얼마 전 장만한 스마트폰을 꺼내 ‘acrossair’에 들어간다. ‘박물관’ ‘공원’ ‘쇼핑’ ‘극장’…. 검색어를 누르면 갈 만한 곳의 그래픽이 화면에 둥둥 떠다닌다. 그가 선택한 곳은 종로구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 가깝지만 교외에 나온 기분을 느낄 수 있고 문화재 공부까지 할 수 있어 일석삼조다. 신나서 날뛰는 초등학교 3학년 우등이, 1학년인 쌍둥이 우직이와 듬직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평소 자가용을 타지만 오늘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한다. 아이들과 손을 꼭 잡고 지하철역을 오르내리며 모처럼 가족다운 기분을 내고 싶다. 충정로로 이사 온 지 두 달. 아직 이곳 지리에 익숙하지 않다. 강씨는 스마트폰에서 ‘Odiyar(어디야)’ 버튼을 눌러 인근 지하철역을 확인한다.
‘충정로역 1번 출구 도보 7분’ ‘충정로역 9번 출구 도보 5분’. 카메라를 통해 비치는 길 위로 인근 역 정보와 화살표가 뜬다. 화면 속 표지를 따라가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다는 듬직이.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든 강씨는 ‘arPharm(약국 찾기)’에 들어가 인근 약국을 검색한다.
강씨가 다운받은 ‘증강현실’ 애플리케이션은 모두 5개. “그거 없이 어찌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친구의 강력 추천에 콧방귀를 뀌었지만, 쓰는 순간 모르고 살았던 지난날이 억울해졌다. 검색창에 ‘증강현실’의 약자인 ‘ar’을 치자 쏟아지는 국내외 애플리케이션. 그중 평점이 높고 저렴한 것만 골라 받았다. 언제 어디에 있든 장소, 교통편, 편의시설 등을 알려주는 ‘Layar’ ‘acrossair’ ‘Odiyar’는 이제 습관적으로 찾는 애플이 됐다. 증강현실 애플은 빠르고 재미있고 간편해 유저(사용자)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키보드에서 터치로 진화한 인터페이스가 화면을 비추는 것만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3차원으로 튀어나온 나비와 무당벌레
고궁박물관에 도착하니 가슴이 탁 트인다. 같은 서울이지만 녹색식물이 많아 눈이 편안하고 코끝도 싱그럽다. “엄마, 우리는 책 없어요?” 멀리서 보이는 또 다른 가족. 두꺼운 여행책자를 든 부모가 우등이 또래의 아이들에게 손짓 발짓을 하며 열렬히 설명하고 있다. 부러운 표정을 짓는 우등이에게 강씨는 “책은 무거워서 집에 두고 왔다”며 다시 휴대전화를 꺼내 든다.
현실에 입체를 덧입힌 증강현실 기술.
왕관과 어의를 걸친 왕이 화면에 등장해 낮은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한다. 문화관광부가 시험 서비스 중인 문화재 설명 애플리케이션이다. 올해 말에는 전국 모든 문화재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처음에는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싫증나 딴청을 피우는 아이들. 강씨가 애교둥이 ‘해치’로 가이드를 바꾸자 다시 설명에 집중한다.
고궁에서 3시간 남짓 걷고 뛰고 뒹굴더니 셋 모두 배고프다고 아우성. 광화문을 거쳐 명동까지 걸어가 점심을 먹기로 한다. 종로를 벗어나기 전 아파트 ‘용비어천가’에 들러 부동산 애플을 켜서 시세를 확인. 부동산뱅크의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하는 애플을 켜자 카메라 모두 화면 위로 뜨는 정보는 ‘가구 수 675가구, 입주 연도 2004년 12월, 그중 평수 106㎡의 매매가는 상한가 3억2000만 원, 하한가 2억7000만 원’.
드디어 명동. “뭘 먹을까?” 온갖 음식을 호명하던 우직이와 듬직이가 동시에 외친다. “엄마, 화장실 완전 급해요.” 이리저리 둘러봐도 복잡한 명동 거리. 덩달아 다급해진 강씨는 서울시에서 서비스하는 ‘공중화장실’ 버튼을 누른다. 화면 속 명동 거리 위로 뜬 화살표 그래픽을 따라 서쪽으로 54m 이동했다.
돈가스를 먹기 전 가게 앞에서 ‘sekai camera’를 실행한다. “주인장 아저씨 친절, 맛도 좋아요!” “2월 28일 왔다 갑니다.” 애플리케이션이 강씨의 현재 위치와 가게 모양으로 해당 돈가스 가게를 인식하자 말풍선과 음성 파일이 줄줄이 뜬다. 다른 유저들이 올린 사진·음성·텍스트다. 점심 먹고 나오는 길, 강씨도 “나베(일본식 냄비 요리)가 특히 맛있다”고 텍스트를 올린다.
아이들의 장난감 타령이 시작됐다. 평소에는 투닥투닥 하루 스무 번도 싸우지만 장난감 가게 앞에서는 음정 박자 맞춰 한목소리다. 애교 섞인 협공에 마음이 약해진 강씨. 결국 “2만 원 이하 하나씩”이라는 단서를 달고 가게로 들어선다. 바글바글 와글와글. 곳곳을 휘젓는 꼬마들의 부산과 비명으로 눈과 귀가 어지럽다. 정신 차리고 둘러보니 아이들은 벌써 각개전투. 저 멀리 레고 코너에 우등이가 보인다. “하나만 고르라고 했잖아.” 팔뚝만 한 레고 상자 3개를 들고 고민하던 우등이는 구석의 기계로 다가가 차례로 상자를 갖다 댄다. “군함 모형 레고로 할래요!” 스크린에 뜬 조립모함의 완성 모습을 보고 우등이가 단박에 결정을 내린다.
녹초가 돼 집으로 돌아온 강씨. 아이들은 각자 방으로 흩어진다.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지만 아이들은 같이 노는 법이 없다. 3형제 모두 각자의 친구에게 몰두해 있기 때문. 우등이의 단짝 친구는 전자책과 전자카드. 특히 ‘멀고 먼 우주’ 책과 ‘곤충세계’ 카드를 좋아한다. 웹캠에 2차원 책을 갖다 대면 아스라한 보랏빛 우주를 배경으로 별과 우주선이 나타나고, 카드를 대면 0.5mm 두께에 박제됐던 곤충이 하나둘 입체를 입고 튀어나온다. 듬직이가 푹 빠진 게임은 광주과학기술원이 개발한 ‘가든 얼라이브’. 처음엔 빈 화분이었지만 물과 영양분을 줘 잎이 훌쩍 자랐다.
게임·교육 분야에서 특히 주목
같은 시간, 강씨는 인터넷 쇼핑을 위해 컴퓨터를 켰다. 옷을 입어볼 수 없는 인터넷 쇼핑은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자신과 어울리지 않을 위험이 있다. 늘씬한 모델이 걸친 것과 느낌도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이제는 안심하고 쇼핑을 한다. 웹캠을 켜고 마음에 드는 제품을 선택하면 가상이긴 하지만 여러 옷을 마음껏 입어볼 수 있다. 코디룸 서비스는 미국의 ‘zugara’가 대표적. 국내에서는 한울네오텍이 헤어스타일 체험 시뮬레이션을 준비 중이다.
남편은 야구경기 재방송에 정신이 팔려 있다. TV 화면 속 입간판 위엔 곧 열릴 경기 정보가 떠 있다. 앞으로는 입장권에 휴대전화를 비추면 좌석 위치를 찍어주는 서비스도 가능하단다.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맞는 꿀맛 같은 드라마 타임. 오늘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는 좀 답답하다. 인턴들이 시체를 훔쳤다. 수술 실습을 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라 시체를 훔쳐서라도 메스를 잡기 위해서다. 독한 인턴 하나는 서로의 몸으로 연습하자며 아예 마취를 하고 드러누웠다. 드라마를 보며 “증강현실 기술이 발달하면 의료 분야 수련과 교육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한 의사 동생의 말을 떠올린다.
“지금 증강현실은 대부분 GPS 기반 형태야. 영상 기반 형태는 광고나 방송에서 주로 쓰지. 바코드를 갖다 대면 화면에서 차가 튀어나오는 BMW, 운동화를 대면 영상이 뜨는 아디다스 운동화 광고나 선수 아래로 정보가 따라다니는 동계올림픽 화면처럼. 이 영상 기반 기술이 발달하면 의료 분야에서는 굉장히 유용하게 쓰일 거야. 내부 장기를 빔 프로젝터로 쏘아서 간접 수술 연습을 할 수 있고, 3차원 맵을 마련하면 보이지 않는 곳의 병소도 정확하게 수술할 수 있을 테니까. 영상 기반 기술이 발달하면, 세상이 한 번 더 바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