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팝계의 거물 시모어 스타인과 만난 노브레인.
서울소닉이 토론토에 온 이유는 ‘캐나디안 뮤직위크(CMW)’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1981년 시작한 CMW는 캐나다에서 가장 큰 음악 컨퍼런스이자 페스티벌이다. 지난주 소개한 ‘사우스 바이 사우스 웨스트(SXSW)’와 마찬가지로 페스티벌을 위해 별도의 무대를 세우는 게 아니라 도심 곳곳에 자리한 공연장과 클럽, 카페 등을 활용해 공연이 열린다. 음악산업 전반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강연이나 기조연설, 세미나도 활발하다. SXSW가 컨퍼런스와 페스티벌의 비중, 즉 관계자와 일반 대중의 비중이 동등하다면 CMW는 관계자들을 위한 이벤트라는 느낌이 좀 더 강했다. 페스티벌 기간임을 알려주는 것은 헤드쿼터인 토론토 메리어트호텔 로비에 북적이는 인파와 거리 곳곳에 걸린 현수막 정도였다.
노브레인,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로다운30의 공연이 열린 3월 21일(현지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리마다 사람과 음악이 넘쳐나던 오스틴과는 달리 공연장인 타투 록 팔러 앞은 내내 한산했다. 흡사 겨울철 서울 부도심 분위기랄까. 100명이 채 안 되는 관객은 교민 2세나 유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밴드들은 최선을 다해 주어진 시간을 불태웠고, “1년 내내 서울소닉만 기다린다”는 유학생의 말처럼 모국의 록 공연에 굶주린 관객 역시 일당백의 호응을 보였다.
공연이 한창일 무렵 두 백인 남자가 뒤편 소파에 앉아 한국 밴드의 공연을 지켜봤다. CMW에 참석한 한국 음악산업 관계자들로부터 초대를 받고 온 이들이었다. 중절모를 눌러쓴 히스패닉계 중년 사내, 그리고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노인. 건너건너 그의 이름을 들었다. 시모어 스타인.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계 4대 메이저 음반사인 워너브라더스의 음악 부문 부회장이라는 직책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발굴하고 스타덤에 올린 수많은 전설적인 이름들 때문이다.
1941년생인 스타인은 20대 초반 빌보드에서 일하며 음악계 경력을 쌓았다. 그 후 사이어 레코드를 설립해 70년대 중반부터 제작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배출한 뮤지션 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이름은 마돈나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나. 그의 업적은 그저 스타메이킹에 그치지 않는다. 70년대 중반 그는 뉴욕 CGBG 클럽에서 공연하던 라몬스를 발굴해 앨범을 제작했고, 라몬스는 곧 펑크의 아버지가 됐다. 당시 복잡한 록에 질려 있던 미국과 영국 청년들이 라몬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밴드를 결성하면서 벌어진 것이 바로 펑크혁명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70년대 후반에는 뉴욕 아트스쿨 출신들이 결성한 토킹 헤즈 등 수많은 뉴웨이브 밴드의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무시할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스타인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평생 업적 부문에 헌액됐다.
‘전설’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거물이 한국 밴드들의 공연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일이었다. 거기에 하나 더, 그는 노브레인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며 별도의 만남을 청하기까지 했다. 이튿날 노브레인과 스타인은 메리어트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스타인은 그들에게 “너희 공연을 보느라 체력이 모두 방전됐다”는 농담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40년 전 라몬스를 보는 것 같았다”는 최고 찬사를 보냈다. 라몬스를 발굴한 장본인에게서 라몬스를 떠올렸다는 말은 펑크 밴드가 들을 수 있는 최상급 찬사다.
그는 이어 노브레인의 음반이 미국에서 발매됐느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다는 답이 돌아오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서울소닉의 다음 일정인 뉴욕 공연을 보러 오겠다면서, 노브레인에게는 자신의 사무실로 초대해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피자”를 대접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브레인은 “그 모든 순간이 꿈만 같았다”고 말한다. 그럴 만하지 않나. 관객 수도 적었던 공연에 우연히 앉아 있던 음악계 거물에게서 이 같은 관심과 제안을 받는다는 건 흡사 록 밴드를 주인공으로 한 창작물에서나 나올 법한 에피소드 아닌가. 영화 속 일이 아무렇지 않게 실제로 일어난 밤, 상상과 현실의 경계가 토론토에서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