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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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보면 안다”…이규보는 명화 감정사

고려시대 사대부, 시와 수묵화에 남다른 안목 자랑

  • 이동천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 특빙연구원

    입력2013-04-01 1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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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 보면 안다”…이규보는 명화 감정사

    그림1 보존 수리 전 ‘독화로사도’. 그림2 보존 수리 전 ‘독화로사도’ 족자 도면. 그림3 ‘독화로사도’ 족자 해체 후 부산물. 그림4 고려 은제도금신선타출무늬 향합 앞면에 두 동자가 든 그림 족자 묘사.

    유일한 고려 수묵화 ‘독화로사도(獨畵鷺絲 鳥圖)’를 필자가 어떻게 알아보고 구매했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이 궁금해했다. 필자에게 ‘작품감정론1’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필자는 2010년 3월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독화로사도’를 처음 접했다. 인터넷 미술품 경매 사이트에서 처음 찾아낸 것이다.

    모두가 하나같이 궁금해하는 것은 어떻게 모니터에 나타난 선명하지도 않은 도판만으로 작품 진위와 가치를 직감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당연히 훈련 덕분이다. 즉, 필자가 중국 ‘국가의 눈(國眼)’이라고 칭송받는 양런카이(楊仁愷·1915~2008) 선생 문하에서 훈련을 받은 결과다. 선생은 항상 “예로부터 대가(大家)인 스승 밑에서 자란 학생이 대가가 된다”고 말했다. 선생 가르침이 학생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작품 진위와 가치 판단 훈련

    감정 학습의 첫째는 보는 것이고, 둘째는 사는 것이다. 1994년 양런카이 선생은 첫 수업에서 필자에게 다음 시간까지 서화작품을 사오라고 했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기에 처음엔 당황해서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게 시작한 공부는 보는 작품마다 마치 당장 사야 할 것처럼 의식적으로 샅샅이 훑어보는 습관을 들이게 했다. 감정 공부는 반드시 가짜와 사기가 판치는, 전쟁터 같은 미술시장을 거쳐야 한다. 감정가는 작품 진위를 분명히 가릴 때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다.

    선생은 감정 수업을 받은 지 미처 한 달도 안 된 이 제자 손을 잡고 랴오닝성박물관 도서관으로 갔다. 당시 그곳 도서관은 밖에 설치된 도서카드를 통해 책을 찾는 방식이었다. 도서관 직원만이 서고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필자는 양런카이 선생의 배려로 언제든 도서관 서고에 들어가 박물관이 소장한 책을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선생은 질문에 앞서 먼저 도서관 책을 읽고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아울러 “책을 완전히 믿을 바에는 책을 보지 마라”고 주의를 줬다. 검증과 고증을 가르쳐준 것이다.



    필자는 경매 당일인 2010년 3월 20일 ‘독화로사도’ 실물을 경매 전 잠깐 확인할 수 있었다. 고색(古色)이 완연했다. 모니터를 통해 봤던 느낌과 똑같았다. 오래전 버려진 듯 종이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데다, 군데군데 찢기고 더럽혀진 상태였다. 작품을 거는 줄은 짧게 남은 지승(紙繩·종이를 꼬아 만든 실)에 녹슨 철사를 이어놓았다. ∧처럼 휜 철사는 오랫동안 허름한 집 벽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게 했다.

    과학수사에서 사건 발생 직후 증거를 확보하려면 초동수사가 중요하듯, 작품 감정에서도 발견 당시 작품 상황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독화로사도’는 이미 표구된 족자에 그림을 그린 경우다. 따라서 ‘독화로사도’의 표구 형식 또한 고려시대 족자를 연구하는 데 아주 귀중한 자료다.

    구매 후 일주일 정도 매일같이 쳐다보니 ‘독화로사도’의 심각한 상태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빠른 시간 안에 보존 수리가 절실했다. 필자는 ‘독화로사도’를 새로 표구하기에 앞서 전문 사진관에서 ‘독화로사도’의 원 표구 상태를 찍고(그림1), 족자 표구 크기를 실측한 뒤 기록했다(그림2). 새로 표구한 다음엔 표구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을 모두 모아 보관했다. 부산물을 보니 흥미로운 것은 당시 글씨가 써진 종이를 재활용해 족자 위아래 나무 봉을 쌌다는 점이다. 원 족자 안에서 다른 고려시대 글씨도 덤으로 얻게 된 것이다(그림3).

    현재 전하는 옛날 그림 중에는 본래 병풍이나 족자 작품으로 제작했다가 그 일부분이 남은 경우가 많다. ‘그림1’은 귀하게도 ‘독화로사도’를 그린 당시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림2’를 보면, ‘독화로사도’를 그린 고려시대 족자 높이가 92.8cm, 그림 크기가 76.5cm로 중국이나 조선 초기 족자나 그림보다 높이가 낮다. 고려시대 족자의 낮은 높이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직경 5.6cm의 고려 은제도금신선타출무늬 향합 앞면에 표현된 두 동자가 들고 있는 그림 족자에서도 확인된다(그림4).

    고려시대 족자 높이가 낮은 이유는 족자가 걸리는 고려시대 주택의 천장이 낮았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는 궁궐을 낮게 지어 겨우 비바람만 피했다고 한다. 이는 통일신라 말기 승려이자 풍수설 대가인 도선(827~898)의 ‘비기(秘記)’에 따른 것이다.

    “산이 드물면 높은 집을 짓고 산이 많으면 낮은 집을 짓는다. 산이 많으면 양(陽)이 되고 산이 드물면 음(陰)이 된다. 높은 집은 양이 되고 낮은 집은 음이 된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으니 높은 집을 지으면 쇠락과 손실을 초래한다. 따라서 태조 이래로 비단 궁궐 안에 집을 높지 않게 하였을 뿐 아니라 민가까지 높게 짓는 것을 금하였다.”

    “척 보면 안다”…이규보는 명화 감정사

    그림5 7세기에 그린 고개지의 ‘여사잠도’. 그림6 ‘독화로사도’ 속 쇠백로. 그림7 ‘독화로사도’ 속 유하노인 제발.

    희귀한 서화 명품 복제본

    ‘독화로사도’는 남루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왔지만 명화임에 틀림없다. 고려 대문호 이규보(1168~1241)는 그림을 평가하는 데 자신만한 사람이 없다고 자부했다. 그는 자신의 안목이 높아 최상품 그림만을 좋아한다고 했다. ‘주간동아’ 879호에서 말한 것처럼 ‘독화로사도’는 바로 이규보가 ‘그림 같은 시’로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했던 옛 명화다.

    고려시대에는 귀족가문의 아들 10명 가운데 한 명이 출가해 승려가 됐다. 귀족가문 서너 집에 한 집꼴로 승려 한 명씩 나온 것이다. 고려시대 귀족문화 중심에 승려가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백(李白·701~762) 시 ‘백로(白鷺)’를 그린 ‘독화로사도’는 ‘지덕을 갖춘 스님(上人)’인 온(溫)상인 소장으로, 늦어도 1350년경 퇴경 화사가 복제한 명화다.

    당나라 때 문헌을 보면, 서화작품을 감상하고 소장하는 사람은 희귀한 서화 명품 복제본을 힘써 만들었다고 한다. 영국박물관이 소장한 고개지(顧愷之·?~?)의 ‘여사잠도(女史箴圖)’는 장화(張華·232~300)가 292년 쓴 ‘여사잠(女史箴)’을 그린 것으로, 원작이 아니라 7세기에 복제한 명화다(그림5).

    이규보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대부에게 그림은 사대부 일이고, 타고난 천성이니 그만둘 수 없다고 했다. 이달충(?~1385) 또한 시와 그림을 하나로 여겼기에 사대부 그림을 보면서 “누가 시인이고 누가 화공이냐”고 했다. 고려시대 사대부가 수묵으로 그림 그리는 경우가 많았음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수묵으로 정교하게 그린 쇠백로(그림6)만으로도, ‘독화로사도’가 12세기 초 고려 문인화 대가가 그린 명화임을 확신할 수 있다. 유하노인 또한 이러한 이유로 ‘그림1’을 “벽에 거는 보배”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그림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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