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 장면은 만화적 과장이었다. 레코드판은 플라스틱이라는 재질 특성상 상당한 유연성과 내구성을 자랑하기 때문에 접시처럼 산산조각 나는 일은 없다고 봐도 좋다. 물론 이를 알게 된 것은 꽤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뭔가 아끼는 것을 박살냄으써 막힌 감정을 해소하고 싶을 만큼 화가 났던 날이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집어던지고 발로 밟고 내리쳐도 레코드판은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반으로 접어 체중을 실어 누르자 겨우 두 동강이 났을 따름이다.
11월 19일 서울 논현동의 한 복합문화공간에서 열린 제1회 서울레코드페어.
솔직히 고백하건대 필자는 음악애호가로서 MP3의 시대를 만끽하고 있다. 경박단소(輕薄短小)의 궁극이라 할 수 있는 컴퓨터 파일 형태가 아니었다면 미처 접하지 못했을 동서고금의 수많은 음악이 오늘도 필자를 황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레코드판이라는 매체에는 여전히 뭔가가 있다. 거기에는 노래뿐 아니라, 필자가 음악과 함께했던 기억 중에서 가장 보드라운 부분과 가장 매캐한 부분이 동시에 기록돼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필자가 당시 품에 안고 다녔고 또 박살내고 싶었던 것도 분명 그 안에 든 음악만은 아니었다. 그러니 아주 가끔이지만 음악이나 음악가가 아닌, 음반이 주인공이 되는 축제도 좋지 않은가.
누군가 말했듯, 형체를 지닌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언젠가는 없어질 플라스틱 속에 음악가와 애호가의 찬란한 한 순간이 담긴다는 바로 그 점이 역시 몸이라는 형체를 빌려 잠시 이 세상에 왔다 가는 우리 모두에게 한층 더 큰 호소력을 지니는지도 모르겠다. 제1회 행사를 성황리에 마무리한 서울레코드페어 담당자는 적어도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같은 종류의 자리를 만들겠단다. 관련 소식과 코멘트, 현장사진은 공식 홈페이지(www.recordfai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바비는 1995년 인디밴드 ‘언니네이발관’ 원년 멤버로 데뷔한 인디 뮤지션. ‘줄리아 하트’ ‘바비빌’ 등 밴드를 거쳐 2009년 ‘브로콜리 너마저’ 출신 계피와 함께 ‘가을방학’을 결성, 2010년 1집 ‘가을방학’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