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는 도시에서 기초적인 이동수단이자 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중요한 토대다. 하지만 서울에선 보행자가 인도 위의 방해물을 이리저리 피해 걸어야 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힐 신은 여성도 편하게 걸을 수 있어야
‘도시의 승리’ 저자인 에드워드 글레이저 하버드대 교수는 ‘스틸레토 힐’이야말로 도시의 상징이라 말한다. 스틸레토 힐은 굽이 아찔할 만큼 가늘고 높은 여성용 하이힐을 뜻한다. 도시는 이러한 비실용적인 구두를 신고도 걸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동차와 분리된 안전한 인도가 있어야 한다. 인도의 포장 상태도 실내의 대리석바닥만큼 틈새 없이 곱게 메워져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여성이 힐을 신고도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인도는 도시가 야만, 야생의 공간과 구분되는 문명의 공간임을 말해준다. 도시에서 걷기가 가장 중요한 이동수단이라면, 걷기 좋은 인도는 도시의 가장 중요한 인프라다.
걷기는 원초적인 이동수단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심지어 걷기는 정신 치유 효능까지 보인다. 특히 도시에서 걷기는 걷는 당사자가 길거리와 거리의 건축, 나아가 도시와 소통하는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걷기가 도시의 기초적인 이동수단이자 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중요한 토대임에도 서울에서 걷기는 수월치 않다. 먼저 기본적으로 도시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데 그 까닭이 있다. 600여 년 전 건설한 도시가 불과 한 세대 만에 팽창했는데 이때 자동차를 우선시한 정책을 편 것이다.
서울 도로의 총연장은 7400km 정도인데, 그중 34%에만 인도가 설치됐다. 나머지 3분의 2에는 인도가 없는 것이다. 인도가 없는 길을 걷는 것은 고행이다. 자동차와 뒤엉켜 걸어야 하는데, 이미 길 한편에는 자동차를 주차해놓았다. 그 사이를 비집고 걷다 보면 좁은 길을 운전하는 사람이나 걷는 사람이나 짜증 섞인 표정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경적을 울려대는 차를 노려보고 뒤를 돌아보며 걷는 동안 사회적 관계 맺기나 유쾌한 경험은 불가능하다.
대한민국 모든 도시의 모든 도로에 인도를 갖추려면 엄청난 예산이 필요하다. 이미 시가화가 진행된 도심에 넉넉한 인도를 설치하는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듯 어려운 가운데 만들어놓은 인도조차 우리는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자동차가 인도에 떡하니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2006년 ‘녹색교통운동’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 인도에는 100m당 평균 4대 이상의 자동차가 올라와 주차됐고, 이를 면적으로 따지면 서울시 인도의 23.7%에 이른다.
자전거도로 위에 정차된 택시는 자전거 전용도로라는 이름을 무색케 한다(왼쪽). 인도 위에 세워진 차는 보행자의 보행권을 침해한다.
이뿐이 아니다. 상점에서 내놓은 간판, 전신주, 지하철 구조물, 화단 같은 시설로 인해 인도 유효 폭이 상당히 좁아졌다. 이 좁은 인도에 오토바이가 내달리기 일쑤다. 문명국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야만적인 모습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람이 주인인 인도에서도 보행자가 방해물을 이리저리 피해 걸어야 하는 억울한 일이 발생한다. 건물-사람-자동차로 이어지는 도시적 배열과 질서가 무너지면 인도는 혼돈의 공간이 된다. 인도에 주차하는 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불법이다.
하지만 서울시를 비롯한 우리의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는 인도에 불법 주차한 자동차를 애써 외면한다. 지자체는 대개 ‘걷고 싶은 거리’ ‘둘레길’ 같은 것에 관심을 쏟았다. 힘 있고 세금 많이 내는 건물주나 자동차 주인과 골치 아픈 씨름을 하기보다, 경치가 수려한 곳에 산책로를 조성하고 이를 홍보하는 것이 아무래도 손쉬운 일일 것이다.
도시에서 걷기를 외면한 채 걷기에 적당한 길을 따로 만들어 걷는 일은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것과 같다. ‘걷기의 역사’ 저자 솔닛은 러닝머신과 도시의 거리를 대비해 현대도시, 특히 미국의 교외화(sub-uraban)한 도시를 비판했다. 생활 공간인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 대신 자동차를 몰고 헬스클럽으로 향하는 현대인들. 그들은 러닝머신에 올라타서 창문을 향해 돌진한다. 솔닛은 이를 두고 “자동차 중심의 현대도시가 만들어내는 아이러니”라고 지적했다.
끝없이 돌아가는 러닝머신의 컨베이어 벨트는 현대의 대량생산 문명을 상징한다. 러닝머신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오히려 남아도는 인체 운동을 소비하는 기계다. 날씨나 기온 변화 등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운동할 수 있으며, 계기판을 통해 정확한 주행거리를 확인하고 속도, 경사 등을 조절해 운동 강도를 조작할 수 있다. 기본적인 이동수단이 바퀴로 대치됐지만, 걷기가 단순한 이동 목적을 충족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 즉 ‘욕망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러나 솔닛의 지적처럼 러닝머신은 세상에서 물러나게 하는 장치다. 둘레길 같은 정책은 자동차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나가서 거대한 러닝머신 위를 걷는 것과 같다. 러닝머신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한 관심, 특히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바꾸려는 관심에서 물러나게 한다. 도시 경험이나 일체의 사회적 관계에서 물러나 혼자만의 운동에 집중하게 하는 셈이다.
서울의 군데군데 명소에 걸을 만한 길을 만든다는 정책의 선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책의 관심이 여기에 집중되는 동안 도시 길 대부분은 여전히 인도가 없거나, 있더라도 자동차가 점령한 상태였다. 인도조차 가능하면 빠르게 통과해야 하는 길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에서 도시적 교류와 소통은 불가능하다. 걷기를 도시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중요한 상호작용의 근본으로 보지 않고, 단지 레저 형태의 하나로 보는 시각이 이러한 오류를 가져온 것이다.
독일 문예비평가 벤야민은 “도시는 걷기라는 언어로만 해독 가능한 거대한 이야기책”이라고 말했다. 모든 거리가 스틸레토 힐을 신고 걸을 수 있을 만큼 쾌적하면서도 편안해질 때 서울이라는 이야기책에 풍부함을 더할 수 있고, 서울은 진정한 도시로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걷기 힘든 도시는 도시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