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조선시대 벼슬길에 나서는 선비. 청렴 고결했던 중국 후한의 양진은 태위 지위까지 올랐다.
그가 비록 지부(志部)를 완성하지는 못했으나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의 이 기전체 역사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더불어 중국의 ‘삼사(三史)’로 꼽힌다. 문장이 유려하고 설명이 적확하기로 유명해 후한의 역사서 중 제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는 열전에서 문원(文苑), 열녀(烈女), 술사(術士), 일민(逸民), 독행(獨行), 당고(黨錮), 환관(宦官)의 일곱 가지 새로운 전(傳)을 첨가해 독특함을 더했다. ‘후한서’ 권54의 ‘양진열전(楊震列傳)’을 펼치면 강직한 한 관료의 ‘4지(四知)’에 대한 아름다운 내용이 소개돼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후한 제6대 안제(安帝, 재위 107~124) 때의 관료 양진(楊震)은 자(字)가 백기(伯起)다. 관서(關西)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해 박학다재하고, 인격이 출중하며 청렴결백해 ‘관서의 공자(孔子)’라는 칭송을 받았다.
양진이 동래군(東萊郡) 태수로 임명됐을 무렵의 일이다. 그가 임지로 떠나던 중 날이 저물어 창읍(昌邑·현재 산동성 금향현)의 어느 객사에 머물게 됐다. 객사에서 혼자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창읍현 현령인 왕밀(王密)이 밤늦게 찾아왔다. 왕밀은 양진이 형주(荊州)에서 자사(刺史·감찰관)로 있을 때 알게 된 사이였다. 그때 그의 학식과 재능을 아껴 천거해준 바가 있었다. 즉 양진은 왕밀의 출세길을 열어준 은인인 셈이었다.
천거한 왕밀이 황금 내밀자 거듭 꾸짖어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지난날의 얘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왕밀이 슬며시 옷깃에서 황금 열 냥을 꺼내 공손하게 양진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왕밀은 그동안 양진의 보살핌에 대해 약소하지만 성의로 알고 거둬주기를 간청했으나 양진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러나 엄중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왕밀은 뇌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베풀어준 은혜에 대한 보잘것없는 보답이라 생각하고 거둬주기를 거듭 간청했으나 양진은 두 눈을 부릅뜨면서 “나는 옛날부터 자네를 알고 있고, 자네의 학식과 인물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기억하네. 자네는 내가 짐작했던 바대로 출세를 해 현령 벼슬에 올랐네. 앞으로도 직무에 충실하여 영전을 거듭할 것을 의심치 않네. 그러니 나에게 보은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조선후기 과거시험장 풍경. 조선의 막바지 세도정치기에는 소과 급제는 3만 냥, 대과 급제는 10만 냥을 뇌물로 바치는 등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조선시대 관찰사 10만 냥…교육계가 답습하나
조선의 막바지 세도정치기.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과거제도가 문란해 급제자가 양산됐고, 뇌물이 성행했으며, 연줄에 의한 급제가 빈번했다. 그리고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성행했는데 특히 곡창지역 전라도와 중국 물산이 유입되는 평안도에서 극심했다.
과거 가운데 소과(小科·생원과, 진사과) 급제에는 3만 냥, 대과(大科·문과) 급제에는 10만 냥을 뇌물로 바쳐야 했다. 돈으로 과거에 급제한 뒤 수령이 돼 임지에 부임하려면 또 돈이 필요했다. 특히 초사(初仕)라 하여 처음 수령이 돼 임지로 떠나는 자는 만 냥이었고, 관찰사나 유수(留守)는 10만 냥이나 내야 했다. 이렇게 공공연한 매관매직으로 수령이나 관찰사가 된 자는 그동안 들어간 본전을 뽑기 위해 백성들의 주머니를 착취할 수밖에 없었다. 수령 본인이 돈을 챙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소위 합부인(閤夫人)을 시켜 돈을 받았다. 합부인은 정실부인이 아닌 첩(妾)을 지칭하는데, 합(閤)은 양반집 대문에 들어서면 양쪽의 작은 문간방을 말한다. 따라서 대문의 문간방에 둔 첩이 곧 합부인이다. 관찰사나 수령들이 이처럼 합부인을 두고 뇌물을 챙기자, 때로는 암행어사가 파견돼 합부인들을 감옥에 가두기도 했으나 당파의 이해관계로 곧 석방되었다.
강화도령 이원범(李元範)이 철종으로 즉위했을 때의 일이다. 사실상 철종이 허수아비에 불과한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 안동김씨 수장 김좌근(金左根)에게도 합부인이 있었는데, 나주기생 출신이라 세상 사람들은 그를 나합(羅閤)이라 불렀다. 김좌근이 지방 수령의 임면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령이 되려 하는 자는 먼저 나합에게 뇌물을 바치고 그 뇌물 액수에 따라 발령이 났다.
나합이 젊은 미남자를 보면 수령 자리를 그냥 주고, 비단을 많이 바친 자를 경기도 양주 수령으로 임명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루는 김좌근이 집에 돌아와 나합에게 묻기를 “세상 사람들이 자네를 나합, 나합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했다. 그러자 나합이 “세상 사람들이 여자를 희롱하기를 합(蛤·대합조개)이라 하지 않사옵니까. 그래서 저를 나합이라 부르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최근 정치권의 권력형 부정부패를 비웃는 교육계의 각종 비리를 보면서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가 무너지는 위기감을 느낀다. 지난해 12월 한 여성 장학사의 ‘하이힐 폭행사건’에서 비롯된 교육계 비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교육계 인사들의 소환, 체포, 구속으로 대한민국 탐관오리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부패한 먹이사슬을 이룬 그들이 대한민국 미래를 책임지는 교육현장에 있다는 자체가 몸서리쳐진다. 비리가 터질 때마다 일과성으로 개혁을 부르짖는 정부의 안이한 태도도 이번 일을 계기로 바꿔야 한다. 근본적인 감시통제 시스템을 구축, 비리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연이어 터지는 교육 비리를 보면서 후한 후기 허약한 황제 밑에서 조정의 외척과 환관들이 짝지어 부패를 일삼을 때에도 ‘4지’를 주장한 양진이라는 관료의 아름다운 공직생활에 참으로 숙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