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평범’과 ‘비범’을 가르는 경계는 ‘응시’와 ‘실천’의 차이에 있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분량이나 권수에 집착해 많은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은 ‘자폐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한 권을 읽더라도 사색과 명상을 하고 집대성의 절차를 거쳐야 독서를 통한 자아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책이라도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에 읽은 느낌이 각각 다르다. 책은 독자가 성장하는 만큼 자신이 내포한 의미들을 더 드러내준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바다출판사 펴냄)가 그런 책이다. 처음 킹 목사의 저작을 접한 것은 대학시절이었다.
한창 민주화 투쟁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던 시절에 만난 ‘마틴 루터 킹’은 정치적 성공을 거둔 운 좋은 대중운동가였고, 2000년 뉴밀레니엄을 맞아 이 책으로 재회한 킹은 탁월한 ‘혁명가’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에 다시 현재의 판본으로 만난 그는 마지막까지 ‘사람’을 믿은 위대한 ‘사상가’였다.
마틴 루터 킹이 흑인 인권운동에 뛰어든 동기는 우연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영민한 신학자였고 흑인으로선 드물게 훌륭한 교육을 받은 이였다. 민권운동 역시 스스로 시작한 게 아니라 우연에 의해서였고, 엘리트라는 이유로 ‘대표’ 위치를 맡았다.
하지만 그는 인간적인 번민 속에서도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신학자로서의 의무나 지식인으로서의 책무, 혹은 둘 모두에서 나온 것이었을 터다.
그는 문제를 ‘응시’했고 ‘원인’을 간파했다. 그래서 가장 현명하고 강력한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실천에 옮겼다. 그 실천은 바로 ‘비폭력’이었다. 비폭력은 무저항과 다르다. 어쩌면 폭력보다 더 강력한 수단일 수 있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당한 법은 수와 힘의 측면에서 다수(기득권)에 속하는 그룹이 소수(약자)에게 준수를 강요하면서도 자신들은 전혀 구속받지 않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정당한 법은 다수 그룹이 자발적으로 준수하면서 소수 그룹에 준수를 강요하는 법입니다. …표면상으로 정당하지만 실제 적용에서 부당한 법도 있습니다. 저는 허가받지 않은 행진에 참석합니다.
하지만 이 법령이 흑백 차별을 유지하고 수정 조항 제1조의 평화적인 집회와 항의를 할 권리를 제한하는 데 이용된다면, 그것은 부당한 법이 됩니다. 부디 여러분이 제가 지적하는 정당한 법률과 부당한 법률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법률을 무시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는 무정부 상태가 될 것입니다.
부당한 법률을 위반하는 사람은 솔직하고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하며, 어떤 형벌도 달갑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양심적으로 볼 때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법을 위반하되, 지역사회의 양심에 그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서는 처벌도 감수하는 사람이야말로 법률을 지극히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이 연설은 킹의 노선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노선은 ‘무저항’이 아니라 ‘굴복하지 않는 저항정신’임을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저항은 ‘부당한 폭력에 맞서는 또 다른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을 굴복시키는 위대한 도덕적 선의’를 기반으로 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예수의 사랑과 간디의 비폭력 운동을 결합한 저항정신을 발휘한 것이다.
그의 노선은 결국 승리를 거뒀지만, 그는 폭력에 의해 쓰러졌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멤피스에서의 총성을 끝으로 그의 신념에 찬 연설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죽음은 그를 억압하던 자들이 그토록 지키려 한 ‘부당한 구조’들을 와해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의 죽음에 드리운 대중의 슬픔은 도도한 강이 되어 흘렀다.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물길이었다. 그들은 킹의 가슴에 총을 쏘는 것으로 그들이 지키려 한 부당한 질서를 저격한 것이며, 킹은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죽음으로써 영원한 승리를 거뒀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과 노예 주인의 후손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식탁에 나란히 앉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사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워싱턴 DC 집회 연설 중에서)
http://blog.naver.com/donodonsu
한 권을 읽더라도 사색과 명상을 하고 집대성의 절차를 거쳐야 독서를 통한 자아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책이라도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에 읽은 느낌이 각각 다르다. 책은 독자가 성장하는 만큼 자신이 내포한 의미들을 더 드러내준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바다출판사 펴냄)가 그런 책이다. 처음 킹 목사의 저작을 접한 것은 대학시절이었다.
한창 민주화 투쟁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던 시절에 만난 ‘마틴 루터 킹’은 정치적 성공을 거둔 운 좋은 대중운동가였고, 2000년 뉴밀레니엄을 맞아 이 책으로 재회한 킹은 탁월한 ‘혁명가’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에 다시 현재의 판본으로 만난 그는 마지막까지 ‘사람’을 믿은 위대한 ‘사상가’였다.
마틴 루터 킹이 흑인 인권운동에 뛰어든 동기는 우연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영민한 신학자였고 흑인으로선 드물게 훌륭한 교육을 받은 이였다. 민권운동 역시 스스로 시작한 게 아니라 우연에 의해서였고, 엘리트라는 이유로 ‘대표’ 위치를 맡았다.
하지만 그는 인간적인 번민 속에서도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신학자로서의 의무나 지식인으로서의 책무, 혹은 둘 모두에서 나온 것이었을 터다.
그는 문제를 ‘응시’했고 ‘원인’을 간파했다. 그래서 가장 현명하고 강력한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실천에 옮겼다. 그 실천은 바로 ‘비폭력’이었다. 비폭력은 무저항과 다르다. 어쩌면 폭력보다 더 강력한 수단일 수 있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당한 법은 수와 힘의 측면에서 다수(기득권)에 속하는 그룹이 소수(약자)에게 준수를 강요하면서도 자신들은 전혀 구속받지 않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정당한 법은 다수 그룹이 자발적으로 준수하면서 소수 그룹에 준수를 강요하는 법입니다. …표면상으로 정당하지만 실제 적용에서 부당한 법도 있습니다. 저는 허가받지 않은 행진에 참석합니다.
하지만 이 법령이 흑백 차별을 유지하고 수정 조항 제1조의 평화적인 집회와 항의를 할 권리를 제한하는 데 이용된다면, 그것은 부당한 법이 됩니다. 부디 여러분이 제가 지적하는 정당한 법률과 부당한 법률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법률을 무시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는 무정부 상태가 될 것입니다.
부당한 법률을 위반하는 사람은 솔직하고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하며, 어떤 형벌도 달갑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양심적으로 볼 때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법을 위반하되, 지역사회의 양심에 그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서는 처벌도 감수하는 사람이야말로 법률을 지극히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이 연설은 킹의 노선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노선은 ‘무저항’이 아니라 ‘굴복하지 않는 저항정신’임을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저항은 ‘부당한 폭력에 맞서는 또 다른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을 굴복시키는 위대한 도덕적 선의’를 기반으로 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예수의 사랑과 간디의 비폭력 운동을 결합한 저항정신을 발휘한 것이다.
그의 노선은 결국 승리를 거뒀지만, 그는 폭력에 의해 쓰러졌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멤피스에서의 총성을 끝으로 그의 신념에 찬 연설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죽음은 그를 억압하던 자들이 그토록 지키려 한 ‘부당한 구조’들을 와해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의 죽음에 드리운 대중의 슬픔은 도도한 강이 되어 흘렀다.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물길이었다. 그들은 킹의 가슴에 총을 쏘는 것으로 그들이 지키려 한 부당한 질서를 저격한 것이며, 킹은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죽음으로써 영원한 승리를 거뒀다.
<B>박경철</B><BR> 의사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사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워싱턴 DC 집회 연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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