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나는 아직 살아 있었지.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았네. 나는 지금 내 심장을 가르고, 그 피를 자네의 얼굴에 끼얹으려고 하는 것이네. 내 심장의 고동이 멈췄을 때 자네의 가슴에 새로운 생명이 깃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네.”
일본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만년작 ‘마음’(이레 펴냄)의 한 구절이다. ‘마음’은 근대화가 이뤄지던 무렵 일본 지식인의 고뇌와 한계를 그린 책이다. 굳이 책의 주제를 말하자면 ‘존재’ 혹은 ‘소외’ 정도로 파악할 수 있으나 이건 너무 상투적이다. 한국문학에서 이에 병치할 수 있는 작품을 고르기는 어렵지만, 작가로 치면 춘원 이광수가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춘원의 친일 행적 등은 무시할 경우의 이야기다.
이 책은 이른바 ‘지식인’이 주인공이고 당대 지식인의 ‘고뇌’를 정면으로 다루지만, 계몽적인 성격은 전혀 띠고 있지 않다. 오히려 형식은 소설이나 담담하게 풀어낸 일종의 철학적 사색에 가깝다. 작품의 모티프는 상당 부분 작가의 ‘트라우마’, 즉 자신의 삶에서 왔다. 오래된 투병, 혹독한 가난과 양자 입적, 투병과 교직 경험 등 자전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곳곳에 회고의 냄새가 배어 있다.
내용은 밋밋하다 못해 허무하기까지 하다. 갓 지어 김은 모락모락 나지만 간장 종지, 김치 조각 하나 없이 밥상에 올려진 쌀밥 같은 느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기 전에 ‘마음’을 접한 독자라면, ‘상실의 시대’에서 소세키의 흔적을 진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야말로 있을 법한 감정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실의 시대’가 셋의 이야기라면 이 책은 둘의 이야기다. 시종일관 둘이다. 소설 구조적으로 셋 사이에는 많은 이야기와 말이 필요하지만, 둘이라면 다르다.
바라만 봐도 느껴진다. 나와 아버지가 그렇고, 나와 선생님이 그렇고, 선생님과 친구가 그렇다. 쉽지 않지만 소세키는 문장에 ‘말’ 대신 ‘마음’을 담아냈다. 그래서 오히려 심심하다. 독자들 사이에서 이 느낌에 대한 평은 상당히 엇갈린다. ‘육조단경’을 글로 읽는 자와 마음으로 느끼는 자의 차이쯤 될지도 모른다.
앞서 말한 대로 스토리는 단순하다. 시골에서 상경해 대학을 다니는 ‘지성인’과, 사회와 담을 쌓고 은둔형 삶을 살아가는 염세적 ‘지식인’의 교류 이야기다. 주인공 ‘나’가 우연히 만난 ‘선생님’은 주류가 아니다. 외톨이다. 하지만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으려는 주인공의 처지는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 아직은 지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남아 있던 시절의 이야기, 즉 시대상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당한 거리에서 마주한다. 짐짓 무심하게 우정을 쌓아가는 방식도 그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선에 매달린 특별한 마음을 굳이 감추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쿨’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선생님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존재, 삶, 근원은 무엇이냐고. 그러나 그는 답을 거부한다. 실존은 고통을 직시하고 정면으로 부닥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생 동안 당면한 고통을 외면하고 회피했다. 실존적 삶이 아닐 때 지식인의 삶은 욕망만을 따라가는 부초와 같다. 하지만 부초로 살아가려는 욕망마저 없을 때는 존재의 이유가 사라진다. 지식인의 존재는 분명한 삶의 이유와 그에 따른 합당한 태도가 전제돼야 한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존재의 이유를 납득시킬 필요는 없지만, 욕망하지 않는 지식인의 처지에서 보면 그 경우 삶의 끈을 애써 손에 쥐고 갈 필요 또한 없다.
그들에게 삶은 곧 허무이고 ‘다다’이다. 글에서 쉬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가 회피한 고통을 ‘나’가 정면으로 직시하며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하지만 발걸음은 조용하고 차분하다. 어디에도 압박의 느낌은 없다. 덕분에 둑이 터진다. 격렬하지만 차분한 방식으로 ‘선생님’은 삶을 마감한다.
그의 자살은 실패가 아닌 ‘원점회귀’다. 그는 우정과 사랑이라는 진부한 주제로 갈등을 이어왔다. 삼촌이 아버지의 막대한 부를 편취한 것은 분노의 원천이 아니다. 그가 무너진 지점은 ‘믿음’이다. 사랑을 앞세워 우정을 등진 그의 선택은 재물에 멀어 자신을 등진 삼촌의 선택과 다르지 않으며, 무너진 지점 또한 같다. 만약 친구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의 죄책감은 그의 일생을 지배할 성질의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친구의 자살은 그에게 갚을 길이 없는 깊은 죄책감을 안겨줬다. 소위 지식인의 트라우마, 즉 일생 동안 고민하고 자학하고 은둔할 화두가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실존을 거부하고 가상의 세상을 살았던 것이다. 결국 본능으로서는 아직 죽고 싶지 않지만, ‘실존적’으로는 이미 사망 상태였던 그는 ‘나’에게 남긴 유서를 통해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았네. 내 심장의 고동이 멈췄을 때 자네의 가슴에 새로운 생명이 깃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네”라고 말하며, 기나긴 ‘외면과 회피’의 여정에 종지부를 찍는다. 사족을 달자면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에 꼽힌 책이다. 그만큼 ‘수작’이며 시대를 넘어 시대를 말하는 책이다.
http://blog.naver.com/donodonsu
일본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만년작 ‘마음’(이레 펴냄)의 한 구절이다. ‘마음’은 근대화가 이뤄지던 무렵 일본 지식인의 고뇌와 한계를 그린 책이다. 굳이 책의 주제를 말하자면 ‘존재’ 혹은 ‘소외’ 정도로 파악할 수 있으나 이건 너무 상투적이다. 한국문학에서 이에 병치할 수 있는 작품을 고르기는 어렵지만, 작가로 치면 춘원 이광수가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춘원의 친일 행적 등은 무시할 경우의 이야기다.
이 책은 이른바 ‘지식인’이 주인공이고 당대 지식인의 ‘고뇌’를 정면으로 다루지만, 계몽적인 성격은 전혀 띠고 있지 않다. 오히려 형식은 소설이나 담담하게 풀어낸 일종의 철학적 사색에 가깝다. 작품의 모티프는 상당 부분 작가의 ‘트라우마’, 즉 자신의 삶에서 왔다. 오래된 투병, 혹독한 가난과 양자 입적, 투병과 교직 경험 등 자전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곳곳에 회고의 냄새가 배어 있다.
내용은 밋밋하다 못해 허무하기까지 하다. 갓 지어 김은 모락모락 나지만 간장 종지, 김치 조각 하나 없이 밥상에 올려진 쌀밥 같은 느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기 전에 ‘마음’을 접한 독자라면, ‘상실의 시대’에서 소세키의 흔적을 진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야말로 있을 법한 감정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실의 시대’가 셋의 이야기라면 이 책은 둘의 이야기다. 시종일관 둘이다. 소설 구조적으로 셋 사이에는 많은 이야기와 말이 필요하지만, 둘이라면 다르다.
바라만 봐도 느껴진다. 나와 아버지가 그렇고, 나와 선생님이 그렇고, 선생님과 친구가 그렇다. 쉽지 않지만 소세키는 문장에 ‘말’ 대신 ‘마음’을 담아냈다. 그래서 오히려 심심하다. 독자들 사이에서 이 느낌에 대한 평은 상당히 엇갈린다. ‘육조단경’을 글로 읽는 자와 마음으로 느끼는 자의 차이쯤 될지도 모른다.
앞서 말한 대로 스토리는 단순하다. 시골에서 상경해 대학을 다니는 ‘지성인’과, 사회와 담을 쌓고 은둔형 삶을 살아가는 염세적 ‘지식인’의 교류 이야기다. 주인공 ‘나’가 우연히 만난 ‘선생님’은 주류가 아니다. 외톨이다. 하지만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으려는 주인공의 처지는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 아직은 지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남아 있던 시절의 이야기, 즉 시대상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당한 거리에서 마주한다. 짐짓 무심하게 우정을 쌓아가는 방식도 그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선에 매달린 특별한 마음을 굳이 감추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쿨’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선생님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존재, 삶, 근원은 무엇이냐고. 그러나 그는 답을 거부한다. 실존은 고통을 직시하고 정면으로 부닥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생 동안 당면한 고통을 외면하고 회피했다. 실존적 삶이 아닐 때 지식인의 삶은 욕망만을 따라가는 부초와 같다. 하지만 부초로 살아가려는 욕망마저 없을 때는 존재의 이유가 사라진다. 지식인의 존재는 분명한 삶의 이유와 그에 따른 합당한 태도가 전제돼야 한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존재의 이유를 납득시킬 필요는 없지만, 욕망하지 않는 지식인의 처지에서 보면 그 경우 삶의 끈을 애써 손에 쥐고 갈 필요 또한 없다.
그들에게 삶은 곧 허무이고 ‘다다’이다. 글에서 쉬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가 회피한 고통을 ‘나’가 정면으로 직시하며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하지만 발걸음은 조용하고 차분하다. 어디에도 압박의 느낌은 없다. 덕분에 둑이 터진다. 격렬하지만 차분한 방식으로 ‘선생님’은 삶을 마감한다.
그의 자살은 실패가 아닌 ‘원점회귀’다. 그는 우정과 사랑이라는 진부한 주제로 갈등을 이어왔다. 삼촌이 아버지의 막대한 부를 편취한 것은 분노의 원천이 아니다. 그가 무너진 지점은 ‘믿음’이다. 사랑을 앞세워 우정을 등진 그의 선택은 재물에 멀어 자신을 등진 삼촌의 선택과 다르지 않으며, 무너진 지점 또한 같다. 만약 친구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의 죄책감은 그의 일생을 지배할 성질의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친구의 자살은 그에게 갚을 길이 없는 깊은 죄책감을 안겨줬다. 소위 지식인의 트라우마, 즉 일생 동안 고민하고 자학하고 은둔할 화두가 생겨난 것이다.
<b>박경철</b><br>의사
http://blog.naver.com/donodon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