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우 감독의 ‘모던 보이’는 개인 대 사회의 커다란 틀에서 한 청년의 성장담 혹은 서로를 속이고 속는 연애담, 깊은 거짓말의 목구멍에 기댄 배신담을 선택한다.
그런데 이 개인의 시대에 정지우 감독의 ‘모던 보이’는 개인 대 사회의 커다란 틀에서 한 청년의 성장담 혹은 서로를 속이고 속는 연애담, 깊은 거짓말의 목구멍에 기댄 배신담을 선택한다. 솔직히 이런 주제는 1980년대식이 아닌가. 이즈음에서 당신의 의견을 묻고 싶다. 철저히 ‘나’만을 생각하는 ‘모던 보이’와 ‘우리와 조국’을 선택하는 ‘올드 걸’의 연애담은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영화의 원작은 2000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한 작가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시대를 등에 업은 사극이지만, 사극과는 상관없이 감독은 사회적 그물망을 비집고 나타나는 사랑과 욕망의 모양새에 온통 마음이 물려 있다. 조난실은 일본인 여가수를 대신해 무대 뒤에서 일종의 그림자 가수, 즉 립싱크를 하는가 하면 해명은 조난실을 얻고 싶어서 총독부 서기관 대신 일제 검사를 사칭한다. 그 둘은 가면으로 만나 대면으로 연애하고 후면으로 사랑의 감정을 밀통한다. 모두 다 부박한 시대의 벽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정지우 감독의 작품은 항상 그랬다. 아이를 수면제로 잠재우고라도 만나고 싶은 ‘해피엔드’의 불륜, ‘사랑니’에서 연상의 여선생과 남자 제자의 은밀한 시간과 기억을 뛰어넘는 첫사랑, 그리고 ‘모던 보이’의 대아를 택하려 소아를 버린 사랑까지. 정지우 감독의 주제는 사실 여전히 ‘사랑의 문제’이고 여기서 시대와 사회는 커다란 ‘장벽’이다.
난실은 그러니까, 자칭 낭만의 화신이라 불리는 이 청년에게 도시락 폭탄, 아니 ‘러브 벤또’를 날린 셈이다. 윤봉길 의사도 울고 갈 이 대담한 배신의 퍼포먼스에도 해명은 끝끝내 난실을 버리지 못한다. 대체 왜 그런 것일까? 해답은 멜로적 관성 속에 담긴 사랑의 진정성이나 누아르적 관성에 실린 미스터리한 여인의 매혹에서 찾아야 함에도 ‘모던 보이’에서 이 해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유는 ‘모던 보이’가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 난실은 로라니 나타샤니 이름도 여러 개, 남자도 여러 명인 팜므 파탈의 원형으로 감지된다. 그런데 종국에는 ‘살고 싶다’를 읊조리는 착한 여인의 너울이나 사랑에 빠진 여인의 클리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해명 역시 소년에서 청년으로의 성장 혹은 뺀질뺀질한 양아치에서 마침내 생애를 걸고 한 여인을 사랑하는 남성이자 애국지사로 환골탈태하지만, 그의 변신에 쉽게 동화될 관객은 많지 않아 보인다.
1930년대 신세대 문화 암울함과 경쾌함 줄타기

영화 속의 경성은 퇴폐적이고 탐미적이며, 어쩔 수 없는 식민지의 허무감에 허우적대는 불나비 같은 도시다. 정지우 감독이 공들여 재현한 경성은 숭례문과 서울역, 남산 음악당과 총독부가 갈색과 주황과 빨강으로 뒤엉켜 사실적이면서도 화려하게 사라지는 한 시대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경성은 공습 중에도 빛이 새들어오는 커튼 뒤에서 두 연인이 멋들어지게 춤을 출 수 있는 낭만과 음습한 퇴폐의 도시라는 ‘분위기’만이 느껴질 뿐이다.
물론 곰곰이 살펴보면 텍스트 내 장치는 즐비하다. 왜 김혜수는 시종일관 남자의 와이셔츠 따위를 입은 양성적 매력을 풍길까. 왜 이 영화에서는 ‘옷을 산다, 옷을 입는다, 옷을 만든다’ 등이 중요한 의미를 지닐까. 왜 해명은 첫 장면부터 옛 경성 지도에 금을 긋고, 그와 조난실이 만났던 지도 위의 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거대한 난파선 모양이 될까. 그러나 이런 섬세한 디테일들은 결정적으로 인간과 시대에 천착해야 하는 감독의 내공이나 핸드헬드로 사극을 찍고 싶다는 연출의 묘미가 흔들거리면서 그저 디테일로 남아버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