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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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삶의 지혜가 곧 웰빙 지침서”

양명술·궁중의술연구가 이원섭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4-03-25 14: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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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 삶의 지혜가 곧 웰빙 지침서”

    양명술 연구가에서 파티문화 전도사로 변신한 이원섭씨.

    3월23일 대단원의 막을 내린 MBC 드라마 ‘대장금’에는 왕실의 희귀한 양명술(養命術)이 많이 나왔다. 신비한 명약인 납약을 만드는 데 쓰였던 납설수 채취법, 강장 목적으로 꿀에 개서 먹는 개미알 구하는 법, 유황오리 구하는 법, 심지어 궁녀들의 월광 목욕법까지 등장한다. 조선 왕실에서 왕의 ‘웰빙(Well-being)’을 위해 사용했던 양명술과 관련된 이런 내용들은 궁중의술연구가 이원섭씨(71)가 제공한 것이다.

    이씨는 조선조 내시들 사이에서 은밀히 전해 내려온 이런 양명술을 환관 출신인 종조부 낭청 이재우에게서 배웠다. 이재우는 고종 때의 마지막 내시로 왕의 위생을 담당했으며, 일제 침략 이후 내시를 그만두고 전국을 떠돌며 지리를 익히고 고산식물·광물 채취 등에 매진한 박물학자이기도 했다.

    양명술이란 말은 고대의서인 ‘신농본초경’에서 365종의 약물을 상·중·하로 나눠 그중 상약을 목숨(命)을 기르는(養) 선약이라 일컬었던 데서 유래한다. 단순히 병을 고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비법을 넘어 안락한 웃음, 숨고르기(調息), 마음 수양, 덕 쌓기 등을 통해 자연의 섭리를 터득하면 장생·장수는 자연히 얻어진다는 생명철학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조상 전래의 먹을거리와 식습관, 왕비의 태교, 왕자와 공주를 위한 영재교육, 궁녀들의 미용법과 약물 목욕법, 성인병 치유책 등 요즘 ‘웰빙’ 문화에서 추구하는 것이 대부분 들어 있다. 이씨는 이런 내용을 담은 ‘왕실 양명술’(도서출판 초롱 펴냄)을 1992년 세상에 처음 공개했으니 10여년 앞서 웰빙 문화의 도래를 예견한 듯하다.

    “요즘 웰빙에 대한 과잉 열풍을 보노라면 오래된 지혜가 가장 첨단이 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돼요.”



    대장금에 ‘왕실 양명술’ 내용 제공

    그가 양명술을 만난 건 6·25전쟁 직후인 20대 초. 서울고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그가 당시 인천에 살고 있던 종조부를 찾아가 공부방 하나를 내달라고 부탁한 게 인연이 됐다. 거기서 그는 종조부와 조선 역성혁명의 권력 이동 등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다 종조부의 마음에 들게 됐고, 3년 동안 내시내훈(內侍內訓)과 양명술의 뼈대, 그리고 유훈으로 남긴 ‘대동회춘지도’ 등을 구전받았다.

    “엄청난 충격이었지요. 금시초문의 기이한 내용에 사로잡힌 저는 마침내 고시공부를 포기하고, 일종의 박물학인 양명술 연구에 몰두하게 됐습니다.”

    그는 생식, 호흡법, 묵상법 등 엄격한 훈련을 받으며 종조부한테서 전해 들은 얘기들을 원고지에 옮겨 적었다. ‘여시아문(如是我聞·내가 이와 같이 들었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적은 불경 첫머리에 등장한다)식’ 전수를 통해 그가 정리한 원고가 ‘왕실 양명술’이다.

    “할아버지에게서 구전받은 비법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줄거리에 열매를 만들고자 하니 담배연기를 모아 저울에 달아 뭉치기와 같은 작업이었지요. 광물과 한약재, 마늘 등 쉽게 접하는 먹을거리의 성분과 효능 연구에서부터 동의보감, 향약집성방, 산림경제, 지봉유설 등 조상들의 전통의서와 백과사전류 서적을 일일이 탐독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미군병원 군무원, 직물포 주인 등 여러 직업을 거쳤지만 양명술은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남달리 호기심이 많아 역사 철학 문화 과학 등 다양한 세계의 책들에 빠져 사업은 뒷전이기 일쑤였다. 이화여대 앞에서 책장사를 하며 종조부에게서 배운 인간관찰법을 실습하기도 했다. 아내한테서 “도깨비 쓸개 같은 책들, 그게 무슨 밥이 되냐”는 핀잔을 들어도 그의 지식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조상 삶의 지혜가 곧 웰빙 지침서”

    할아버지 회갑연에서, 양명술을 전해준 종조부 낭청 이재우(둘째 줄 왼쪽 안경 낀 노인)와 어릴 적 이원섭씨(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죠.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마음은 급하고, 무언가 실현하려 해도 그것을 받쳐줄 돈이 없었습니다. 고민을 거듭하다 무릎을 쳤지요. 이렇게 안달하며 살 게 아니라 차라리 낙천적으로 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쌓아올린 지식을 밑천 삼아 제 좋아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뛰어들었습니다.”

    이씨의 이력을 보면 그의 호기심이 얼마나 넓은지 짐작이 된다.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 예비고사 합격, 증산사상연구회 학술연구위원, 한국신토불이회 부회장, 전 미국대통령학연구센터 환경 및 교육 부문 제안회원, 일본 웃음공화국 국제친선대사, 한국우주소년단 창단실무위원, 한국양명회 초대회장을 거쳐 지금은 서양식 파티(party) 전문회사 새로물산 사외이사와 한국청소년보호육성회 부총재로 있다.

    “늙은이가 웬 파티 문화냐고 하겠지요. 서양에서나 익숙하지, 우리에겐 아직 낯선 문화지요. 그런데 요즘엔 파티에 대한 관심들이 많이 커졌습니다. 파티 동호회도 있고, 고유의 돌잔치도 서양식 파티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파티는 아이들에게는 마법의 세계로 안내하는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합니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파티문화를 확산하는 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바른 의식주 회복 왕성한 활동

    최근 그는 유관순 열사의 생일인 3월15일을 전 국민이 즐길 수 있는 축제일로 만들려고도 했다. 발렌타인데이나 할로윈데이 같은 국적불명의 파티 문화가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는 그는 우리의 정체성을 위해 우리식 축제를 가꿔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는 1993년 토종을 살려보겠다는 뜻을 가진 전국의 농부 시인 한의사 학자 등과 함께 한국양명회를 만들었다. 양명회의 취지는 바른 음식·의복·주택 문화를 회복하겠다는 것. 회원은 토종 다마금쌀을 보급해온 박문기씨, 정농회의 강대인씨, 안학수 전 고려대 교수, 손대현 한양대 관광대학원장, 정우일 시인 등 수백명에 이른다.

    요즘 그는 원주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우리 잡곡 살리기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우리 밀 살리기 운동’과 같이 토종종자를 지키려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이 운동은 잡곡이 곧 약이 되는 약곡(藥穀)임을 강조하며 건강 자연식으로 가득했던 선조들의 옛 밥상을 되찾자는 취지로 지작됐다.

    오후 8시쯤 잠자리에 들어 오전 2시에 일어나는 ‘새벽형 인간’인 이씨는 새벽 6시까지의 시간을 혼자서 온갖 궁금증을 해소하는 시간으로 삼고 있다. 전 세계의 잡학사전들이 그의 서재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맘껏 공부하고, 각지에 흩어져 무농약 농사를 짓고 있는 양명회 회원들에게서 된장이며 고추장이며 공짜로 받아먹고 살고 있으니 남부러울 게 없지요.”

    자신의 홈페이지(tao-healing.com)에 건강 칼럼을 연재하는 시간도 이때다. 엉뚱하게도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바람의 아들’이라는 SF소설을 172회째 연재하고 있고, 조만간 임진왜란 때의 한 시녀를 소재로 한 소설도 연재할 계획이다. 지금도 마음은 태양계 밖 안드로메다 어딘가를 주유한다는 이 ‘열혈노인’은 “지나간 것은 후회할 것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다”며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고, 그것들이 어떻게 될지 궁금할 뿐이다”고 말했다. 경기 군포시의 작은 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그는 이제까지 그가 낸 책 7권을 한데 묶어 ‘대왕실 양명술’이라는 전자책을 조만간 내놓을 계획이다.

    “진짜 웰빙을 원한다면 두 권의 책을 읽을 것을 권합니다. 영조 때 학자 유중림이 엮은 ‘증보산림경제’와 순조 때 나온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입니다. 앞엣것은 섭생 구황 가정생활 농사 구급 같은 정보들의 보고이고, 뒤엣것에는 장담그기·술빚기 같은 요리, 태교 구급처방 등 살림의 지혜가 가득합니다. 아무리 선진 의학이 발전해도 병원마다 성인병 환자들이 가득한 시대 아닙니까. 해묵은 것에서 지혜를 캐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웰빙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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