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 주인공 장그래.
인터넷 전문 기업 네이버의 웹툰 서비스를 총괄하는 김준구 네이버 웹툰&웹소설 사업부문 셀장이 한 말이다. 그는 11월 19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웹툰포럼’에서 “올해는 네이버 웹툰이 세계 진출을 시작한 원년”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네이버만이 아니다. 이것은 지난 10년간 한국 웹툰이 걸어온 길이고, 올해는 한국 웹툰이 세계무대에 본격 진출한 첫해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한국 웹툰의 효시로 2004년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완결한 ‘순정만화’(강풀 작가)를 꼽는다. 연재 당시 조회 수 6000만 회 돌파 기록을 세우며 화제를 뿌린 이 작품 이후 수많은 웹툰이 탄생했고, 그들 중 상당수가 이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만화스토리산업팀 이대군 주임은 “요즘 ‘케이팝(K-pop), 케이드라마(K-drama)에 이은 한류의 세 번째 주자는 웹툰’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며 “올해 주요 웹툰 사업자들이 해외 진출에 성공해 웹툰 산업의 미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주요 웹툰 사업자들 해외서 성공
첫 테이프는 다음카카오(다음)가 끊었다. 다음은 북미권 웹툰 포털 타파스미디어와 제휴해 5월부터 포털사이트 다음의 ‘만화 속 세상’에 연재한 웹툰 일부를 해외 시장에 선보이고 있다. 7월에는 네이버가 자사 메신저 ‘라인’ 플랫폼을 통해 영어권(49편)과 중화권(58편)에 웹툰 서비스를 시작했고, 유료 웹툰 플랫폼 레진코믹스도 10월부터 콘텐츠를 중국 큐큐닷컴과 유요치에 공급 중이다.
웹툰은 인터넷통신망을 의미하는 ‘웹(web)’과 만화 ‘카툰(cartoon)’의 합성어. 글자 그대로 인터넷을 통해 유통되는 만화를 뜻한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박석환 한국영상대 만화창작과 교수는 “웹툰은 만화이긴 하지만 기존 출판만화와 제작, 유통, 소비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장르”라고 설명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 ‘새로운 장르’의 발아, 성장, 진화에 ‘한국적 토양’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는 점이다(상자기사 참조). 그래서 웹툰이라는 단어에는 지역색이 없지만, 세계인은 웹툰을 한국 대중음악을 뜻하는 ‘케이팝’이나 한국 드라마를 지칭하는 ‘케이드라마’ 못지않게 한국적 콘텐츠로 인식한다.
그림보다 이야기의 새로움
고영훈 작가의 웹툰 ‘어벤져스 : 일렉트릭 레인’1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화이트 폭스(왼쪽). 11월 19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웹툰포럼’에 참석한 C.B. 셰블스키 마블 콘텐츠 개발담당 수석부사장.
작품 배경은 끊임없이 비가 내리는 2014년 서울이다. 이상기후 속에서 악당이 창궐하자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전사 화이트 폭스(구미호에서 착안한 극중 캐릭터 이름)가 헐크,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등 영웅들을 서울로 불러 모은다. 이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세계웹툰포럼장에서 만난 C. B. 셰블스키 마블 콘텐츠 개발담당 수석부사장은 웹툰 ‘어벤져스’에 만족감을 표시하며 “이 작품을 미국에서도 출시할 예정이다. 그때 화이트 폭스 캐릭터도 (‘마블 히어로’의 일원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머지않아 우리 작가가 창작한 캐릭터가 ‘마블’의 날개를 달고 세계를 향하게 된 셈이다.
한국 웹툰이 이처럼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게 된 비결에 대해 한창완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는 ‘서사적인 완결성’을 꼽는다. 그는 “2000년대 웹툰 문화가 번성하면서 우리나라의 ‘만화가’는 ‘스토리텔러’가 됐다. 그전에는 만화가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 작화능력이었지만, 웹툰이 인기를 끌면서 그림의 완성도보다 이야기의 새로움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자산이 됐다는 주장이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웹툰을 시작한 나라로서 앞선 기술력을 확보한 점도 한국 웹툰이 세계에서 각광받는 또 다른 이유로 꼽힌다. 한 교수는 “우리나라의 웹툰 유통 플랫폼인 포털사이트들은 실시간 조회 수, 클릭 수, 댓글 수 등으로 인기 만화 순위를 매겨 작가들의 경쟁을 유도했다. 이 과정에서 호러 만화 작가들은 플래시 효과를 극대화해 참신한 긴장을 유발했고, SF만화 작가들은 속도감과 리얼리티를 기술적으로 구현했다”고 소개했다.
특히 2012년 호랑 작가가 네이버에 발표한 ‘옥수역 귀신’의 경우 스크롤을 내리면 갑작스럽게 화면에서 손이 튀어나오는 3D 효과를 구현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해외누리꾼 사이에서 이 작품을 친구에게 보여준 뒤 깜짝 놀라는 장면을 촬영해 인터넷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 올리는 놀이가 유행했을 정도다. 김준구 셀장은 “이 웹툰이 화제가 됐을 무렵 미국 사용자가 하루에 100만 명씩 네이버 웹툰 서비스에 접속하곤 했다”고 밝혔다.
웹에 최적화된 콘텐츠
11월 19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웹툰포럼’에서 강연 중인 김준구 네이버 웹툰&웹소설 사업부문 셀장.
4월 영국에서 열린 런던도서전에서도 웹툰이 한국 문학작품보다 더 큰 화제를 모았다. 해외의 디지털 만화시장이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음에도 한국 웹툰처럼 웹에 최적화된 콘텐츠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여전히 만화시장의 96%는 출판 만화가 차지하고 있다.
눈여겨볼 점은 이런 상황에서 한국 웹툰은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책을 넘어 PC의 세계’에 안착했던 웹툰은 모바일 기기의 발전과 더불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다양한 특수효과를 구현하는 ‘앱툰’으로 변화했다. 2011년 스마트폰 이용자 수가 10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모바일 기기를 받아들인 한국 소비자들이 이러한 웹툰의 진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010년 네이버가 관련 앱을 개발했고, 다음 역시 ‘다음 앱툰’을 내놓았다. 유료 웹툰 시장의 강자인 레진코믹스도 지난해 6월 안드로이드 앱을 출시해 스마트폰 터치 기능 등을 활용한 웹툰을 선보이고 있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주요 웹툰 사업자가 모두 ‘스마트툰’ 시장에 진입한 상태다(상자기사 참조).
또 다른 한류 기적 부푼 기대
지난해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설치된 한국 웹툰 부스에서 웹툰작가 박용제 씨와 시우 씨(앞쪽)가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모습.
이미 이러한 산업 모델은 한국에서 만개하고 있다. HUN 작가가 2010~2011년 다음 ‘만화속세상’에 연재한 웹툰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원작으로 한 동명 영화가 지난해 관객 700만 명을 동원하는 흥행 대박을 기록했고, 역시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이끼’(330만) ‘26년’(300만), ‘이웃사람’(240만)도 흥행에 성공했다. 웹툰 영화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신과 함께’ ‘목욕의 신’‘더 파이브’‘트레이스’‘다이어터’, ‘살인자○난감’ 등 10여 편도 영화화가 추진 중이다.
웹툰에서 출발한 ‘미생’도 만화라는 틀에서 벗어나 원소스멀티유즈(One-Source Multi-Use) 문화 콘텐츠로 끝없이 진화 중이다. 단행본과 인터넷 영화, 드라마가 잇달아 흥행했고, 롯데칠성음료의 ‘레쓰비-미생 캔커피’ 등 관련 상품까지 나왔다. 과연 세계로 뻗어가는 ‘대한민국표’ 웹툰은 또 다른 한류 기적을 이뤄낼 수 있을까. 많은 이가 기대를 가지고 그들의 장도(壯途)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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