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민이 조합원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안산의료생협 새안산의원 전경.
경기 안산시 우리생협치과 권영국(38) 원장은 오후 1시 병원을 나서다 막 병원에 들어오려는 환자와 마주치자 이렇게 말했다. 일반 병원 같으면 닫힌 현관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을 환자도 태연히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그래요. 점심시간인 거 알고 왔는데 뭐. 나 여기 있을 테니 천천히 갔다 와요.”
우리생협치과는 안산의료생활협동조합(안산의료생협)이 운영하는 병원. 지역주민들이 출자해 협동조합을 만들고 병원을 세운 뒤 권 원장을 채용해 진료를 맡긴 형태다. 환자가 ‘주인’이니 ‘고용인’ 의사가 그에게 병원을 맡기고 나서는 게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상운(44) 안산의료생협 경원지원실장은 “우리 병원에서는 ‘환자가 주인’이라는 말이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라 실질”이라며 “그 덕분에 환자들은 과잉 진료에 대한 불안 없이 치료를 받고, 의사는 병원 운영 고민 안 하고 진료에만 전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11년부터 우리생협치과에서 일해온 권 원장도 이 말에 동의한다. 그는 “일반 치과 재직 시절에는 환자에게 치료 내용을 설명하면 ‘돈을 또 얼마나 내라 하려고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는 무슨 말씀을 드려도 믿어주니 의사로서 더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최근 공공의료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이러한 의료생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의료생협이 1990년대 중반 공공의료의 공백을 메우면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지역사회 건강하게 만드는 구심점
경창수 안산의료생협 이사장.
1996년 문을 연 인천평화의료생협도 인천 부평에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산업재해와 직업병 상담 및 진료 등을 담당하던 민중의원이 지역주민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며 만든 것. 2000년 설립한 우리나라 3호 안산의료생협은 1990년대 중·후반 안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생활과 환경을 지키는 안산 시민의 모임’ 등 시민사회단체가 주도했다. 경창수 안산의료생협 이사장은 “당시 이 지역에 있던 반월공단 노동자 등 지역주민의 의료, 건강, 생활 관련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것이 의료생협 설립 당시 중요 관심사였다”고 밝혔다.
이처럼 기존 의료체계에서 소외된 지역주민 복지와 의료 증진을 위해 설립한 병원인 만큼, 운영 방식이 일반 영리병원과 크게 다르다. ‘의료생협 환자권리장전’ 등을 통해 환자 보호에 최우선의 관심을 쏟는 것이 특징(상자 기사 참조). 질병 치료보다는 예방에 중점을 두고, 과잉진료 및 투약을 하지 않는 것도 의료생협의 공통점이다. 살림의료생협이 운영하는 서울 은평구 역촌동 살림의원의 추혜인 원장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10년 상반기 ‘급성 상기도 감염(감기의 일종)’에 대한 항생제 처방률은 전국 의원급 평균이 53.2%. 반면 의료생협은 5.9~20.5%에 그쳤다.
찾아가는 진료 서비스 제공
의료생협은 여전히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하는 데도 앞장선다. 안산의료생협 고용의사의 근로규정에는 ‘일주일에 4시간 이상 방문진료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장애인, 노인 등 의료취약계층에게 ‘찾아가는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경창수 안산의료생협 이사장은 “집 안에 사실상 방치돼 있다시피 한 독거노인들은 일반 의료기관이나 지자체 복지담당 공무원이 돌보기 어렵다. 우리는 이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하면서 말동무를 해드리고, 반찬 등 먹을거리도 전달한다. 공공의료와 복지가 미처 닿지 못하는 영역에서 의료생협이 보완재 구실을 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안산의료생협은 갑작스런 경제상황 악화로 위기상황에 놓였으나 정부의 지원기준에 해당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경기도의 ‘무한돌봄사업’에도 참여해 무상진료를 제공하고 있다.
‘환자 우선’ 의료 서비스와 공공 활동을 바탕으로 신뢰를 쌓은 의료생협은 최근 크게 성장하고 있다. 안성의료생협이 운영하는 병원은 안성농민의원, 우리생협의원, 서안성의원 등 가정의학과 의원 3개와 한의원 2개, 치과 등 6개에 달한다. 지난해 말 현재 4800여 가구가 조합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안성시민 10명 중 1명이 의료생협의 ‘공동 소유자’인 셈이다. 1999년 44명의 발기인이 모여 시작한 안산의료생협도 2003년 가입 조합원 1000세대를 넘어선 뒤 2009년 2000세대, 2011년 5000세대로 규모가 급성장했다. 현재 치과 외에도 가정의학전문의 2명이 있는 일반 병원과 한의원, 건강검진센터, 요양원 등을 운영중이다.
경기 안산시 우리생협치과에서 권영국 원장이 환자를 치료 하는 모습(위)과 새안산의원의 진료과목.
共益과 公益 더불어 추구
현재로서는 이들과 주민 참여를 기반으로 설립한 정통 의료생협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기준은 한국의료생협연합회(연합회) 가입 여부다(표 참조). 의료생협 활동가 등이 모여 설립한 이 단체는 의료생협 연혁과 창립총회의사록, 정관사본 등을 검토해 조합원이 실질적으로 운영에 참여하는 것이 확인된 의료생협만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앞으로는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도 주민참여형 의료생협과 ‘가짜’를 구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12년 12월 개정된 협동조합기본법은 일반협동조합과 사회적협동조합을 구분한다. 양자를 구별하는 기준은 ‘공공성’. 지역사회 의료 및 돌봄서비스 제공 등 공공적인 구실을 하는 협동조합이 ‘사회적협동조합’으로 등록하면 법인세 50% 면제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경창수 안산의료생협 이사장은 “연합회 회원 의료생협들은 다양한 공익의료활동을 하는 만큼 조합원 동의 절차 등만 거치면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할 수 있다. 안산의료생협도 5월이면 안산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으로 거듭난다. 앞으로도 공공의료의 빈틈을 메우고 의료생협 구성원의 공익(共益)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인 공익(公益)까지 함께 추구하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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