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를 읽다 보면, 여주인공 이름조차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다. 평강공주 이름도 사실 평강이 아니다. ‘평강왕의 딸’이라는 뜻에서 평강공주라 부를 뿐. 우렁이각시도 이름이 없고, ‘이생규장전’ 속 최씨 여인도 이름이 없다.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해도 손색없을 이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의 주인공 ‘궐녀’도 이름이 없다. 궐녀란 그저 ‘그 여자’라는 뜻이다. 그녀는 이옥의 ‘심생전’에서 그저 이름 없는 여인, 궐녀다. 이 이야기 제목은 ‘심생전’이지만, 사실 진짜 주인공은 철없고 무책임한 심생을 사랑한 그 여인, 궐녀다. 이야기의 시작은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처음 만나 서로 반하는 장면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 옛이야기가 마치 현대소설처럼 세련되고 모던하게 느껴진다. 이야기 속 주인공이 마치 동시대 젊은 남녀처럼 느껴질 정도로, 손에 잡힐 듯 생생한 묘사가 압권이다.
“심생은 보자기에 시선을 쏘아 눈어림으로 그녀의 몸을 재어보고 어린 계집아이가 아닌 것을 짐작했다. 그는 놓치지 않고 뒤를 따랐다. (중략) 갑자기 돌개바람이 앞에서 일어나 휙 자주 보자기를 반쯤 걷어버렸다. 과연 보니 한 처녀라. 복숭앗빛 뺨에 버들잎 눈썹, 초록저고리에 다홍치마, 연지와 분으로 아주 곱게 화장을 하였다. 얼핏 보아서도 절세가인임을 알 수 있었다. 처녀 역시 보자기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아름다운 청년을 보았다. 청년은 남빛 두루마기에 초립을 쓰고 좌우편 이쪽저쪽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등에 업힌 그녀도 한 겹 보자기를 가린 채 추파를 던졌다. 그 순간 보자기가 걷혔다. 버들 같은 그녀의 눈과 별 같은 청년의 네 눈이 서로 마주 부딪쳤다.”
임금 행차 구경하다 우연히 만나
서울 양반 출신이자 미남 청년인 심생. 그는 임금 행차를 구경하고 돌아가던 길에 어떤 계집종이 자줏빛 명주보자기로 한 여인을 덮어씌운 채 업고 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철저히 ‘몸과 몸’의 대화로 시작된다. 절제와 예의로 가득한 플라토닉 러브가 아닌 것이다. 남자는 명주보자기에 싸인 ‘여인의 몸’이 어린아이 것이 아님을 눈짐작으로 알아챈다. 그리고 묘령의 여인을 업은 계집종을 뒤쫓기 시작한다. 보자기에 싸인 그 여인을 “더러 소매로 스치고 지나가기도 하면서” 은근히 미묘한 스킨십을 시도한다. 하늘이 도왔는지, 갑자기 돌개바람이 자줏빛 보자기를 확 걷어버리자, 비로소 베일에 싸인 여인의 눈부신 미모가 드러난다. 그녀 역시 보자기 안에서 바깥을 몰래 엿보고 있었다. 난데없는 미소년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녀 역시 설레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한다.
보자기가 걷히는 순간, 버들 같은 여인의 눈, 별처럼 빛나는 청년의 눈, 이 ‘네 눈’이 서로 부딪힌다. 놀랍고 부끄러워서 보자기를 추스르며 황급히 떠나버린 여인. 심생의 상사병은 이날부터 시작된다. 그는 “멍하니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처럼 한참을 방황”하기도 하고, 그녀 소식을 들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그녀 집을 알아내 그 집 담을 뛰어넘어 몰래 숨어 들어간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언문소설을 읽는 궐녀 목소리를 듣자, 심생은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궐녀 또한 등불을 끄고 취침하는 듯했지만, 오랫동안 잠들지 못한 채 뒤척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심생은 그녀의 ‘긴 한숨 짧은 탄식’을 듣고 그녀 숨결이 창밖까지 들리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며, 20일 동안 밤이슬이 내릴 때마다 그녀 집을 찾아가 새벽이 돼서야 돌아오는 ‘무언의 세레나데’를 반복한다. 스무 날째 되는 밤 궐녀가 갑자기 마루로 나와 심생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심생은 벌떡 일어나 궐녀를 붙잡는다. “저를 붙들지 마세요. 한번 소리를 내면 다시는 여기서 못 나갑니다. 저를 놓아주시면 제가 뒷문을 열고 방으로 드시게 할게요. 놓아주세요.”
심생은 궐녀 말을 듣고 그녀를 놓아줬으나, 오히려 그녀는 커다란 주석 자물쇠로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만다. ‘일부러 찰카닥하고 자물쇠 채우는 소리를 내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그녀에게 속은 사실을 알고 분통이 치민 심생은 그럼에도 또 열흘이나 그녀를 기다린다. 방에 자물쇠를 채워놓아도, 비가 아무리 많이 내려도 그녀 집에 찾아가 오직 그녀의 대답만 기다린다. 그의 정성에 감동한 궐녀가 드디어 문을 열어주며 “도련님, 들어오세요” 하자 심생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도 모르게 벌써 방에 들어와’ 있다.
그녀는 심생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전 먼저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는다. 놀란 부모님을 진정시킨 뒤 우리 집안은 중인 출신이고 도련님은 양반댁 자제이지만, 두 사람 마음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솔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드디어 궐녀 집에서 사랑을 이룬다. 밤마다 몰래 궐녀 집을 드나들던 심생은 결국 부모님에게 ‘수상한 애정행각’을 들키기에 이르렀고, 당장 절에 가서 글공부나 하라는 불호령을 듣는다. 부모 압력에 저항하지 못한 심생은 절에서 한 달 정도 머물던 중 궐녀의 언문편지를 받게 된다.
여인 마음 열리는 과정 생생히 묘사
그것은 안타깝게도 이미 죽은 궐녀의 절절한 유서였다. “도련님과 상봉한 이후 세월이 오래지 않음도 아니요, 지어드린 의복이 적다고 할 수도 없는데, 한 번도 도련님께서 한 사발 밥도 집에서 자시게 못하였고 한 벌 옷도 입혀드리지 못하였으며, 도련님을 모시기를 다만 침석(枕席)에서뿐이었습니다.” 그녀는 부모님께 모든 것을 고백하고 그를 ‘남편’으로 받아들였으나, 심생은 그녀를 ‘잠자리’에서만 아내로 여겼다는 사실을 궐녀는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창자가 끊어지고 뼈가 녹는 듯한 고통 속에서 그녀는 혼자 죽어가며 절규한다. “창 사이의 밀회는 이제 그만입니다. 바라옵건대 도련님은 소녀를 염두에 두지 마옵시고, 더욱 글공부에 힘쓰시어 일찍이 청운의 뜻을 이루옵소서.” 그녀는 삶은 물론 죽음까지 한 남자에게 바쳤지만, 심생은 부모에게도 자신에게도 그리고 세상에게도 솔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유서를 읽고 큰 충격에 빠진 심생은 글공부를 때려치우고 의금부 낭관이 됐으나, 슬픔을 이기지 못해 일찍 죽고 만다.
이 이야기에는 한 여인의 마음이 열리는 과정, 그 복잡 미묘하면서도 신비로운 설렘이 손에 잡힐 듯 생생히 묘사돼 있다. 마음을 여는 것은 우주를 들어 올리는 일만큼 어렵지만, 한번 열린 마음을 닫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렵다. 한 여인의 목숨을 건 사랑은 비록 보상받지 못했지만, 이름 없는 그 여인의 절절한 사랑은 수백 년 간극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슬픈 사랑의 리얼리티를 눈부시게 전달한다.
자료 제공·앨피 출판사 ‘춘향이가 읽은 연애소설’
“심생은 보자기에 시선을 쏘아 눈어림으로 그녀의 몸을 재어보고 어린 계집아이가 아닌 것을 짐작했다. 그는 놓치지 않고 뒤를 따랐다. (중략) 갑자기 돌개바람이 앞에서 일어나 휙 자주 보자기를 반쯤 걷어버렸다. 과연 보니 한 처녀라. 복숭앗빛 뺨에 버들잎 눈썹, 초록저고리에 다홍치마, 연지와 분으로 아주 곱게 화장을 하였다. 얼핏 보아서도 절세가인임을 알 수 있었다. 처녀 역시 보자기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아름다운 청년을 보았다. 청년은 남빛 두루마기에 초립을 쓰고 좌우편 이쪽저쪽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등에 업힌 그녀도 한 겹 보자기를 가린 채 추파를 던졌다. 그 순간 보자기가 걷혔다. 버들 같은 그녀의 눈과 별 같은 청년의 네 눈이 서로 마주 부딪쳤다.”
임금 행차 구경하다 우연히 만나
서울 양반 출신이자 미남 청년인 심생. 그는 임금 행차를 구경하고 돌아가던 길에 어떤 계집종이 자줏빛 명주보자기로 한 여인을 덮어씌운 채 업고 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철저히 ‘몸과 몸’의 대화로 시작된다. 절제와 예의로 가득한 플라토닉 러브가 아닌 것이다. 남자는 명주보자기에 싸인 ‘여인의 몸’이 어린아이 것이 아님을 눈짐작으로 알아챈다. 그리고 묘령의 여인을 업은 계집종을 뒤쫓기 시작한다. 보자기에 싸인 그 여인을 “더러 소매로 스치고 지나가기도 하면서” 은근히 미묘한 스킨십을 시도한다. 하늘이 도왔는지, 갑자기 돌개바람이 자줏빛 보자기를 확 걷어버리자, 비로소 베일에 싸인 여인의 눈부신 미모가 드러난다. 그녀 역시 보자기 안에서 바깥을 몰래 엿보고 있었다. 난데없는 미소년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녀 역시 설레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한다.
보자기가 걷히는 순간, 버들 같은 여인의 눈, 별처럼 빛나는 청년의 눈, 이 ‘네 눈’이 서로 부딪힌다. 놀랍고 부끄러워서 보자기를 추스르며 황급히 떠나버린 여인. 심생의 상사병은 이날부터 시작된다. 그는 “멍하니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처럼 한참을 방황”하기도 하고, 그녀 소식을 들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그녀 집을 알아내 그 집 담을 뛰어넘어 몰래 숨어 들어간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언문소설을 읽는 궐녀 목소리를 듣자, 심생은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궐녀 또한 등불을 끄고 취침하는 듯했지만, 오랫동안 잠들지 못한 채 뒤척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심생은 그녀의 ‘긴 한숨 짧은 탄식’을 듣고 그녀 숨결이 창밖까지 들리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며, 20일 동안 밤이슬이 내릴 때마다 그녀 집을 찾아가 새벽이 돼서야 돌아오는 ‘무언의 세레나데’를 반복한다. 스무 날째 되는 밤 궐녀가 갑자기 마루로 나와 심생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심생은 벌떡 일어나 궐녀를 붙잡는다. “저를 붙들지 마세요. 한번 소리를 내면 다시는 여기서 못 나갑니다. 저를 놓아주시면 제가 뒷문을 열고 방으로 드시게 할게요. 놓아주세요.”
심생은 궐녀 말을 듣고 그녀를 놓아줬으나, 오히려 그녀는 커다란 주석 자물쇠로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만다. ‘일부러 찰카닥하고 자물쇠 채우는 소리를 내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그녀에게 속은 사실을 알고 분통이 치민 심생은 그럼에도 또 열흘이나 그녀를 기다린다. 방에 자물쇠를 채워놓아도, 비가 아무리 많이 내려도 그녀 집에 찾아가 오직 그녀의 대답만 기다린다. 그의 정성에 감동한 궐녀가 드디어 문을 열어주며 “도련님, 들어오세요” 하자 심생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도 모르게 벌써 방에 들어와’ 있다.
그녀는 심생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전 먼저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는다. 놀란 부모님을 진정시킨 뒤 우리 집안은 중인 출신이고 도련님은 양반댁 자제이지만, 두 사람 마음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솔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드디어 궐녀 집에서 사랑을 이룬다. 밤마다 몰래 궐녀 집을 드나들던 심생은 결국 부모님에게 ‘수상한 애정행각’을 들키기에 이르렀고, 당장 절에 가서 글공부나 하라는 불호령을 듣는다. 부모 압력에 저항하지 못한 심생은 절에서 한 달 정도 머물던 중 궐녀의 언문편지를 받게 된다.
여인 마음 열리는 과정 생생히 묘사
자료 제공·앨피 출판사 ‘춘향이가 읽은 연애소설’
그녀의 유서를 읽고 큰 충격에 빠진 심생은 글공부를 때려치우고 의금부 낭관이 됐으나, 슬픔을 이기지 못해 일찍 죽고 만다.
이 이야기에는 한 여인의 마음이 열리는 과정, 그 복잡 미묘하면서도 신비로운 설렘이 손에 잡힐 듯 생생히 묘사돼 있다. 마음을 여는 것은 우주를 들어 올리는 일만큼 어렵지만, 한번 열린 마음을 닫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렵다. 한 여인의 목숨을 건 사랑은 비록 보상받지 못했지만, 이름 없는 그 여인의 절절한 사랑은 수백 년 간극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슬픈 사랑의 리얼리티를 눈부시게 전달한다.
자료 제공·앨피 출판사 ‘춘향이가 읽은 연애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