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 중소기업에서 20년 동안 근무한 B씨는 회계·자금 관리 업무를 겸직했다. 회사 대표가 오래 근무한 B씨를 전적으로 신뢰했고 인건비 절감을 위해 업무를 분담할 다른 팀원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B씨는 개인 주식투자로 손실을 보자 회사 전체 자산의 40%에 달하는 현금과 예금을 횡령했다.
“중소기업은 횡령으로 손실 입으면 존립마저 위태로워”
6월 21일 서울 서초구 한 사무실에서 만난 소모 씨도 중소 건설업체를 운영하다 직원의 횡령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는 한 중소기업이 직원의 횡령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기사를 보고 “그래도 이 사람(A씨)은 기껏해야 5억 정도 해먹었네. 나는 6년을 믿고 같이 일한 직원이 50억 원을 횡령해 날았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2010년 소씨가 지인 소개로 경리부장 정모 씨를 채용한 것이 화근이었다. 빠른 일처리로 신뢰를 얻은 정씨는 회사 경리 업무 전반을 담당했고 2014년 등기이사직에까지 올랐다. 회사 대표 소씨는 전국 각지의 건설 현장을 직접 감독하느라 회삿돈을 꼼꼼히 관리하기 어려웠다. 직원에 대한 믿음은 횡령과 파산으로 돌아왔다.
2016년 소씨 회사 앞으로 세무서 소인이 찍힌 체납 및 압류 예고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소씨는 세금 관련 업무까지 정씨에게 맡기고 정기적으로 납세 사실만 보고 받던 터였다. 보고와 달리 세금 납부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소씨는 정씨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책임을 추궁해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는 정씨를 같은 해 7월 업무상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정씨는 같은 해 8월 경찰 출두를 앞두고 잠적해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피의자의 소재를 파악할 수 없는 탓에 사건은 기소중지 상태다.
정씨가 경리부장 재직 시절 남긴 장부와 증빙자료를 검토한 한 회계 전문가는 “중소기업 횡령 사범들의 전형적 수법”이라고 짚었다. △회사 대표가 전반적인 자금 출납만 확인하고 전표와 회계 처리 내용을 꼼꼼히 비교하지 않는 점을 악용해 ‘일일자금계획서’를 가공 및 허위로 작성, 회삿돈을 지인·가족 계좌로 입금하거나 △관할 세무서가 회사 계좌로 입금한 국세환급금을 무단 출금해 개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소씨 측이 파악한 정씨의 횡령 금액은 50억 원이 넘는다. 소씨는 현재 사업을 중단한 상태다. 정씨가 아직 잡히지 않은 탓에 횡령 사실을 명확히 입증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심지어 정씨가 횡령한 돈도 이익금으로 간주돼 세무 당국으로부터 ‘세금 폭탄’까지 맞았다. 횡령으로 인한 피해가 50억 원을 훌쩍 뛰어넘는 셈이다. 소씨는 믿고 업무를 맡겼던 직원의 배신에 심적 고통과 트라우마를 호소하고 있다.
6월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 사무실에서 중소기업 횡령 피해자 소모 씨가 소송 관련 서류를 살펴보고 있다. [김우정 기자]
“극단적 선택 생각도… 피의자 꼭 잡아달라”
소씨는 “피의자 검거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경찰이 잠적한 피의자를 찾기 전까진 별도리가 없다는 검찰 측 말만 듣고 5년째 기다리고 있다. 젊은 시절 ‘노가다’로 시작해 일군 회사는 폐업했고 나도 파산했다”며 “공범이나 범죄 수익을 나눠 가진 것으로 의심되는 주변 인물 모두가 잠적한 정씨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나는 극단적 선택까지 생각할 정도로 고통받고 있다. 지금이라도 수사 당국이 정씨를 검거해야 한다”고 하소연했다.사건을 맡은 수원남부경찰서와 수원지방검찰청에 소씨가 여러 차례 수사 진행 상황을 문의해도 별다른 진척이 없는 실정이다. 정씨가 잠적한 지 5년 가까이 돼 수사 책임자도 여러 번 바뀌었다. 소씨는 2018년 정씨 명의의 차량이 전북 일대에서 포착된 정황을 직접 파악해 제보했으나 수사 혼선으로 피의자를 찾지 못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주간동아’는 수원남부서와 수원지검에 수사 진행 상황을 취재했으나 “수사 중인 개별 사건에 대해선 취재에 응할 수 없다”는 취지의 답변이 돌아왔다.
기업 관련 사건을 여럿 맡았던 한 법조인은 “개인에게 수십억 원대 횡령은 큰 피해지만 비슷한 사건을 수백 건 수사하는 검경에겐 이른바 ‘주요 사건’이 아니다”라며 “비싼 변호사를 살 수 없는 중소기업의 경우 직원이 거액을 횡령해 달아나도 뾰족한 해법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기 일쑤”라고 꼬집었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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