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재가 1월 15일 오후 태국 방콕 탐마삿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0 AFC U-23 챔피언십’ 우즈베키스탄과 조별리그 3차전에서 드리블을 하고 있다(왼쪽). 이동경(왼쪽)이 22일 오후 호주와 4강전에서 추가 득점에 성공한 뒤 이동준과기쁨을 나누고 있다. [뉴스1]
처음부터 낙관한 것은 아니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 금메달로 검증을 끝낸 김학범 감독일지라도 만만찮았다. 이란, 우즈베키스탄과 묶인 조 편성부터 그랬다. 첫 경기 중국전 후반 인저리타임에 이동준의 천금 같은 골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꼬여가는가 싶었다. 이후 조별리그 연승 및 요르단, 호주, 사우디아라비아까지 격파하며 ‘전승 우승’. 토너먼트에서 으레 나오는 승부차기 승리도 없이 90분 혹은 120분 안에 상대를 박살냈다.
이제는 세계무대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 첫 메달을 따낸 이후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일 때다. 선수단에 불 엄청난 변화도 불가피할 전망. 총 23명이 나섰던 이번 U-23 챔피언십과 달리 올림픽은 18명으로 축소된다. 여기에 추가로 들어올 와일드카드 3장도 고려해야 한다. 지난 아시아경기에서 손흥민, 조현우로 재미를 봤던 김 감독이 이를 쉬이 외면할 리 없다. 이미 매체에서는 권창훈을 포함한 관련 사안이 화두로 나왔다.
생존율이 그리 높지만은 않은 싸움. 우승 멤버 가운데 누가 살아남을까. 아무래도 반년밖에 남지 않은 지금, U-23 챔피언십 활약상이 크게 반영되리라는 건 자명하다. 올 상반기 동안 또 증명해 보여야겠지만, 일단은 큰 임팩트로 유리한 고지를 점한 3인을 소개한다.
은은히 빛나는 별, 원두재
이 선수가 한양대에 갓 입학했을 때가 떠오른다. 정재권 한양대 감독은 “꼭 지켜보라”며 입이 닳도록 추천하곤 했다. 웬만큼 이름 있는 고교 선수는 한 번씩 체크했는데, 원두재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출신이 어디인가 했더니 충북 청주 소재 운호고다. 냉정히 말해 축구로 큰 조류를 형성한 명문은 아니었다. 정 감독도 “원래 다른 학교 선수를 보러 갔었다. 그런데 상대 팀에 혼자 중원을 쥐락펴락하는 놈이 있더라”며 원두재를 처음 본 날을 떠올렸다.이후 점차 이 선수에게 빠져들었다. 180cm 후반대 신장에 신체 밸런스도 워낙 좋아 보였다. 중심이 뜰 법도 했으나 탄력 있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고는 지도자들과 함께 “타고났다”며 엄지를 내보이곤 했다. 이 선수는 매섭게 치고 나왔다. 연령별 대표팀에 선발돼 또래의 쟁쟁한 멤버들과 경쟁을 시작했다. 무명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던 이가 몇 달 만에 전국 랭킹 최상위권과 겨룬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비결을 차분함에서 찾는다.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청소년 대표팀은 혼돈 그 자체다. 물론 10대 초중반부터 올라온 붙박이도 존재하나, ‘지는 해’와 ‘뜨는 해’가 공존하는 복잡 미묘한 그림이 연출된다. 이 중엔 뜨려다 사라지는 이도 적잖은데, 대부분 도취한 경우다. 한 번 얼굴을 알리는 순간부터 주변 관심에 휩싸이고, 이때 정신 못 차리는 선수가 꽤 된다. 원두재는 정반대였다. 대표팀에 호명되더니 더 가다듬고 채찍질했다.
플레이 스타일도 이런 성향을 그대로 담고 있다. 중앙 수비수와 수비형 미드필더를 겸하는 원두재는 화려한 것보다는 제자리에서 본분을 찾아왔다. 겉은 혈기왕성한 청년이나, 그 속엔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애늙은이가 있었다. 이번 U-23 챔피언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생 때부터 “상대를 부수고, 공 연결하는 것 하나는 자신 있어요”라던 원두재. 장담컨대 지도자는 묵묵히 희생하려는 이런 선수를 싫어할 수가 없다. 단체 스포츠인 축구는 튀고 싶을 때도 제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는 이가 꼭 필요하다.
원두재에 대해 늘 “저평가된 선수”라고 설명해왔다. 휘황찬란하기보다 은은하게 빛나는 이 선수를 여러 번 소개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꼬였다. 잦은 부상에 신음하는 ‘유리 몸’은 아니나, 꼭 중요할 때마다 부상이 닥쳐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출전도, 독일을 포함해 해외 진출도 날렸다. 이번에는 진짜 보여줄 때라는 걸 본인도 잘 알고 있을 테다. 울산현대축구단에서 2020 시즌을 맞게 된 원두재가 추후 국가대표팀을 노려볼 만하다는 얘기가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한 번씩 나오는 모양이다.
김학범 감독이 믿고 쓰는, 이동경
1월 26일 ‘2020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귀국해 취재진과 인터뷰하는 김학범 감독. [뉴스1]
감독마다 믿는 선수들이 몇몇씩 있다. 공개석상에서 콕 집긴 어렵겠으나, ‘이번에도 한 건 해주겠지’라며 기대하고 의존하기 마련이다. 김학범 감독에겐 이동경이 그런 존재다. 왼발을 잘 쓰고, 2선 전반을 커버하며 공격 포인트를 건질 줄 아는 자원. 지난해 3월 자칫 U-23 챔피언십 본선행마저 좌절될 뻔했을 때 김학범호를 살렸듯, 이번에도 8강 요르단전에서 극장 프리킥 골을 작렬했다. 몇 번이나 팀을 구해낸 만큼 도쿄행 전망도 밝은 편이다.
착함의 껍데기를 깨다, 오세훈
오세훈이 1월 26일 오후 태국 방콕 라자망갈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와 결승전에서 상대 문전을 향해 쇄도하고 있다. [뉴스1]
그랬던 오세훈은 나날이 발전했다. 순진하고도 정직한 선수, 특히나 상대 폐부를 찔러야 하는 최전방 스트라이커가 마냥 착하기만 하다면 매력이 없다는 걸 스스로 느낀 듯했다. 프로 2년 차에 2부 리그 임대로 성인 무대를 확실히 맛봤고, 쉼 없이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중이다. U-20 월드컵 준우승 주역에 U-23 올림픽대표팀 월반까지. “많이 좋아졌다”는 주변 평가에 여전히 수줍게 웃었으나, 적어도 자신의 축구에서는 전에 없던 것에 눈을 뜬 듯하다.
최근 올림픽 해결사는 와일드카드에 크게 의존해왔다. 2012년 박주영, 2016년 손흥민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오히려 또래보다 어린 공격수가 터질 수도 있다. 형들보다 두 살 어리지만 오세훈의 현 기세라면 각 대륙에서 집결하는 올림픽도 기대해볼 만하다. 혹시 아는가. 최전방 공격수 차기 계보를 오세훈이 이어갈지.
물론 좋은 선수들은 더 있다. 또 정돈이 안 된 일부 포지션에선 누가 또 혜성처럼 등장할지 모를 일이다. 2008 베이징올림픽 이후 다시 아시아 국가에서 치르는 대회인 만큼 확실한 성과를 내주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