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315

2021.11.19

“나는 진시황” 패도 추구 마오쩌둥 자기 고백

[조경란의 21세기 중국] 사회주의 아닌 법가의 나라 중국

  • 입력2021-11-23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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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시스]

    [뉴시스]

    오늘날 중국에서 문화적 영향력이 가장 큰 인물은 누구일까. 당연히 시진핑일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 속 인물 중에서 꼽는다면 어떨까. 마오쩌둥, 진시황, 공자 순으로 영향력이 강하다고 본다.

    2011년 1월 공자상(孔子像)이 중국 현대사의 상징적 공간인 톈안먼광장에 세워졌다. 석조 기단(1.6m)을 합치면 9.5m 높이의 거대한 동상이었다. 톈안먼광장에 걸린 마오쩌둥 초상화보다 훨씬 큰 공자상을 두고 당시 중국에서 논란이 일었다. 동상 건립 후 얼마 안 있어 인터넷 사이트 런민망(人民網)이 시민 22만 명을 대상으로 “톈안먼광장 공자상 건립을 어떻게 보느냐”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전통 문화를 발전시키기에 지지한다”고 응답한 이는 약 30%, “모든 이가 유학(儒學)을 추앙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반대한 이가 70%에 달했다. 결국 공자상은 철거됐다. 이를 당시 중국인은 “마오쩌둥이 공자를 이겼다”고 평했다. 중국공산당의 프로파간다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설문조사 결과는 현대 중국에서 마오의 영향력이 그만큼 막강하다는 뜻으로 읽힌다. 마오는 중국의 일반 인민에게 이미 신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진시황 찬성, 공자 반대”

    2011년 중국 베이징 톈안먼광장에 설치됐다 철거된 공자 동상. [동아DB]

    2011년 중국 베이징 톈안먼광장에 설치됐다 철거된 공자 동상. [동아DB]

    그렇다면 진시황과 공자의 조합은 어떨까. 진춘밍(金春明)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교수 등의 공저 ‘문화대혁명사’에는 마오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실려 있다.
    “진시황은 중국 봉건사회에서 제일 유명한 황제이고 나 또한 진시황이다. 린뱌오(林彪: 중국 군인·정치가로, 마오쩌둥 후계자로 지목됐으나 마오와 대립하다 망명 도중 사고사)는 내가 진시황이라고 비난했다. 중국에는 유사 이래 2개의 계파가 있는데, 하나는 진시황을 좋아하는 부류이고 또 다른 갈래는 진시황이 나쁘다고 말하는 이들이다. 나는 진시황에 찬성하고 공자에 반대한다.”

    이 같은 기록이 사실이라면 마오는 전제국가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도(道)에 따른 유가식 통치를 부정적으로 본 것이다. 첸리췬(錢理群) 전 베이징대 교수는 말년의 마오가 “내 사후 유학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유언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공자와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부터 20세기까지 약 2000년 동안 중국인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인물이다. 21세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두 인물을 활용한 정치적 마케팅의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중국 위정자는 이러한 사실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다.



    마오와 공자의 대결은 마오가 진시황과 자신을 동일시했다는 점에서 진시황과 공자의 대결로 치환되기도 한다. 현대 정치 맥락에서 두 역사적 인물의 대결은 협력으로 바뀌기도 한다. 두 인물로 상징되는 정치철학이 가리키는 방향은 다르지만, 사상을 관철하는 방식은 유사하기 때문이다. 진나라 이후 중국 역대 왕조는 양자 간 긴장을 적절히 타협해 이용했다. 위정자들이 진시황과 공자의 사상이 적대적 공존관계임을 간파하고 활용한 것이다. 진나라처럼 법가사상이 국가를 지나치게 잠식하면 다음 왕조는 반드시 공자의 유교 사상을 강화하는 식이다. 과잉과 결핍을 찾아 덜어내거나 메우는 것이 역사와 정치 원리다. 정반합(正反合) 원리는 만고의 진리 아니던가.

    오늘날 시진핑은 마오(또는 마르크스와 레닌)와 공자 모두를 자기 통치에 활용하려 한다. 시진핑과 직접 만난 미국의 ‘괴짜’ 백만장자 니콜라스 베르구르엔은 저서 ‘민주주의의 쇄신’에서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와 유교가 앙상블을 이루는 중국에선 그러한 슬로건이 거대한 국가를 일원화하고 사람들을 결집시킨다”고 말했다. 베르구르엔은 빌 게이츠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는 자선 사업가로 알려져 있다. 서양인인 그가 보기에 서로 이질적인 마르크스주의와 유학의 결합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법가 때문에 권모술수 횡행”

    중국 첫 통일제국을 세운 진시황. [동아DB]

    중국 첫 통일제국을 세운 진시황. [동아DB]

    필자는 중국 현실에서 두 사상의 결합은 조화로운 앙상블이라기보다 권위주의 정치를 강화하는 기제가 될 공산이 크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법가화(法家化)됐기 때문이다. 애초에 마오는 마르크스주의를 법가사상의 기반 위에서 받아들였다. 젊은 시절 그는 초기 법가 사상가 상앙(商鞅)의 개혁사상에 매료됐다. 법가는 중국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저서 ‘중화를 찾아서’에서 중화주의의 폐해를 지적한 문화사학자 위치우이(余秋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법가의 권(權), 술(術), 세(勢)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중국 사회를 얽어매고 있다. 당초 대국을 관리하는 기본 구조로 역할을 다했으나, 갈수록 싸움에서 이기는 권모술수로 변형됐다. 변질된 법가가 중국인의 사유 깊숙이 파고들어 온갖 권술과 모략이 제멋대로 횡행하고 있다.”

    진시황은 한비자(韓非子) 철학의 핵심인 패도(覇道)를 토대로 중국사에 첫 통일제국을 만들었다. 패도는 상앙이 살던 기원전 4세기 무렵만 해도 잘 드러나지 않던 사상이다. 한비자가 활동한 기원전 3세기에 들어서야 당대 중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한비자 사후 12년 만에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것은 그의 사상이 사회·국가 제도의 이론적 토대로 효용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법가 학설을 집대성한 한비자는 유·묵(墨)·도가(道家)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과감히 개조했다. 토지, 백성, 권력을 모두 군주에게 집중시킨 진나라는 변방 국가의 한계를 넘어 최초의 통일왕조를 수립했다. 그 전 시대 상앙도 봉건제 대신 군현제를 도입하고, 세습이 아닌 임명을 통한 관료제로 중앙집권화 기틀을 닦았다. 이처럼 진나라의 성공 비결은 혈통보다 능력을 중시한 철저한 현실주의·공리주의적 통치였다. 상앙과 한비자의 공도 컸지만, 중국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진시황이다. 한비자로 이어진 법가를 통치철학으로 실제 채택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어떻게 올바른 인간이 되느냐”에 관심을 보인 반면, 한비자의 화두는 “어떻게 천하를 통일하고 다스리느냐”였다. 같은 맥락에서 유가는 왕도, 법가는 패도를 추구했다. 일견 상반된 사상이지만 유가와 법가 모두 중국 역사의 ‘집권당’이었다. 중문학자 이중톈(易中天)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가는 무대 위에, 법가는 막후에 있었을 뿐”이다. 도가는 불교와 주도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야당’으로 자리매김했고, 묵가만 ‘지하당’으로서 빛을 보지 못했다. 중국에서 진시황은 제도 창시자고, 공자는 문화 창시자다. 공자는 봉건제를, 진시황은 군현제를 지지했다. 봉건제의 이상은 주나라의 적자가장제(嫡子家長制)다. 혈연에 근거해 왕에서 제후, 사(士)로 이어지는 위계적 사회질서다. 도덕적 이상주의에 근거한 덕치를 표방했다. 반면 진시황의 군현제는 법치와 형벌로 다스리는 현실주의 정치 제도다. 이처럼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교직하며 중국 역사를 이끌어갔다.

    20세기 들어서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성립됐다. 왕조 붕괴의 중요한 전조는 과거제 폐지였다. 이로써 진시황과 공자 모두 중국 정치 및 일상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1911년 신해혁명은 유교와 법가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은 중화제국 체제의 공식적 해체를 의미했다. 1915년 ‘반(反)유교·반(反)공자’를 내세운 신문화운동은 공화국에 어울리는 새로운 윤리와 사상을 확립하려 했다. 유교가 살아 있다면 언제든 황제도 부활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청년 지식인을 움직였다. 그러나 신문화운동이 유교 문화를 일소하지는 못했다. 엄밀히 말해 20세기 중국에서 공자는 살았다, 죽었다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돈이 국교(國敎) 된 중국

    그렇다면 21세기 중국에서 공자를 누가, 왜 호출했을까. 그 주역은 바로 공산당이다. 개혁·개방 후 중국에서 부(富)의 총량은 늘어났다. 사회가 부유해지면 구성원을 한데 모으는 구심력보다 해체·배척하는 원심력이 강해진다. 중국 당국은 기존 마르크스주의로는 강화되는 원심력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공자의 도덕으로 물질만능주의를 치료할 수 있다고 본 것일까. 중국에서 돈이 ‘국교(國敎)’가 됐다는 자조마저 나오는 상황에서 유교의 소환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개혁·개방 직후인 1980년대 이미 공자를 다시 소환한 인물이 있다. 중국 지식인들이 ‘사상의 은사’라고 칭하는 인문학자 리쩌허우(李澤厚: 11월 2일 미국에서 별세)다. 그는 1980년 ‘공자의 재평가’라는 제하의 글에서 공자를 “중국 문화사 최대 공헌자”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공자가 인(仁)을 중심으로 중국인 문화심리 구조의 기본 패턴을 만들었다”고 규정했다. 어떤 면에서는 전통에 대한 중국 내 재평가는 리쩌허우가 수십 년 전 이미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마오는 1976년 죽기 전까지 법가사상을 계속 공부하며 “내가 죽으면 유가가 다시 살아난다”고 예언했다. 21세기 중국에서 공자의 이상주의가 되살아날 수 있을까.

    조경란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인문정책특별위원회 위원. 중국현대사상·동아시아 사상 전공. 홍콩중문대 방문학자·베이징대 인문사회과학연구원 초빙교수 역임. 저서로는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신좌파·자유주의·신유가’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전통·근대·혁명으로 본 라이벌 사상가’ ‘국가, 유학, 지식인: 현대 중국의 보수주의와 민족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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