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4

2014.04.21

‘순교와 배교 사이’ 묵직한 질문

이장호 감독의 ‘시선’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4-04-21 1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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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와 배교 사이’ 묵직한 질문
    미국 극장가에서 성서에 바탕을 두거나 기독교적인 주제를 다룬 종교 영화가 유례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개봉 편수도 전례 없이 많다. 이를 두고 할리우드가 ‘신의 영토’에서 새로운 시장을 발견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속속 제기된다. 오랫동안 보수적인 기독교 사상과 거리를 둬온 ‘자유주의적인’ 할리우드가 신앙인을 관객층으로 흡인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풀이다.

    이와는 독립적인 흐름 속에 있지만 영화 ‘시선’은 한국 영화의 거장 이장호 감독이 세계적인 추세를 예견이나 한 듯 내놓은 기독교 영화다. 1995년 작 ‘천재선언’ 이후 19년 만의 복귀작이자 생애 20번째 연출작이다. 오랫동안 주류 영화계를 떠나 있었지만 1970~80년대 한국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으며, 여전히 팽팽한 현역 작가정신을 가진 거장의 회심작인 만큼 최근 할리우드의 대세가 된 기독교 영화들과 비교해볼 만하다.

    이 감독의 ‘시선’은 기독교인을 주인공으로 하고 기독교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종교 영화로만 환원할 수 없는 작가적 주제의식과 사회 보편적 물음도 담겨 있다. 성서 세계를 ‘판타지’로, 예수와 노아와 모세를 태초의 ‘슈퍼히어로’로 묘사하는 할리우드 영화와 달리, 이 감독은 종교 영화에서마저 한국 영화 특유의 강렬한 사실주의적 경향을 반영한다.

    배경은 정부군과 이슬람반군이 분쟁을 벌이는 아랍권 가상국가 이스마르다. 이곳에서 현지 체류 선교사인 조요한(오광록 분)의 안내로 선교 봉사를 하던 한국인 8명이 이슬람반군에 피랍된다. 테러세력은 이들을 인질로 한국과 이스마르 정부에 반군지도자 석방과 거액을 요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한 명씩 처형하겠다고 위협한다.

    ‘순교와 배교 사이’ 묵직한 질문
    영화는 사선에 서서 가식을 벗고 민낯을 드러낸 한국인 선교단의 인간적인 결점을 보여준다. 현지 안내를 빙자해 뒷돈을 챙기는 선교사가 있는가 하면 한국에 아내를 두고 현지에서 불륜행각을 벌이는 선교단원, 겉으로는 점잖은 장로이자 기업인이지만 평생 아내를 구타하고 여자를 무시해온 이도 있다. 이슬람반군의 위협은 점점 현실이 돼가고, 선교단은 자신들 중 처형될 한 명을 뽑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서로의 갈등과 인간적 결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가운데, 이슬람반군은 선교단에게 스스로 종교를 배반할 것을 요구한다.



    이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눈과 입으로 증거하는 믿음도 있으나 침묵으로 기도하고 내면으로 성찰하는 신앙도 있다고 말한다. “순교보다 거룩한 배교(背敎)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극중 대사는 기독교에 귀의한 거장 감독의 종교적 성찰을 보여준다.

    할리우드 영화 ‘노아’가 ‘신의 뜻’으로 이뤄지는 전쟁과 학살을 합리화하며 결국 ‘선택받은’ 백성과 ‘버림받은’ 백성 사이 건널 수 없는 강을 강조하는 데 반해, ‘시선’은 기독교인의 민낯을 통해 순교와 배교의 경계선을 확장한다. 어떤 것이 ‘구원’에 더 가까울지 판단하는 건 관객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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