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실종자 가족들이 구조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쉽게 갈 놈은 아냐, 나는 믿어요.” 아빠가 말을 이었다. 부부의 아이는 쌍둥이였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동생은 밥도 먹지 않은 채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했다. 학교에서 출발한 첫차를 타고 도착한 부부는 진도실내체육관에 내걸린 구조자 명단에 아이 이름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바로 팽목항으로 왔다. 해는 이미 떨어졌다. 팽목항에 마지막 구조자를 태운 배가 당도한 것은 오후 1시 50분. 이미 10시간 가까이 다른 소식은 없었다.
“그렇게 쉽게 갈 놈은 아냐”
밤 10시 30분, 옛 부두에는 평택과 동해, 포항에서 모인 해양경찰청(해경) 특공대가 침몰 현장으로 향하는 경비정에 승선하고 있었다. 접안시설 연결고리의 삐걱거리는 금속성이 신경을 긁었다. 부부는 검은색 제복에 보기에도 무거운 산소통과 구조장비를 둘러멘 특공대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지켜봤다. 경비정에 탈 수 있는 인원이 20명 남짓이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인원점검을 마치고 출항한 배가 먼바다로 사라지는 모습을 부부는 끝까지 바라봤다.
4월 16일 오전 9시 인천항을 출발해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탑승객 대다수는 수학여행길에 오른 경기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었다.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믿고 안심했던 부모들은 오후 들어 뒤바뀐 말에 분노했다. 버스가 진도를 향해 달리는 6시간 남짓 동안 시시각각 전해지는 소식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280명이 넘는 실종자 수, 물살이 빠르기로 유명한 해역이라는 설명, 해군 해난구조대(SSU)가 진입해 확인한 객실 3개에는 이미 물이 차 있더라는 소식까지…. 기대는 실낱보다 가늘었다.
차가 제2진도대교를 넘어 현장에 가까워지자 구급차와 구조대 차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 팽목항은 진도 읍내에서도 30여 분을 더 달려야 하는 남쪽 끝자락에 있다. 항구는 오가는 구조선과 고속단정을 바다로 내리는 해경 중장비가 내뿜는 매연 냄새로 매캐했다. 초동 상황 파악 부실로 크게 질타를 받은 해경과 정부 관계자는 극도로 조심스러워했다. 기지국 용량 초과로 자꾸 끊기는 휴대전화만 붙잡은 채 “공식브리핑을 참고해달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모두가 생각이 달랐다. 현장에 가야 한다는, 내 눈으로 지켜봐야 구조작업이 제대로 진행될 것이라는 가족과 우리가 가서 뭘 하겠느냐는, 차라리 구조대원을 한 명이라도 더 보내는 게 옳다는 사람의 목소리가 팽팽히 갈렸다. 저녁 8시, 학부모 18명을 태운 첫 배가 바닷길로 50분 가까이 떨어진 침몰 현장으로 출발했다. 남은 이들은 발을 구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전남 진도군 진도읍 진도실내체육관 앞마당에 붙어 있는 구조자 명단. 세월호 탑승자 가족들이 애타는 표정으로 이름을 확인하고 있다.
세월호 침몰 현장에서 구조대가 인명구조를 하는 모습과 구조자 들이 담요를 덮은 채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는 모습(위부터).
4월 17일 새벽 1시, 구조된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실종자 가족만 남은 진도실내체육관의 공기는 납처럼 무거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쌉쌀한 냄새가 혀끝으로 밀려들었다. 적잖은 학부모는 이미 탈진한 상태였다. 실랑이에 지친 공무원들은 피로해 보였다. A4 용지에 출력해 셀로판테이프로 테이블에 붙여놓은 ‘대책본부’라는 안내표지는 찢겨나가기 일보직전이었다. 자식을 잃을지 모른다는 분노가 지리멸렬한 공권력을 만나 이글거렸다.
정치인들이 나타났다. 마침 선거의 계절,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새누리당 경기도지사 예비후보인 정병국 의원, 남경필 의원이 함께했다. 마주앉은 학부모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보냈다는 문자메시지를 들이밀었다. “민간구조대가 이걸 보낸 학생의 위치를 추정해 선내에 진입하겠다는데 해경이 막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구조작업이 효율적으로 진행되려면 최소한의 통제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무엇이 가장 적절한지 냉정하게 판단해달라.” 말과 말은 아무런 접점 없이 부딪혔다. 잠시 후 방문한 정홍원 국무총리는 격렬한 항의와 물세례에 못 이겨 이내 자리를 떠야 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온다 해도, 오지 않는다 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분노였다.
“내 자식이 죽어간다고! 시간이 없다니까!” 군 경력이 있다는 한 학부모는 천안함 인양에 17일이 걸렸는데 그보다 10배 무겁다는 세월호를 무슨 수로 인양한다는 것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구명조끼를 입은 학생들이 인근 무인도에 표류했을 것이라는 말도 이어졌다. 같은 시각, 구석에 모인 정부 실무자들은 인터넷 세상에서 쏟아지는 갖가지 문자메시지 캡처 화면을 돌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학생 가운데 최예린이라는 이름은 없답니다. 정보관들이 명단과 대조했습니다.” 넥타이를 말쑥하게 고쳐 맨 날카로운 눈빛의 사내가 귀엣말로 보고했다. 신분을 알 수 없는 한 노인이 만취해 꼬인 혀로 “다 죽었어, 다 죽었어”를 외치다 끌려 나갔다.
분노는 이내 기자들에게로 향했다. 밤새도록 같은 뉴스만 반복하는 방송사 기자들이 주된 타깃이었다. 구조작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실’을 왜 전하지 않느냐는 다그침 앞에 20대 여기자는 얼굴이 하얘졌다. 카메라 장비를 설치하던 한 외신기자와 실종자 가족 사이에 시비가 붙어 험악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기자들 믿을 거 하나도 없어. 이런 기사도 못 내면서 무슨 기자야.”
정부 당국에 대한 불신은 민간 잠수사들에 대한 기대에 불을 지폈다. 해경에는 없는 장비까지 가진 사람들이라고 했다. 한 국회의원이 이들이 현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노라고 나섰다. 그들이 배 안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아이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새벽 3시, 바다에서 건진 시신 2구가 팽목항에 당도했다. 여학생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실종자 가족들이 접안시설에 몰려들면서 항구는 이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차갑게 식은 주검이 배에서 내려지자 통곡과 절규가 쏟아졌다. 실신한 학부모를 실은 구급차가 연신 항구를 빠져나갔다.
세월호가 침몰한 4월 16일,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구조자 및 실종자 가족이 진도실내체육관에 뒤섞여 있다.
삶과 죽음 사이 벽은 종잇장만큼 얇았다. 체육관 앞마당에 붙여놓은 구조자 명단에는 학생들의 소속 반이 병기돼 있었다. 아이들은 반마다 다른 객실에 자리 잡았다고 했다. 다른 반보다 유독 9반과 10반에서 구조자가 드물었다. 아들이 10반이라는 한 아버지는 볼펜을 꺼내들어 구조자 가운데 유일한 ‘10반’ 표기 위에 연신 동그라미를 쳤다. 자기 아들도 살아 있을 것이라는 간절함이 펜 끝에 맺혔다.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 앞에 줄서 있던 학생들은 기울어지는 배 밖으로 빠져나왔고, 아래층 선실에 남아 있던 학생 다수는 그러지 못했다.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는 안내방송을 믿은 아이는 빠져나오지 못했고, 마지막 순간 그 말을 거스른 아이는 빠져나왔다. 배가 침몰할 때 이렇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비법 같은 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운명을 가른 것은 그저 운일 뿐이었다.
사람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400m도 아니고 40m를 왜 못 들어가느냐.” “160명이 아니라 수천 명이라도 투입해야 하는 것 아니냐.” 부모들의 연이은 항의에 마이크를 잡은 해경 간부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시계 20cm인 탁한 바다, 초속 2m의 빠른 물살은 베테랑 해군 특수부대원들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수천억 원을 들여 만든 최신 구난함정도, CN-235 수송기가 쏟아낸 조명탄도 쇠 갑판을 뚫고 배 안으로 진입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모든 수단을 다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도, “가용전력을 전부 동원하겠다”는 군 당국의 결기도 의미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기댈 것은 민간 잠수사들이 현장에 접근 중이라는 소식뿐이었다.
오전 5시 30분.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헬기 프로펠러 굉음이 쉴 새 없이 하늘을 덮었다. 침몰 해역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 유속이 줄고 수심이 가장 얕아지는 새벽시간에 구조 시도를 집중하겠다고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찌푸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 것 같으냐”는 기자의 물음에 박하향 담배를 피워 물고 있던 젊은 구조대원의 표정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잔인한 4월
그리고 오전 10시. 현장에 들어갔던 민간인 잠수사들 소식이 전해졌다. 결론은 참혹했다. 문자메시지를 보냈다는 아이들이 있을 법한 게임장 등에 진입하려 애썼지만 역시나 불가능했다는 설명. 마지막 기대가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가족 심정은 이해하나 잠수사들의 안전도 중요하다”는 말은 부모들의 마음에 닿을 수 없었다. “네가 그러고도 국회의원이야?” 꺾인 희망이 욕설과 고함으로 변해 정치인의 얼굴을 때렸다.
가족들을 태우고 침몰 현장을 찾았던 배도 항구로 돌아왔다. 아내는 “아이 데리고 온다더니 왜 혼자 왔느냐”고 남편 가슴을 두들기며 울었다. 엄마들은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아 신음하듯 흐느꼈다. 아빠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부두 끝에 서서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탁한 물결을 내려다보던 눈동자들이 이내 초점 없이 빨개졌다. 휴대전화 기지국을 보강하고, 봉사단체 천막이 들어섰으며, 읍내와 항구를 잇는 셔틀버스가 만들어졌다는 방송이 나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이 자리 잡았지만, 정확히 그만큼 아이들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엷어졌다. 그렇게, 첫 24시간이 흘렀다.
진도와 해남을 잇는 18번 국도 옆으로 봄비를 맞은 유채꽃이 한층 샛노랬다. 과연 잔인한 4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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