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26

2014.02.24

가시 돋친 가족, 탐욕의 맨 얼굴

연극 ‘은밀한 기쁨’

  • 김유림 월간 ‘신동아’ 기자 rim@donga.com

    입력2014-02-24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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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시 돋친 가족, 탐욕의 맨 얼굴
    아버지 장례식 날, 두 딸의 태도는 극과 극이다. 환경부 차관으로 성공한 언니 마리온은 “내가 아버지에게 선물했던 고가 반지를 누가 가져가는 것 아냐”라며 전전긍긍하는 반면, 임종을 지킨 이사벨은 “조용히 아버지와 이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들은 아버지의 젊은 새 부인이자 알코올중독자인 캐서린을 두고도 부딪친다. 언니 부부는 교묘하게 캐서린을 이사벨에게 떠넘기면서 사업을 확장해주겠다고 하지만, 정작 이사벨은 사업을 확장할 마음이 없다. 이사벨은 제멋대로 구는 새어머니 때문에 동업자이자 연인인 어윈과 갈등하면서도 새어머니를 버리지 못한다.

    이사벨을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은 한껏 날을 세운 채 서로를 몰아세운다. 돈, 가족, 종교, 사랑, 정치 등에 대해 자신만의 논리로 본인 행동을 정당화한다. “왜 사람들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현명하다고 오해하는가” “모두 그렇게 돈을 버는데 왜 너만 깨끗한 척하나” 같은 대사에는 ‘솔직함’을 앞세워 본인 욕망을 숨김없이 표현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그대로 담겼다. 본인은 섹시한 여자의 얕은 자극에 쉽게 넘어갔으면서 이사벨에게는 진정한 사랑을 요구하는 약혼자 어윈의 모습에서 인간 이중성의 극치가 보이는 듯하다.

    특히 주목할 인물은 마리온이다. 그는 이미 ‘모든 일의 가해자는 이사벨’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언쟁에서 무조건 성공하려고 논거만 생각해낸다. 이사벨이 감성적으로 말할 때는 “넌 왜 이렇게 냉정하지 못하니”라며 몰아세우고, 명확하게 본인 의견을 내세우면 가족, 연인 등의 가치를 들먹이며 “냉혈한”이라고 비난한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가 중요할 뿐, 다른 이의 말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타인의 말을 왜곡해 자기 의견을 강화하는 논거로 이용한다. 마리온이 하필이면 ‘성공한 여당 정치인’으로 그려진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이사벨은 극으로 치달으면서도 끝까지 캐서린을 버리지 않는다. 그에게 캐서린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다. 평범한 서점 주인이던 아버지 일생에서 유일하게 특별했던 일은 나이 어린 여인과의 로맨스뿐이었다고 믿는 이사벨은 평생 캐서린을 돌보는 것이 자기 사명이라 생각한다. 캐서린은 이사벨을 이용하고, 때로는 마리온이나 어윈과 같은 처지에서 이사벨을 비난하기도 한다.



    자신의 진심이 끊임없이 의심받고 재단되지만, 죽을 때까지 이사벨은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수녀가 죽음을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순간을 ‘은밀한 기쁨’이라 표현한다. 끊임없이 진심을 의심받던 이사벨 역시 죽음을 통해 ‘은밀한 기쁨’을 느낀 것은 아닐까. 이사벨 역으로 5년 만에 정통 연극 무대에 선 추상미의 안정적 연기가 작품 몰입을 돕는다. 3월 2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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