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8

2013.05.20

소년, 미궁에서 헤매다 어른 되다

연극 ‘해변의 카프카’

  • 김유림 월간 ‘신동아’ 기자 rim@donga.com

    입력2013-05-20 16:1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소년, 미궁에서 헤매다 어른 되다
    사람 마음에는 미궁(迷宮)이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은 짐승이나 인간 내장으로 미래를 점쳤는데 그들은 복잡하게 꼬인 창자를 보고 미궁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시작과 끝은 분명히 있지만 하도 어지럽게 꼬여서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길을 잃고 마는 미궁. 연극 ‘해변의 카프카’는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소년’이 되기를 꿈꾸는 15세 소년 타무라 카프카가 제 안의 미궁에서 헤매다 결국 답을 찾는 이야기다.

    “너는 언젠가 나를 죽이고 네 어머니와 관계할 거다. 네 누나하고도.”

    소년 카프카는 이토록 끔찍한 저주를 퍼붓는 아버지를 떠나 지방 어느 작은 도서관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베일에 싸인 여자 사에키를 만난 카프카는 그녀가 자신이 네 살 때 누나만 데리고 집을 떠난 어머니라고 가정한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어떤 ‘사건’으로 지적 능력을 잃었지만 고양이와 대화할 수 있는 노인 나카타는 고양이 살인마 조니워커를 죽인다. 소년 카프카와 노인 나카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점차 하나의 결말을 향해 달린다. 카프카가 죽여야 하는 사람을 나카타가 죽이고, 카프카가 들어가야 하는 세계의 문을 나카타가 열었다.

    나카타와 카프카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사에키의 공통점은 그림자가 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카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은 여교사에게 심하게 맞은 이후, 그리고 사에키는 1969년 전후 대학 동맹휴학 당시 남자친구가 바리게이트에서 무참히 죽은 이후 그림자를 반씩 잃었다. 살아 있지만 사실상 죽은 두 사람은 폭력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메타포다. ‘입구’에서 만난 두 병사가 “죽이거나 죽음을 당하는 상황에서 도망쳤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주제가 더 명확해진다. 나카타가 사에키의 아들이라고 생각되는 카프카를 도와주는 것은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이 힘을 모아 다음 세대에게 내일을 열어주자는 의미가 아닐까.

    카프카는 심신을 단련해 ‘가장 터프한 소년’이 되고자 하지만, 사실 그가 되고자 하는 강함은 파괴나 정복이 아니다. 불공평, 불운, 슬픔 같은 외부의 힘을 조용히 견디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고양이의 혼을 빼앗으려고 칼을 드는 조니워커나 잔혹한 고문기술자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니다. 미용사 사쿠라, 운전사 호시노, 도서관 사서 오시마처럼 주어진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인생을 즐기는 보통 사람들이다.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2008년 미국 연출가 프랭크 갈라티가 각색한 것을 다시 번역했다. 원작 소설은 하루키 특유의 환상과 비유가 넘쳐 다소 난해하지만, 연극 무대로 옮겨오면서 줄거리가 명확해지고 장면도 뚜렷해졌다. 정어리 비가 내리는 장면, KFC 할아버지로 유명한 커넬 샌더스가 포주로 나오는 장면 등은 소설 속 환상적 분위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장치다. 나카타 역을 맡은 배우 이남희의 천연덕스러운 연기 덕에 지루할 틈이 없다. 6월 16일까지, 서울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