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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참을 수 없는 은행의 갑(甲)질 02

“고갱님이 선택하셨잖아요”

금융회사, 불완전판매 분쟁 땐 ‘자기책임 원칙’ 잣대 적용

  • 손정국 한국투자자보호재단 투자자보호센터장 jkson@inveduⓒ.or.kr

“고갱님이 선택하셨잖아요”

“고갱님이 선택하셨잖아요”

정부는 지난해 5월 15일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해 금융감독원 내에 금융소비자보호처를 설치했다.

최근 우리나라 은행들은 전통적 은행상품 외에 펀드나 보험상품까지 취급하면서 가장 중요한 금융상품 판매 채널이 됐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일부 은행들이 보험상품을 판매하면서 해당 보험사로부터 상품권 등 ‘유인’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다면 은행들이 고객에게 적합한 보험상품보다 자기에게 상품권 등을 지급하는 보험사의 상품을 판매하는 데 더 열을 올렸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영리회사인 은행 같은 금융회사가 자기 이익보다 금융소비자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기를 기대하는 일은 실제로 무리다. 일본 금융감독청에 따르면 펀드 판매회사가 펀드를 판매할 때 자기 이익을 먼저 고려하는 행태를 전 세계적으로 흔히 목격할 수 있다고 한다.

금융상품 이해상충 문제 심각

금융상품은 금융소비자가 쉽게 비교하거나 판단하기 어렵다 보니 여타 일반 상품에 비해 이해상충 문제가 더 심각하다. 무엇보다 상품이 너무 많고 복잡하다. 예를 들어, 펀드의 경우 일반 투자자가 제한 없이 투자할 수 있는 펀드(공모펀드)만 약 3300개나 돼 밤낮 없이 1개에 10분씩 검토한다 해도 약 23일이 걸린다. 게다가 행동경제학자들은 사람이 그렇게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많은 금융소비자가 판매직원의 권유에 따라 금융상품을 선택한다. 한국투자자보호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펀드의 경우 약 60%는 판매회사 창구에 가서야 투자할 펀드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투자는 자기책임’이라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영국이나 미국 등 소위 금융선진국들은 금융회사와 금융소비자 간 이해상충 문제에 매우 강력한 조치를 내놓고 있다. 영국은 이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려고 다각도로 노력한다. 2006년에는 금융소비자에게 적합한 금융상품을 권유해주는 금융전문가와 금융소비자 간 이해상충을 방지하기 위한 검토를 시작했다.

당시 영국 금융감독청(FSA)의 맥카시 위원장은 18세기 후반 영국이 호주에 죄수들을 이송한 사례를 인용하면서 유인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송 도중 죄수의 사망률이 10%가 넘고 심한 경우 30%까지 치솟았으나, 1793년에는 갑자기 사망률이 거의 0%까지 떨어졌다. 영국을 출발할 때 승선자 기준으로 뱃삯을 주던 관행을 1792년부터 호주에 도착한 생존자 기준으로 주는 것으로 변경한 결과였다. 맥카시 위원장은 선장이나 선원들의 윤리의식이 갑자기 높아져서가 아니라, 유인을 변경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6년간 검토한 후 올해부터 금융소비자에게 적합한 금융상품을 권유해주는 금융전문가는 금융회사가 아닌 금융소비자로부터 보상을 받도록 했다. 이전에는 금융전문가가 금융소비자에게 금융상품을 권해 판매가 이뤄지는 대로 금융회사로부터 돈을 받았다. 규제당국은 더 나아가 투자자가 금융상품을 쉽게 확인하기 어렵다는 인식 하에 2011년 1월부터 금융상품의 판매 단계와 사후 구제 단계뿐 아니라, 금융상품의 개발 및 판매전략 수립 단계까지 공적 규제 대상으로 확대하는 정책을 검토 중이다.

또한 2012년 9월에는 금융회사의 내부 인센티브 제도가 지나치게 판매와 연동돼 불완전판매의 원인이 된다고 지적하고, 금융회사들로 하여금 자율적으로 개선할 것을 촉구했다. 일부 언론은 유예기간이 18개월이라고 보도했는데 바클레이스, 로이즈 등 영국의 대형 금융회사들은 내부 인센티브 제도를 고치겠다고 발표하고 현재 열심히 작업 중이다.

영국은 더 나아가 4월에는 금융감독에 행동경제학을 적용하겠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행동경제학의 주장을 수용해 이뤄진 결과도 함께 제시했다. 금융소비자는 합리적이기 때문에 정보만 충분히 제공하면 금융시장에서 자율적으로 규제가 이뤄질 수 있다는 전통 패러다임이 송두리째 바뀔 판이다.

미국은 판매회사 직원이 금융상품을 권유할 때 정보 제공이 공정하지 않은 경우 혹독하게 처벌한다. 2003년 9월 미국의 대형 은행 모건스탠리는 자기 회사에 유리한 펀드를 먼저 권유했다는 이유로 고작 200만 달러(약 22억 원)를 벌금으로 납부했으나, 3개월 후인 11월 자기 회사 펀드를 먼저 권유했다는 이유로 5000만 달러(약 550억 원)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공적 규제로 선제적 대응을

“고갱님이 선택하셨잖아요”

영국 금융감독청 건물.

또한 금융소비자에게 투자 상품을 객관적으로 자문해줘야 하는 투자자문업자는 고객과의 이해상충을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신인의무’를 지켜야 한다. 최근에는 일부 중개업자에게도 신인의무를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2011년 7월에는 소비자금융보호국(CFPB)을 설립해 금융소비자의 피해가 빈번하던 주택저당상품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우리나라 정책당국도 최근 이해상충 방지에 힘을 쏟는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금융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안이 제정되면 금융소비자에게 객관적으로 금융상품을 조언하는 전문가(금융상품자문업자)가 생기게 된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금융상품자문업자는 금융소비자에게서만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금융상품자문업자를 통해 금융소비자의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고 금융상품 조언을 객관적으로 받을 수 있게 한다는 측면에선 대단히 바람직하다. 우리나라가 실질적으로 처음 도입하는 제도임을 감안할 경우 제도가 조기에 정착하려면 정책당국의 꾸준한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최근 금융감독원은 금융소비자보호 모범 규준을 강화해 금융회사가 자율적으로 상품 개발은 물론 마케팅 전략 수립까지 꼼꼼히 확인하도록 했다. 분명 진일보한 정책이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할 경우 미국 같은 엄정한 징계가 어려운 만큼 금융회사의 자율 규제에 맡기기보다 공적 규제를 통해 좀 더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근본적으로는 영국처럼 행동경제학의 적용을 검토할 만하다. 미국 피델리티 자산운용의 전설적 펀드매니저인 피터 린치는 “펀드를 고를 때 냉장고를 고를 때만큼 고민하라”고 충고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무의미한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대부분 냉장고를 구매할 때조차도 합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크기와 색, 약간의 새로운 기능, 그리고 이웃집에서 최근 구매한 냉장고를 대충 참고할 뿐이다.

게다가 금융상품은 모양이나 색이 없다 보니 투자자 대부분이 언론매체가 소개한 것이나 판매직원이 권하는 것으로 우물쭈물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완전판매 분쟁이 터지면 마치 금융소비자가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자기책임 원칙’의 잣대를 적용하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행동경제학의 교훈처럼 금융소비자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에 적합한 감독 방향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인간 본성을 제대로 알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으로 틀을 짜야 비로소 좋은 정책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간동아 2013.05.20 888호 (p16~17)

손정국 한국투자자보호재단 투자자보호센터장 jkson@inved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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