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8

2013.05.20

‘돈 빌린 죄’로 꼼짝없이 당한다

은행권 이자 초과 징수·꺾기·판매 수수료 과다 챙기기에 소비자 냉가슴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3-05-20 14: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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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빌린 죄’로 꼼짝없이 당한다

    막강한 자금력과 정보력을 가진 은행은 금융권의 ‘슈퍼 갑’이다.

    충북에 사는 A씨는 4월 6일 지역농협 직원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대출금에 대해 초과징수한 이자가 있으니 환불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그가 통장에서 확인한 입금액은 3176만여 원. 농협 직원은 이에 대해 “지난해 12월 말까지의 초과분을 정산한 액수로, 올 1월부터 4월까지의 초과 징수분은 5월 중 추가 입금할 것”이라고 밝혔다. A씨는 2007년 8월 해당 농협에서 실세금리 연동 조건으로 7억 원을 대출받은 뒤 2억 원을 상환한 상태다. 그사이 농협이 이 대출건에 대해 수천만 원의 이자를 초과로 징수하다 돌연 이를 돌려준 셈이다.

    우월적 지위로 소비자에 횡포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해당 농협은 대출 뒤 실세금리가 하락했음에도 이를 제때 적용하지 않고 대출 이자를 초과 징수했다. 최근 농협중앙회가 실시한 내부 감사에서 이 사실이 적발되자 A씨를 비롯한 피해자에게 부당징수분을 되돌려준 것.

    그러나 A씨는 농협 직원이 입금 전화를 해올 때까지 자신의 대출금리가 변경된 사실조차 몰랐다. 이에 대해 금융전문 시민단체인 금융소비자원의 이화선 총괄지원본부 실장은 “이번 건이 내부 감사에 적발되지 않았다면 소비자는 대출을 전액 상환할 때까지 피해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며 “관련 피해자들을 모아 집단소송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은행권의 ‘금리 장난’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외환은행은 2006년 9월부터 지난해까지 292개 영업점에서 가산금리를 약정금리보다 높게 전산 입력해 약 181억 원의 부당 이득을 챙긴 혐의로 3월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았다. 과천농협도 2009년 대출금리를 임의로 인상해 약 44억 원의 이자를 챙긴 행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문제는 지속적인 단속과 적발에도 은행권의 이자 초과 징수 행위가 근절되지 않는다는 점.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B씨도 2011년 C은행에서 대출금 1억 원을 1년 연장한 뒤 이런 피해를 당했다. 해당 은행이 B씨의 예금을 담보로 잡고도 이를 대출금리에 반영하지 않은 것. 그는 만기인 지난해 8월까지 대출이자를 과다하게 낸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이화선 실장은 이 이유를 “은행과 대출자 사이의 ‘갑을 관계’”에서 찾는다. “은행은 금융소비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우월적 지위를 행사하면 을인 소비자는 꼼짝없이 당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부당한 ‘갑을 관계’ 관행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지면서 금융권을 향한 불만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지난해 금융감독원(금감원)이 접수한 금융회사에 대한 소비자 민원은 9만4794건. 2011년 8만4731건보다 11.9% 늘어난 수치다. 이 중 은행 대상 민원 대부분은 은행이 소비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때로는 횡포를 부린다는 내용이다. 특히 구속성 예금, 이른바 꺾기가 대표적인 횡포로 꼽힌다. 꺾기란 은행이 대출을 조건으로 자사 상품 가입을 강요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금감원이 접수한 민원에 따르면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D씨는 한 은행에서 3억 원의 기업자금 대출을 받고도 2억5000만 원만 손에 쥐었다. 은행이 대출금 중 5000만 원을 그의 허락 없이 거치식 펀드에 입금했기 때문. 현행 은행업감독업무세칙은 은행이 대출 전후 1개월 이내에 월 수입금액이 대출금액의 100분의 1을 초과하는 예·적금 등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산조작 등을 통해 이런 행위가 빈번히 이뤄진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지난해 말 중소기업중앙회가 회원사를 상대로 실시한 ‘2012 중소기업 금융이용 애로실태조사’에서는 응답자의 11.0%가 꺾기를 경험했다고 밝혔다.

    방카쉬랑스의 그림자

    특히 최근에는 은행의 보험 가입 강요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은 “저금리 추세가 지속되면서 예대마진이 줄어들자 은행들이 보험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최근 금감원 조사에서 KB국민은행 등이 중소기업과 저신용자에게 대출을 해주면서 꺾기로 보험상품에 가입하게 한 사실이 적발되기도 했다.

    은행의 보험 판매, 이른바 방카쉬랑스가 시작된 것은 2003년. 당시 금융당국은 이 제도를 시행하면 소비자는 은행에서 여러 보험상품을 원스톱으로 소개받을 수 있고, 보험사는 보험모집비용을 절감할 수 있으며, 은행은 보험사로부터 판매 수수료를 받을 수 있어 3자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방카쉬랑스가 정착하면 장기적으로 보험료가 인하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이후 10년이 흐르는 동안 방카쉬랑스는 확대일로를 걸었다. 생명보험 판매채널 중 은행의 비중(초회 보험료 기준)은 2011년 현재 47.6%(7조2154억 원)로 설계사(24.3%, 3조6775억 원)의 2배에 이른다. 이 기간 보험 판매를 통해 은행 수익도 증가했다. 금감원 통계에 따르면 은행의 보험 판매 수수료 수입은 2009년 6185억 원에서 2010년 6931억 원, 2011년 7734억 원으로 가파르게 늘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2012년 수입은 더 늘어났으리라는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강형구 금융국장은 “장기적인 저금리로 수익성 악화에 시달리는 은행 처지에서 보험은 안정적인 판매 수수료 수입을 보장해주면서 관리는 안 해도 되는 최고 효자 상품”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방카쉬랑스가 보험사에도 이익이 됐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보험사 관계자는 “현재 은행들은 여러 보험사와 계약을 맺고 유사한 상품을 다수 취급한다. 평균적으로 한 은행이 21개 정도의 보험사와 판매 계약을 맺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상황에서 보험사는 자사 상품 판매를 늘리려고 은행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 과정에서 각종 부당행위도 벌어진다. 금감원은 4월 신한생명에 대한 종합감사를 통해 이 보험사가 일부 외국계 은행과 지방 은행 등에 자사 방카쉬랑스 상품 판매 촉진 명목으로 뒷돈을 제공한 사실을 적발했다. 2011년부터 2012년까지 2년간 판매 실적에 따라 은행으로 건너간 현금 및 상품권 등의 총액은 2억 원대에 이른다.

    똑똑한 소비자의 반격

    문제는 이 사실이 밝혀진 뒤 신한생명 안팎에서 ‘업계 관행인데 운 없이 걸렸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는 점. 오세헌 금융소비자원 보험국장은 “업계 중간 규모인 신한생명이 이 정도 액수를 건넸으면 상위 보험사는 얼마나 더 했겠느냐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떠돈다. 하지만 줬다는 사람도 받았다는 사람도 없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며 답답해했다.

    이처럼 은행과 보험사 사이에 뚜렷한 ‘갑을 관계’가 형성되면서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오고 있다. 오세헌 국장은 “보험사가 은행 입맛에 맞추려고 판매 수수료가 높은 상품을 내놓으면 소비자가 부담하는 보험료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은행 직원이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는 상품보다 뒷돈 잘 주는 보험사의 상품을 권한다 해도 알 도리가 없지 않나. 소비자 대부분이 은행 직원을 금융전문가로 여기고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며 “외국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엄격히 처벌한다. 우리나라도 관련 규정을 정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우리은행에서 보험에 가입한 E씨는 실제로 이런 일을 겪었다. 보험료를 한 번에 내려다 “일시납 계약은 추가적립을 할 수 없다. 추가적립하려면 2년 납부 계약을 해야 한다”는 창구 직원의 설명을 듣고 마음을 바꿨는데, 사실 그 상품은 납부 방법과 관계없이 추가적립이 가능했던 것. 심지어 일시납 계약을 할 경우 만기환급금이 더 많았다. 은행 직원이 거짓말을 한 이유는 우리은행 내 실적 평가에서 연납 유치에 더 높은 점수를 줬기 때문이다. 금감원 조사에 따르면 이 바람에 50명의 소비자가 1인당 34만 원에서 1000만 원까지 총 7800만 원의 손해를 봤다.

    눈에 띄는 것은 최근 금융당국이 이러한 금융계 ‘갑을 문화’ 청산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3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금융소비자 보호기구 설립과 금융소비자법 제정 등에 대한 추진 의지를 밝혔다. 금융위원회는 7월부터 금융회사에 금융소비자보호만을 전담하는 소비자보호 총괄책임자(CCO)를 두도록 하고, 상품 개발부터 소비자 전담부서와 협의하게 할 계획이다. 금감원은 민원이 잦은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민원 상담에 참여한 뒤 보고서를 금융당국에 제출하게 하는 방안을 마련 중이다.

    은행들도 이에 화답하고 있다. 기업은행은 2013년을 ‘금융소비자보호 혁신의 해’로 정하고 수석부행장 직속의 ‘금융소비자보호센터’를 신설했다. 신한은행도 4월 1일 창립기념식에서 ‘금융소비자 중심 헌장’을 선포하고, 모든 영업점에 소비자보호 상담책임자를 두기로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금융권의 ‘갑을 관계’ 관행을 청산하려면 근본적으로 소비자가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화선 실장은 “다른 영역에서는 똑부러지고 할 말 다 하는 소비자들이 은행에만 가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찍히면 금리 인상, 대출 연장 거부같은 불이익을 받을까 봐 몸을 사리기 때문”이라며 “이제부터라도 은행을 두려워하지 말고 상품 가입과 운영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대출 고객의 경우 자신이 과도한 이자를 내는 것 같으면 은행을 방문해 대출약정서와 이자율 등이 적힌 이자지급명세서를 대조하고, 대출약정서 이율과 실제 이율이 다르게 적용된 것은 없는지 확인하며, 의심 가는 내용이 있을 땐 설명을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비자가 부당한 일을 참지 않고 적극적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것도 금융 관행 변화의 출발점이 되리라는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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