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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그 많던 비보이는 어디로 갔을까 01

대한민국 ‘비보이 실종사건’

화려한 조명은 잠깐, 밥벌이 위해 ‘술 파는 노래방’으로 출근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대한민국 ‘비보이 실종사건’

대한민국 ‘비보이 실종사건’
대한민국 저력의 아이콘, 비보이(B-boy·일반적으로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남성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는 이들이 실력을 가리는 대회가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주목도는 예전만 못하다. 6월 23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비보이대회인 ‘R-16 KOREA 2012 세계비보이대회 한국대표선발전’(제6회)이 열려 40여 개 비보이팀이 기량을 뽐냈지만 관련 보도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한국 비보이들은 2001년 세계에서 가장 큰 비보이대회인 ‘배틀 오브 더 이어’(독일)에서 ‘베스트 쇼 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진가를 발휘했다. 같은 대회에 2002년 익스프레션 크루(1위), 2003년 익스프레션 크루(2위), 2004년 갬블러 크루(1위), 2005년 라스트포원(1위), 2006년 라스트포원(2위), 2007년 익스트림 크루(1위), 2008년 TIP 크루(2위), 2009년 갬블러 크루(1위)가 출전해 화려한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2006, 2007년 언론은 비보이를 집중 소개했고, 비보이는 한국이 내세우는 자랑거리가 됐다. 광고, 영화 등에서 블루칩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할리우드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한편, 한 은행의 광고모델로 빙상 요정 김연아와 함께 나란히 섭외됐을 정도다. 비보이는 더는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로 취급받지 않았고 ‘도전정신’의 아이콘으로 대우받았다. 일각에서는 비보이와 한국인을 동일시하기도 했다. 가진 것은 없지만 열정적으로 산 그들이 가난을 딛고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인 캐릭터와 닮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 많던 비보이는 어디로 갔을까.

# 우승 뒤 달라지지 않은 현실



수소문하니, 비보이 상당수가 가라오케에서 일하고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비보이는 “요즘 들어 가라오케에서 일하는 비보이가 늘어, 서울 강남 가라오케에는 비보이가 적어도 2명씩은 있다”면서 “밤무대로 눈길을 돌리는 이유는 밥벌이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경험이 있는 그는 “대회에서 우승한 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 다시 대회에 나갈 생각이 없어졌다”며 이같이 말했다.

“나는 저녁 9시에 가라오케로 출근해 새벽 5, 6시에 퇴근한다. 룸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방송 댄서, 비보이, 비트박스 친구들이 3분씩 총 10분 동안 공연하는 것을 한 타임이라고 한다. 그 공연으로 내 손에 들어오는 돈은 1만 원뿐이지만 하루 10타임 들어가면 10만 원은 벌 수 있다. 손님한테 팁을 얼마나 ‘뽑아내느냐’에 따라 수입이 달라진다. 좁은 공간에서 춤추는 것이 껄끄러운데, 그래도 어디서 추느냐보다 어떻게 추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비보이들이 출근하는 가라오케란 ‘술 파는 노래방’이다. 이곳은 노래방과 같은 구조로 만들어졌고, 방 크기는 노래방처럼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다양하다. 비보이들은 그 방의 작은 공간에서 춤을 춘다. 이곳은 내부시설이 좋은 데다 안주와 술이 일정량 제공되기 때문에 기본 이용료가 30만 원을 웃돈다. 손님은 여성과 남성 접대부에게 합석을 요구하거나 비보이가 포함된 공연 팀을 부른다.

한국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인기 덕에 1980년대에 브레이크댄스가 알려졌다. 그리고 1995년부터 소수가 브레이크댄스 붐을 일으키며 비보잉 기술을 춤으로 도입했는데, 이들이 바로 비보이 1세대다. 하지만 ‘서태지와 아이들’ 이주노, ‘R.ef’ 박철우, 비보이 크루 ‘서브웨이’ 등 비보이 1세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생계유지 등을 이유로 흩어졌다. 당시 댄서들은 일반 공연이 거의 없어 주로 밤무대에서 춤추며 생활비를 번 것으로 알려졌다.

비보이 1세대의 춤을 녹화했다가 수없이 되돌려 보면서 연습한 비보이 2세대, 즉 2000년대 초반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대다수가 비보이 활동을 접었고 안무가, 공연기획자, 강사, 교수 등으로 활동하면서 명맥을 이어가는 비보이는 5명도 되지 않는다. 현재 무슨 일을 하는지 밝힐 수 없다는 한 비보이(29)는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가족이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니 망설임 없이 춤을 접게 됐다. 비보이로 살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재산으로 얻었다”며 자신을 애써 위로했다. 그는 “선배들이 비보이 생활을 접고 말없이 사라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안다”고 밝혔다.

# 비보이 레전드 하나둘 사라져

비보이 2세대인 황대균(34) TIP 크루 팀장은 “외국 비보이는 40, 50세가 돼도 비보이대회 심사 등 관련 활동을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레전드(legend·전설)라 불리는 사람조차 설 자리가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14세부터 춤을 춘 그도 21~24세에는 가라오케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내고 사망했는데, 그 사고로 사람이 죽는 바람에 아들인 그가 피해보상금을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수준의 비보이가 밤무대에서 일한다고 손가락질받기도 했지만 가족을 살리는 것이 먼저였다. 이후 그는 젊은 시절을 그곳에서 보내는 데 회의를 느껴 그 일을 그만뒀다. 물론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수월하지 않았다.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10년차 비보이로서 실력과 인지도를 인정받아 한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대학이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자 ‘감사에서 교수 학력 검증을 실시하면 대학졸업장이 없는 교수는 문제가 된다’며 나를 해임했다. 그때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도 있었지만 전교 꼴찌를 도맡았던 내가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지금은 공연기획자로 활동하며 빅뱅, 박효신 등 가수의 콘서트 안무를 짜고 기업 행사도 만든다.”

이후 우후죽순 늘어난 비보이 3세대와 4세대도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언론으로부터 주목받지 못해서다. 그렇다면 비보이 수가 줄었거나 실력이 떨어진 것은 아닐까. 기자의 이런 의문에 대해 비보이 3세대인 라스트포원의 김진욱(29) 씨는 “비보이들은 전보다 더 많아졌고, 실력 또한 더 좋아졌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도 성적은 좋아서 세계대회에 나가면 1, 2등을 차지한다. 우리나라 예선만 통과하면 세계대회에서 우승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실력이 늘 좋으니까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특성상 방송이 안 되면 공연 섭외가 줄어들어 활동 폭이 좁아진다. 그래서 동료 대부분이 춤만으로 돈을 벌기가 쉽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한다.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나도 클럽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며 산다. 기회가 된다면 뮤지컬 안무, 방송 안무를 하면서 밥벌이를 하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 실력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

대한민국 ‘비보이 실종사건’

2011년 7월 서울 송파구에서 열린 R-16 KOREA 2011에 참가한 한 비보이가 개인 기네스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비보이 인기가 한풀 꺾인 이유에 대해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공연기획자로 활동하는 비보이 2세대 김근서(34) 원웨이크루 단장은 한곳에 관심이 몰렸다 금세 꺼지는 냄비문화와 기꺼이 비보이대회 관람비를 내는 미국, 일본 관객과 달리 공짜로 즐기려는 한국 관객의 미성숙한 문화를 탓하면서도 “비보이가 똑똑하지 못해 큰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많은 관심을 받았으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당시 우리는 공연 요청이 들어오면 개런티 받고 공연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때 우리가 돈 대신 비보이 리그전 같은 장기적인 카드를 제시했다면 비보이 문화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지금 상황은 비보이들이 자비를 들여 세계대회에 나가던 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사람들이 비보이가 뭔지 알게 됐다는 것, 단 하나다.”

이름을 밝힐 수 없다는 한 비보이는 비보잉이 공연예술문화로 자리잡지 못한 이유에 대해 “2005년 이후 한국에서 최초로 전문적인 힙합극이 생기면서 인지도를 쌓았지만, 이 과정에서 비보이들이 미성숙한 면모를 보여줘 투자자들이 우리와 함께 뮤지컬을 만드는 일을 꺼리게 됐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비보이가 흥행하면서 대중에게 더 다가갈 수 있는 문화상품인 뮤지컬을 만들었다. 비보이를 소재로 한 최초의 뮤지컬은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다. 그런데 이 작품과 관련해 저작권 침해사건이 발생했고, 2008년 대법원은 원작자 최윤엽에게 저작권이 있다고 판결했다. 이후 비보이들은 여러 뮤지컬을 만들었지만 투자자를 찾지 못해 공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비보이들이 법적분쟁이 아닌 뮤지컬을 발전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면 더 좋은 상품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한때는 공연 한 번에 팀당 400만~700만 원을 받던 비보이. 현재까지 활동하는 비보이들은 “세계무대에서 한국을 알렸다는 뭉클한 마음을 안은 채” 그때 번 돈을 연습실에 쏟아부으며 실력을 쌓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힙합정신, 즉 돈, 지식, 학벌, 권력에 절대 기죽지 않는 당당함으로 우리의 가능성을 믿고 끊임없이 도전하겠다”고 말한다.

임웅균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성악과 교수는 “세계적인 비보이들이 연습에 전념하지 못한 채 생계유지를 위해 밤무대에서 일하는 현실이 황당하다”며 이렇게 제안했다.

“자생적으로 생겨나 세계챔피언을 수십 명 배출한 비보이라는 문화 콘텐츠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 맨손으로 챔피언이 된 비보이라면 ‘난타’ ‘점프’보다 더 좋은 공연을 만들어내리라 확신한다. 비보잉이 공연예술로 자리잡으면 비보이는 힙합극의 연출가나 안무가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더욱 긍정적인 방향에서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세계 최고의 콘텐츠를 그냥 이렇게 방치할 수는 없다.”

참고도서 | 힙합, 새로운 예술의 탄생



주간동아 2012.07.09 845호 (p12~14)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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