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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길의 놀라운 편집의 힘

‘사랑해’ 사탕발림보다 ‘널 위해 왔다’가 낫다

캐치프레이즈 3원칙

  • 김용길 동아일보 편집부 기자 harrison@donga.com

‘사랑해’ 사탕발림보다 ‘널 위해 왔다’가 낫다

‘사랑해’ 사탕발림보다 ‘널 위해 왔다’가 낫다

경기 성남시 분당의 한 중학교 교실 모습.

요즘은 교회 목사님 설교를 인터넷으로 편하게 들을 수 있다. 주일 설교를 동영상이나 MP3로 쉽게 접할 수도 있다. 말씀을 전하는 성직자도 대부분 좋은 설교 제목을 구하려고 편집자처럼 고심한다고 한다.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보면 두 가지로 나뉜다. 내가 작성한 설교이니 내 눈높이에서 제목을 붙인 경우와 경청하는 신도의 눈높이를 배려해 제목을 붙인 경우다.

△생의 전도 △두려움의 극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진리의 성령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죄의 기원과 본질 △게으름은 죄악이다 같은 설교 제목은 추상적이고 밋밋하다. 30분 분량의 설교 내용을 미리 짐작할 수 없고 딱딱한 신앙적 당위성만 내걸었다.

△경제 문제가 사랑을 무너뜨릴 수 있다 △무례한 기독교와 공손한 기독교 △젊음의 강점을 100% 활용하는 삶 △고독은 기도를 만나야 창조적으로 된다 △가장 힘든 시간이 큰 기적을 이루는 시작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전달돼야 가치가 있다 같은 설교 제목은 콘텐츠의 핵심을 잘 잡아 설득력을 발휘한다. 붕 뜬 주제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고민과 딜레마를 다뤄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설교는 신도를 대상으로 한 영적 커뮤니케이션 행위다. 청중이 더 쉽게 감동할 수 있도록 설교 제목도 소통 능력을 갖춰야 한다.

최근 여러 학교 본관에 내걸린 캐치프레이즈 간판을 살펴봤다. 하나같이 관료주의적이다. 학교를 관리하는 교육청의 훈육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학생을 철저히 대상화했다. 교육 현장이 여전히 교육서비스의 수요자가 아닌 공급자 위주로 움직인다. △21세기를 선도하는 자율 창의 도덕적인 인간육성(서울 가중학교) △자율적-창의적-도덕적 인간교육(서울 나중학교) △실력과 인성을 갖춘 창의적 인재 육성(서울 다중학교) 등이다. 매일 교정을 오가는 수백, 수천 명 학생의 관점이 아니라, 수십 명 선생님을 대상으로 한 판에 박은 교육지침일 뿐이다.

조금 나아 보이는 캐치프레이즈를 몇몇 학교에서 봤다. △깨어나자 도전하자 ○○○인(서울 라고등학교) △오늘도 세계를 주름잡기 위하여(지방 마고등학교) △심오한 사고, 정확한 판단, 과감한 실천(지방 바고등학교) △ 인격과 지성의 만남, ○○고(지방 사고등학교) 등이다. 완벽하진 않지만 학생 중심의 관점이 살아났다.



아래 사진은 경기 성남시 분당의 한 중학교 3학년 교실 모습이다. 이 학교는 교훈과 급훈이 따로 없다. 한 반 20여 명의 학생이 자율적으로 반 캐치프레이즈를 의논해 교실에 내걸었다고 한다. 교실 천장에 일방 직진 금지 표시가 걸렸고, 그 옆에 ‘앞만 보고 달리지 마세요. 어디를 가고 있는지는 알아야죠’라는 문구가 보인다. 무한경쟁 시대에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해보자는 취지를 담았다. 곡선보다 지름길인 직선만 선호하는 세태지만, 빠른 삶보다 먼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알아본 다음 전진하자는 의미라고 한다. 어린 학생의 때 묻지 않은 생각을 담은 멋진 캐치프레이즈다.

모 기업의 캐치프레이즈는 ‘최고의 고객가치를 지향하는 ○○○’이다. 요즘 고객 만족을 중시하지 않는 기업이 있을까. 너무도 당연한 내용을 목표로 내걸었다. 있으나 마나 한 구호다. 지인 중 한 중년 여성은 중학교 1학년 때 급훈을 아직 잊지 못한다. ‘소녀들이여, 야망을 가져라’였다. 모두가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고 할 때 중학교 1학년 여학생들이 스스로 궁리한 급훈이라고 한다. 이처럼 개성 넘친 캐치프레이즈는 평생을 간다.

호소력 짙은 캐치프레이즈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구성원의 눈높이로 만들어야 한다. 둘째, 추상적인 단어를 쓰지 말고 구체적인 메시지를 제시해야 한다. 추상적인 것은 책임 회피다. 사람 마음은 구체적 단어에 의해 움직인다. “사랑해”보다 “널 위해 달려왔어”가 백번 낫다. 셋째, 자기 조직만의 고유문화를 드러내야 한다. 독창성에 치우쳐 낯선 개념이 들어와선 안 된다. 고유한 동질성은 공감대를 넓히고 정서적 유대감을 준다. 캐치프레이즈의 본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전체를 위한 서비스다.



주간동아 2011.11.07 811호 (p61~61)

김용길 동아일보 편집부 기자 harri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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