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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방

일본 속 고구려혼 숨 쉬는 ‘고마신사’

사이타마縣 히다카市 곳곳에 고구려 흔적 … 한일 학자들 ‘학술대회’ 통해 역사 연구

일본 속 고구려혼 숨 쉬는 ‘고마신사’

일본 속 고구려혼 숨 쉬는 ‘고마신사’

고구려인 약광을 모신 일본 히다카시의 고마(高麗)신사.

일본 도쿄 서쪽에 있는 사이타마(埼玉)현 히다카(日高)시에선 쉽게 ‘고려(高麗)’를 만날 수 있다. 고려천(川), 고려산, 고려치(峙·고개), 고려향(鄕), 고려역, 고려신사, 고려소학교, 일본식 김치찌개인 ‘고려과(鍋, 일본 발음은 ‘나베’)…. 곳곳엔 2016년을 목표로 한 ‘고려군(郡) 건군(建郡) 1300주년 기념’ 사업 포스터가 붙었고, 10월 16일엔 제1회 고려왕배 국제기사(騎射)대회를 열었다. 히다카시가 고려로 도배한 이유는 ‘약광(若光)’이라는 인물 때문이다.

사신으로 왔다 주저앉은 약광

중국과 일본 역사서는 5세기 무렵부터 고구려를 고려로 적었다.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는 고려가 멸망 2년 전인 666년 10월 약광을 일본 야마토(大和) 조정에 사신으로 보내왔다고 밝혔다. 또 다른 역사서인 ‘속일본기’는 703년 4월 야마토 조정은 ‘종5위하(從五位下)’라는 벼슬을 하던 약광에게 ‘왕(王)’이라는 성을 하사했다고 적어놓았다.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약광이 일본에 주저앉아, 그나 그의 아들이 야마토 정권에서 벼슬을 한 것으로 본다.

‘속일본기’는 716년 5월, 야마토 조정이 도쿄 주변 일곱 개 지역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던 고구려인 1799명을 재배치 차원에서 이곳으로 모아 ‘고려군(郡)’을 만들고, 약광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고 적었다. 기록대로라면 약광은 사신으로 온 때로부터 37년이 지나 왕씨 성을 받고 50년이 지나 고려군 수장이 됐으니, 왕씨 약광과 수장 약광은 사신 약광의 아들이나 손자일 가능성이 있다. 고려인은 철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 고려군이 번창할 수 있었다. 수장 약광이 죽자 이들은 그를 ‘고려명신(明神)’으로 모시는 ‘고려신사’를 지었다.

일본 속 고구려혼 숨 쉬는 ‘고마신사’

고마신사의 현판. 오른쪽 ‘고구려신사’ 현판은 조중응이 쓴 것이다.

고려군은 1180년간 지속되다 1896년 이웃한 이루마(入間)군이 병합했다. 하지만 고려에 대한 향수가 강해 도처에 고려라는 이름을 부활시켰다. 지금은 지역 경계의 변경으로 이루마군에 인접한 히다카시가 고려군을 품어서, ‘고려군 건군 1300주년’ 기념행사를 히다카시가 준비했다. 이러한 전통의 한복판에 고려신사가 있다. 신사를 지키게 된 약광의 후손은 ‘고려’라는 성을 쓴다. 시조 약광으로부터 26세손까지는 고려인끼리만 결혼하는 족내혼(族內婚)을 하다가 27세손부터 비(非)고려인과 결혼했다고 한다.



현대 일본어는 고려(高麗)를 ‘고우라이’라고 읽는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만은 철저히 ‘고마’로 발음한다. ‘高麗神社’는 ‘고마신사’(일본 발음은 고마진자), ‘高麗川’은 ‘고마천’(고마가와)로 읽는 식이다. 고마는 곰(熊·웅)을 뜻하는 일본어 ‘쿠마’와 비슷하기에 학자들은 고구려족은 곰을 숭배했던 것으로 본다. 환웅과 혼인해 단군을 낳은 웅녀(熊女)를 배출한 족으로 보는 것이다. 곰은 환웅과 결혼하려고 호랑이를 상대로 마늘과 쑥을 먹는 수행(修行) 경쟁을 해 승리했다. 그렇다면 곰족과 호랑이족은 갈등관계일 수 있다.

이를 보여주는 간접 증거가 중국 지안(集安)에서 발견한 고구려 무용총 벽화다. 이 벽화는 말을 탄 궁수(弓手)가 화살로 사슴과 호랑이를 잡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곰을 잡는 모습은 어떤 고구려 벽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부여족은 주요 부족을 마가(馬加·말), 우가(牛加·소), 저가(猪加·돼지) 등으로 불렀다. 고대에는 짐승 명칭으로 부족을 구분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곰족은 충분히 존재했을 수 있다.

‘현대의 약광’ 故 윤병도 선생

일본에 단군상 세우고, 무궁화 심고 한국의 얼 알려


일본 속 고구려혼 숨 쉬는 ‘고마신사’

고구려인 약광을 모신 고려왕묘.

고마신사 옆에 있는 야트막한 고마산(高麗山)에 있는 절 ‘성천원(聖天院)’에 한국 위인상이 서 있다면 믿겠는가. 성천원 왼쪽 뒤편에는 지난해 타계한 재일교포 사업가 윤병도(尹炳道) 씨가 일제강점기 36년을 상징해 36층으로 만든 ‘재일한민족무연지령탑(無緣之靈塔)’이 서 있으며, 그 주위에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신라의 태종무열왕, 백제의 왕인 박사, 고려의 정몽주, 조선의 신사임당 상을 세워놓았다. 전체를 조망하는 고지(高地)엔 무궁화동산을 조성하고 단군상을 모셨다.

일본 속 고구려혼 숨 쉬는 ‘고마신사’

일제강점기 36년을 상징해 36층으로 만든 재일한민족무연지령탑(왼쪽)과 무궁화동산 뒤에 있는 단군상. 모두 고(故) 윤병도 씨가 세웠다.

생전에 윤씨는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렸다고 한다. 그를 만난 언론인은 박춘광 거제타임스 대표 정도인데, 박 대표는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거제도 출신인 윤 선생은 사이타마현에 살면서 무궁화 보급과 한국얼 전파에 주력했기에 일본 우익의 위협을 받았다. 이 때문에 매우 겸손하게 살면서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렸다. 건설업으로 번 돈으로 퇴락한 사찰을 구입해 성천원을 짓고 일본 스님에게 시주했기에, 절 뒤에 그런 시설을 만들 수 있었다.”

성천원은 약광의 3남인 성운(聖雲)이 세운 승낙사(勝樂寺)를 이은 곳이라 약광을 모신 ‘고려왕묘(高麗王廟)’라는 사당도 품고 있다. 이 사당 안에는 가야의 어머니인 김해 허왕후를 모신 파사석탑 같은 탑이 있고, 사당 앞에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한자로 ‘고구려약광왕릉’이라고 쓴 글을 새긴 비석이 서 있다. 이 비석을 세운 이도 윤씨다. 자비를 들여 일본 속의 한국을 구현해낸 윤씨는 현대의 약광인지도 모른다.


신사 곳곳에 고구려 벽화 그림 걸어

신사 주인을 ‘궁사(宮司)’라고 한다. 고마는 귀한 명칭이기에 약광 후손은 궁사가 되는 집안만 ‘고마’를 성으로 쓰고, 방계는 다른 성을 사용했다. 고마 집안은 한 번도 양자를 들이지 않은 채 60대를 이어왔다고 한다. 현재의 궁사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 씨는 “아들도 궁사를 하게 되느냐?”라는 질문에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모르겠다”며 웃었다.

고마신사는 고구려의 핏줄을 이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신사 곳곳에 무용총을 비롯한 고구려 무덤 벽화를 걸어놓았다. 복잡한 한일관계 때문에 쉬쉬해서 그렇지, 한일 양국의 유력 인사는 일찌감치 고마신사와 고구려 관계를 알았다. 고마신사의 현판은 전부 ‘高麗神社’로 썼는데, 딱 하나만 ‘高句麗神社’로 썼다. 하지만 ‘句’자는 작게 써놓았다. 이 현판은 조선 말과 대일항쟁기 때 친일했다고 평가받는 조중응(趙重應)이 쓴 것이다. 순종의 아들인 영친왕 이은 공과 부인 이방자 여사는 기념식수를 했고, 7대 조선총독인 미나미 지로(南次郞) 육군 대장은 이곳에 비석을 세워놓았다.

고마신사에 대한 유력 한국인의 관심은 광복 후에도 이어졌다. 주일대사를 지낸 오재희, 김태지, 권철현, 그리고 맨손으로 소뿔을 부러뜨리며 ‘대산배달(大山 培達)’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주름잡았던 극진(極眞) 가라테 창시자 최영의, 박정희 정권 시절의 풍운아 이후락, 전 공보부 장관 오재경, 5공 시절을 풍미한 황영시 등 숱한 인사가 이곳을 방문하고 시주한 흔적을 남겼다.

일본 유력 인사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곳에서 빌면 이뤄지는 것이 많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는 1976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를 구속해 명성을 떨쳤다. 다나카와 일전을 벌이기 전 도쿄지검 특수부 검사들은 고마신자를 참배해 ‘다나카를 잡는다’는 결의를 다졌다. 지난해 도쿄지검 특수부는 정계의 막후 실력자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朗) 민주당 간사장과 일전을 벌여 실각시켰는데, 오자와와 싸움을 하기 전에도 역시 고마신사를 단체로 참배했다.

이러한 명성 덕분에 고마신사는 연간 40만 명이 찾는 유명 신사가 됐지만, 보통의 한국인은 고마신사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 중국이 고구려를 그들의 역사로 편입하는 동북공정을 펼치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중국의 소수민족인 묘족(苗族)을 고구려 유민으로 본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김인희 지음)이라는 책이 나왔다. 태국의 소수민족인 라후족이 고구려 유민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묘족과 라후족은 고구려 유민이라는 자료가 없지만, 고마 가문은 고구려인이라는 명백한 사료가 있다. 그러나 고마 후미야스 등 고마 가문 사람은 고구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접근해가던 양측이 접점을 찾아냈다. 10월 15일 한일 학자들이 고마신사에 모여 일본 속의 고구려를 찾는 ‘일본과 고구려’라는 제목의 학술대회를 가진 것이다. 이 대회에서 이성규 단국대 몽골학 교수는 몽골 사례를 원용해 흥미로운 발표를 했다.

“‘삼국사기’에는 해모수와 통한 유화부인이 낳은 알을 동부여의 금와왕이 개와 돼지에게 줘도 먹지 않았다고 적혀 있는데, 여기서의 개와 돼지는 ‘구가’와 ‘저가’ 부족일 수 있다.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기에 금와왕은 물론이고, 구가와 저가부족도 감히 해치지 못해 떠민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 후 “고구려는 곰 토템신앙을 가졌기에 일본에서는 ‘高麗’를 ‘고마’라고 불렀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일본 속 고구려혼 숨 쉬는 ‘고마신사’

활로 사슴과 호랑이를 쏘는 고구려 기마 무사를 그린 무용총 벽화. 2016년 고마군 창군 1300주년을 준비하기 위해 히다카시가 만든 포스터. 고마 후미야스 궁사(왼쪽부터).

마스코트 이름은 ‘도라이’

3국시대의 고구려, 신라, 백제는 일본으로 진출해 현지 세력, 그들보다 먼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들어간 세력과 어울려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 한반도가 큰 전쟁을 겪은 뒤 신라로 통일되자, 이들은 여타 세력과 연합해 갈등하는 2차전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일본 유력 세력은 3국인을 재배치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마군과 고마신사가 생겼다.

일본의 오래된 신사 중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관련된 이야기를 품은 곳이 적지 않다. 이러한 곳을 뒤져 고구려 역사를 찾아내는 것은 괜찮은 동북공정 대응법이 될 수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한국 드라마 ‘주몽’ ‘바람의 나라’ ‘태왕사신기’ ‘광개토대왕’ ‘연개소문’ ‘대조영’이 연속으로 방송돼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히다카시가 자신 있게 고려군 건군 13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히다카시는 고마군 건군 1300주년의 마스코트 이름을 ‘도라이’라고 정했는데, 도라이는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渡來人, 일본 발음은 ‘도라이진’)에서 따온 것이다. 고구려 열풍을 활용해 일본에 숨은 고구려 등 우리의 고대사를 찾아내는 노력을 본격화해야 하지 않을까.

고마왕배 국제기사대회

무용총 벽화에서 부활한 고구려 기사(騎射)…한국인 무사 두각


일본 속 고구려혼 숨 쉬는 ‘고마신사’

정문헌 세계기사연맹 총재.

“하잇, 하잇, 하.”

무용총 벽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기마(騎馬) 무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순식간에 과녁에 꽂히자 관객석에서는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무사를 태운 말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활시위의 힘이 무척 센 듯, 과녁에 꽂힌 화살은, 점수를 확인하러 달려간 남자 심판이 힘껏 잡아당겨도 잘 빠지지 않았다. 무사들은 말을 달리며 창으로 표적을 찌르고, 편곤(鞭棍)으로 표적을 쓰러뜨리는 마상 무예도 보여줬다.

일본 속 고구려혼 숨 쉬는 ‘고마신사’

전속력으로 말을 몰면서 활을 쏘는 한국의 기마 무사. 고구려 무용총 벽화를 재연한 모습이다.

안동 하회마을처럼 고마천이 휘돌아가는 히다카시의 ‘긴차쿠다(巾着田)’에서 10월 16일 고구려 무사 복장을 한 한일 무사들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제1회 고마(高麗)왕배 국제기사(騎射)대회를 가졌다. 무사는 고삐를 놓은 채 양손으로 활과 화살을 잡고 쏴야 한다. 넓적다리 힘으로 말을 제어하면서 화살을 날려야 하기에 실수하면 바로 말에서 튕겨나간다. 연속사(連續射) 때는 몸을 돌려서도 쏴야 하니 더 위험하다.

이 행사는 고마신사가 주최한 것이라 ‘고마왕배’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모든 행사는 정문헌 총재, 김영섭 회장이 이끄는 세계기사연맹이 주도한다. 기사무예는 거의 모든 나라가 구사했지만, 현대에 부활시킨 나라는 드물다. ‘유목의 나라’ 몽골에서도 사라졌다. 한국은 고구려 무용총 벽화와 ‘무예도보통지’ 같은 무술서가 남아 있어 제대로 복원했다. 세계기사연맹은 고구려 기사를 세계 표준으로 삼고, 여러 나라에서 돌아가며 대회를 연다.

히다카시는 ‘고려군 건군 13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면서 이 대회를 유치했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입상은 모두 한국인 무사에게 돌아갔다. 고마신사와 히다카시는 고마군 창군 1300주년이 올 때까지 매년 이 대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이 대회를 지켜본 복기대 뇌교육대학원 고고학 교수는 “왜 한일 문제가 독도에만 집중돼야 하는가. 양국 정상이 히다카시에서 정상회담을 한다면 고구려에 대한 양국의 관심이 높아져, 동북공정에 공동 대응하는 방안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간동아 2011.10.24 809호 (p24~27)

  • 이정훈 전문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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