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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한국형 영어시험 우물 안 개구리?

문법 위주 문제 국제 공인 미지수…예산만 낭비하고 비웃음 살라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박하정 인턴기자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

한국형 영어시험 우물 안 개구리?

한국형 영어시험 우물 안 개구리?
대학생 정혜진(21) 씨는 얼마 전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하려고 토플 시험을 봤다. 가려는 대학에서 토플 점수만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플 1회 응시비용이 170달러(약 18만 원)나 되다 보니 부담이 컸다. 시험을 볼 때마다 압박감마저 느껴졌다. 정씨는 “비용이 비싼 데다 그나마 응시 기회도 적으니 자연스레 학원을 찾게 된다”고 말했다.

그동안 미국 ETS에서 주관하는 토플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2007년에는 국내 토플 응시자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접수 사이트가 일주일 넘게 마비됐다. 이 과정에서 ETS가 뒤늦게 한국을 당월 신청 대상국에서 제외해 급하게 토플 시험을 봐야 했던 학생들은 동남아 등지로 출국하기도 했다. 2008년 9월에는 토플 시험 도중 서버가 다운돼 시험이 중단된 일도 있었다.

해외 영어시험 주관사의 횡포가 싫다면 그 시험에 응시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현실은 말처럼 쉽지 않다. 현재 한국에는 민간자격 국가공인제도에 포함된 영어 관련 시험 및 자격증만 해도 8개에 이른다. 서울대학교 발전기금 텝스(TEPS)관리위원회에서 주관하는 텝스, 한국외국어평가원에서 주관하는 펠트(PELT),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주관하는 플렉스(FLEX)가 대표적이다.

민간 주도 영어시험 공신력 부족

이들 시험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공신력이 부족하다는 것. 펠트를 주관하는 한국외국어평가원 이상덕 이사장은 “영어권 국가에선 비영어권 국가가 만든 영어시험을 인정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어 국제 공인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서 “일단 비영어권 국가에 시험을 수출하고 공인받기 위해 베트남 등 각국에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신력이 부족하다 보니, 시험에 응시해 고득점을 올리거나 자격증을 취득해도 영어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시험이 지나치게 ‘한국형’인 점도 이들 시험의 또 다른 단점이다. 영국에서 8년간 거주했다는 대학생 김영익(23) 씨는 “텝스의 경우 문법 위주, 단순 찍기 형태의 전형적인 한국식 영어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말하기나 쓰기 영역 평가가 없어 종합적인 분석력이나 사고력을 측정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상황이 이렇자 정부가 국가공인 영어시험제도 마련에 나섰다. 2008년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는 “해외 영어시험인 토익이나 토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학생들의 영어 의사소통 능력 신장을 위해 새로운 국가영어능력평가(NEAT)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2년여의 연구개발 끝에 현재 모의시험을 진행 중이며, 2012년 하반기에 정식으로 도입할 예정이다. 앞으로 1년여가 남은 셈.

국가영어능력평가는 1·2·3급 총 3개 급으로 구성된다. 1급은 각 직업에서 공통적으로 필요한 기본적인 영어 의사소통 능력을 평가하며 성인을 대상으로 한다. 2·3급은 각각 기초학술영어와 실용영어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대상은 고등학생. 국가영어능력평가 1급 시험 개발에 참여한 고려대 김기호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일선 학교에서 말하기, 쓰기는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에 나오지 않으니 교과서에 있어도 건너뛰곤 하는데, 국가영어능력평가의 도입으로 말하기와 쓰기까지 포괄하는 공교육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가영어능력평가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먼저 다른 민간 영어시험처럼 자칫 국내용으로 전락해 외면당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토익을 공부하는 이동현(28) 씨는 “국가가 만드는 시험인 만큼 국내 기업에선 대부분 인정하겠지만, 외국 기업에서는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외국 유학을 준비하거나 교환학생을 지원할 때 토익, 토플 대신 국가영어능력평가 점수를 제출할 수 없다면 교과부가 시험 개발 초기에 언급했던 ‘해외 시험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라는 목표가 무색해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 국가영어능력평가의 국제 공인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다. 교과부조차 “시험이 개발과정에 있는 만큼, 국제적으로 공신력을 얻기 위해 나서기보다 국내에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는 반응. “많은 사람이 국가영어능력평가에 응시할수록 자연스레 공신력이 높아지지 않겠느냐”는 게 교과부 측 주장이다. 오석환 영어교육정책과장은 “2014년 경찰청이 순경 채용시험에 영어과목을 국가영어능력평가로 대체한다고 밝힌 것처럼 시험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공공 분야, 민간 분야에서 이를 많이 채택하도록 적극 홍보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형 영어시험 우물 안 개구리?

2012년에 도입되는 국가영어능력평가는 영어 읽기와 듣기는 물론이고 쓰기와 말하기도 평가한다.

국가영어능력평가가 국내용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의 근거는 또 있다. 토익과 토플처럼 국가영어능력평가가 국제 공신력을 가지려면, 영어권 국가에 오랜 기간 살았거나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을 대상으로 모의시험을 집중적으로 진행해 문제점을 발견하고 고쳐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교과부는 7월 30일부터 시행되는 1급 모의고사 참가대상을 신청자 선착순이라고만 밝혔을 뿐 나머지 조건은 한정하지 않았다. 대학생 김혜수(24) 씨는 “시험 개발에 주도적으로 참가하는 이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이가 아니고, 모의시험을 치는 대상도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느 영어권 국가가 이를 영어능력평가라고 인정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정부 나섰지만 실효성은 ‘글쎄요’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국가영어능력평가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내년 하반기에 수능 외국어영역을 이 평가로 대체하는 방안이 최종 결정되면, 학생들은 시험에 응시할 상당한 유인을 갖게 될 전망이다. 그럴 경우 지금 중학교 2학년 학생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2015년부터 이 시험을 치른다. 그러나 국가영어능력평가에서 요구하는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 영역을 공교육만으로 제대로 대비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학교를사랑하는학부모모임’ 최미숙 대표는 “2012년부터 국가영어능력평가를 본격 시행한다고 하면 그동안 아이들이 어디에서 준비해 시험을 봐야 하는지가 문제”라며 “결국 학생들은 사교육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 사교육 업체들은 국가영어능력평가 대비반을 운영하거나 특강을 개설하는 등 벌써부터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인다.

이에 교과부는 사교육 우려가 기우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오 과장은 “기존의 사교육은 수능 같은 입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일반 학원에서는 말하기와 쓰기 교육까지 감당할 시설 및 여건을 갖추지 못할 것이다. 공교육 내에서 국가영어능력평가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교과부는 2013년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을, 2014년 초등학교 교과과정을 개정해 학생이 직접 영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마련한다는 복안이다.

하지만 이 평가가 다른 국내 민간 평가처럼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외면받는다면 막대한 피해와 부작용이 예상된다. 먼저 평가시험 개발에 투입한 수백억 원의 예산이 공중 분해될 가능성이 있다. 정부는 국가영어능력평가 개발에 2008년 28억, 2009년 20억, 2010년 45억, 2011년 83억 등 총 176억 원의 예산을 4년에 걸쳐 투입했다. 더욱이 국내 기업과 기관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 평가를 입사시험 척도로 사용한다 해도 영어권 국가에서 공신력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 정부의 국가신인도는 바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학생 홍혜영(20) 씨는 “국가가 나섰는데도 한국은 제대로 된 영어능력평가 하나 못 만든다며 웃음거리가 될 우려가 높다”고 지적했다.



주간동아 797호 (p40~41)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박하정 인턴기자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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