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6

2010.07.19

Neverending SPY

美·러 ‘슈베하트’의 스파이 맞교환 인적 네트워크 통한 정보수집 여전히 치열

  • 주성민 군사전문 자유기고가 bluejays@kebi.com

    입력2010-07-19 16: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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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verending SPY
    일본 주재 소련대사관 기밀실에서 나오던 검정양복 차림의 남자가 암호담당관과 마주쳤다.

    “백화점에 가봐야겠어. 내일이 귀국하는 날이잖아.”

    서류뭉치를 잔뜩 껴안은 암호담당관은 웃으며 대꾸했다.

    “좋은 걸로 많이 사게나, 유리.”

    동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유리는 대사관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리고 대략 1시간 후, 백화점에서 산 선물을 양손에 들고 나온 그는 미군 전용버스가 다가오자 망설임 없이 올라탔다. 금세 버스는 속도를 높였고, 그는 일본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소련대사관은 그가 미군 정보기관에 납치된 것으로 판단해 도쿄경시청에 수색을 요청했다.



    다음 날 유리는 미국 워싱턴의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소련 2등 서기관 유리는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했고, 자신은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해 일본에서 스파이 활동을 한 정보부 소속 군인이라고 폭로했다.

    “일본은 소련 정보부의 포섭활동과 공작이 아주 활발한 곳입니다. 여러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는 소련에 포섭당해 돈을 받고 정보를 제공하던 일본 고위 관리들의 명단을 공개했다. 일본 공안부는 외무성 사무차관과 국제협력국, 구미국의 간부들을 체포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조사받던 중 자살했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

    유리 라스트보로프(Yuri rastvorov)는 소련 육군정보부의 중령이었으며 스파이였다. 그는 미군이 단골로 다니는 테니스클럽 회원이었고, 미군클럽과 나이트클럽에서 저녁시간을 보내며 미군 장교들과 친하게 지냈다. 매력적인 외모에 천부적인 사교술이 있던 그는 미군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으며 정보를 수집해 본부의 인정을 받았다.

    다음 타깃은 미군 준장이었다. 장군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던 유리는 그의 아내가 자신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적절한 기회였다. 장군의 아내를 통해 정보를 빼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드러내 그녀와 남다른 관계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이름은 엘라였으며 상당히 아름답고 지적이었다.

    엘라를 유혹한 유리는 임무수행을 위해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유리에게 헌신적이었고 그의 요청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조국의 지령을 받아 가짜 사랑을 하며 밀회를 거듭해왔으나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

    그는 귀국날짜가 잡혀 있었다. 소련에선 스탈린이 사망하자 비밀경찰의 총수이며 그의 보스인 베리아가 정치국에 체포됐다. 흐루시초프는 베리아를 처형했고, 귀국하면 자신도 비슷한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의 고백을 통해 신분과 처지를 짐작하고 있던 엘라가 애원했다.

    “유리, 돌아가지 마세요. 만일 나와의 관계가 발각되면 큰일 날지도 몰라요.”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설득하자 사랑에 빠진 스파이는 한숨만 내쉬었다.

    “나하고 미국으로 도망가요. 망명은 내가 주선해볼게요.”

    Neverending SPY

    러시아 스파이 사건을 심리하는 미국 뉴욕 맨해튼 연방법원의 법정 스케치. 그림 왼쪽의 판사 앞에 피고인들이 앉아 있다.

    귀국을 하루 앞둔 1954년 1월 24일, 그는 애인과 함께 일본에서 탈출했다. 유리가 미국으로 망명한 뒤 시간이 흐르자 숨겨졌던 사실 한 가지가 밝혀졌다. 엘라가 CIA의 공작원이었던 것. 그녀는 처음부터 유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며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접근했다. 그녀 자신이 ‘미인계’였다. 유리는 그녀의 지능적인 계략에 말려들어 오히려 역이용당하고 있었다. 그녀가 유리를 사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알려진 게 없다.

    6·25전쟁 때 소련군 정보부는 포로가 된 미군들을 비밀리에 소련으로 이송한 적이 있다. 이 사실은 전향한 소련 고위 스파이가 1955년 확인해주었고, 비공개로 존재해오던 비밀문서는 AP통신의 요청으로 1996년 공개됐다. 이 스파이가 유리였다.

    냉전 이후 러시아 스파이들은 사망자의 신원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미국 사회에 스며들어 수년에서 길게는 20여 년간 정보 수집을 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오래전부터 이들을 추적해왔다. 2010년 6월 27일 밤, 미국 전역에서 검거에 들어가 10명을 체포했다. 냉전 이후 최대의 스파이 검거작전이었다.

    영화를 보듯 전격작전

    체포된 스파이 중에는 애나 채프먼이란 미모의 젊은 여인이 있었고, 미국 언론들은 ‘미녀 스파이’란 타이틀을 내세워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미인계는 자주 활용되는 고전적이고 효과적인 수법이다. 미녀 스파이와 미인계라는 자극적인 요소 때문에 전 세계 언론도 표지기사로 다루었고, 그중에서도 영국 ‘텔레그래프’의 헤드라인이 가장 원색적이었다.

    ‘The Spy Who Loved Me’

    미 중앙정보부(CIA)와 러시아 해외정보국(SVR)은 스파이 교환과 대상자를 타협했다. 오스트리아에서 7월 9일, CIA의 전세기와 러시아 비상계획부 소속 항공기가 ‘슈베하트’라고 불리는 빈 국제공항에 수분 간격을 두고 착륙했다.

    CIA는 10명의 러시아 스파이를 풀어주고 4명의 러시아인을 넘겨받았다. 4명은 CIA에 포섭돼 협력하던 러시아군 정보장교, 해외정보국 요원, 전 KGB 요원 그리고 핵물리학자였다. 이들은 조국 러시아를 사랑하지만 체제에는 반대하던 사람들이다.

    각국의 애국자를 옮겨 태운 두 대의 ‘스파이 전용기’가 공항을 이륙하면서 최대의 검거작전은 최대의 맞교환작전으로 마감됐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한 편의 스파이 영화를 보는 것처럼 드라마틱했다.

    핵물리학자 이고르 수티야긴은 핵잠수함의 군사기밀을 CIA에 넘겼다가 발각돼 2004년 15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시베리아 감옥에 6년간 갇혀 있던 그가 갑자기 모스크바로 이감된 날짜는 미국에서 스파이들이 체포된 날과 거의 일치한다. 이런 정황을 따져볼 때, 스파이 교환은 오래전부터 양쪽 정보기관이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비에트연방도 분해돼 스파이들은 모두 용도폐기된 것처럼 보였으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스파이의 첩보전쟁은 냉전 이후에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강대국은 스파이항공기와 스파이위성으로 정보를 수집하지만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수집을 대체할 체계는 없다. 따라서 냉전은 종식됐어도 인류가 만들어낸 대립의 역사가 종료되지 않는 한 스파이 게임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최초의 스파이 교환은 1962년 2월 10일 독일의 글리니케 다리에서 이루어졌다. 소련에서 격추된 스파이항공기 조종사 프랜시스 파워TM과 KGB 대령 루돌프 아벨이 다리 위에서 교환됐다.

    아벨은 1947년 미국에 침투해 소련 스파이 네트워크를 총지휘했으나 부하가 정치적 망명을 하면서 신분이 탄로나 FBI에 체포됐다. 신문 과정에서 그는 묵비권을 내세워 비밀을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조국에 충성스러운 인물이었다. 소련으로 돌아간 그는 KGB 본부로 복귀시켜달라고 했으나 거부당했다. 미국의 감옥에 있었다는 이유로 KGB는 그의 충성심을 의심했던 것이다.

    소련체제에 저항한 정보장교

    아벨은 미국에 있을 때 럭키 스트라이크를 하루 두 갑이나 피우던 체인 스모커였다. 조국으로 돌아간 그에게 레닌훈장을 주고 그가 즐기던 럭키 스트라이크를 날마다 세 갑씩 지급한 것이 영웅에 대한 예우의 전부였다. 그는 예전의 동료들과 어울리고 싶어 KGB 본부 부근의 단골 찻집을 찾아 시간을 보내며 말년을 지내야 했다.

    소련군 참모본부 정보총국(GRU)의 펜코프스키 대령은 체제에 환멸을 느꼈다. 터키 앙카라 소련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인도 주재관 파견근무를 지원했다. 그 자리는 군정보부 요원만 가능했고 그의 파견이 결정됐으나 KGB에서 부적합 판정을 내려 희망은 좌절됐다. 그 후 GRU의 군사외교학교에서 주임교관으로 근무하며 장군 진급을 기다렸지만 역시 KGB가 걸고넘어져 직위에서 해제됐다.

    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KGB와 소련체제에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대령은 1960년 8월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과 접촉을 시도했고 4개월 뒤 런던으로 날아갔다. 서유럽의 레이더와 통신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소련 무역대표단의 보안담당 책임자 자격으로 간 것이다.

    숙소인 호텔에서 그는 CIA 요원과 은밀히 접촉해 일일이 손으로 옮겨 적은 80쪽의 극비문서를 건넸다. 문서에는 미국이 손에 넣고 싶었던 소련의 최신형 지대공 미사일 SA-2의 상세한 극비자료와 SS-1, SS-6 등 중거리와 장거리 미사일에 대한 특급정보가 적혀 있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대령은 본격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군 정보부 고급요원이란 신분을 이용해 무수한 극비 정보를 빼내 CIA에서 지급받은 초소형 카메라로 촬영한 뒤 필름은 비밀연락책에게 전달했다. 그가 2년간 미국에 넘겨준 정보의 양이 엄청나다. 소련 정보기관의 세밀한 구조와 인력배치 현황, 서유럽에 파견된 암살반과 파괴공작반의 활동자료와 그들의 연락처, 신분을 위장한 채 임무수행 중인 300여 명의 KGB와 GRU 소속 스파이의 개인자료 등이었다.

    이 밖에도 그가 미국에 넘긴 극비정보는 소련 공군의 모스크바 방위사령부와 미사일 부대의 화력자료와 소련군 야전 매뉴얼, 전술 지대지 탄도미사일, 장갑차, T-55와 T-62 탱크의 자료 등 한 개인이 빼내기엔 벅찰 정도의 분량이었다. 대령은 모스크바 지역의 전략시설에 대한 극비자료를 넘기며 유사시에는 핵무기로 한 번에 다 날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의 스파이 작업은 너무 위험했고 행적을 의심한 KGB의 감시에 걸려 1962년 10월 체포됐다. 이듬해 5월, 그는 차가운 감방에서 형장으로 끌려나왔다. 반년 만에 부드러운 맨땅을 밟고 선 그는 5월의 찬란한 햇살에 눈이 부셨다. 이제 다시는 못 느낄 정경이었다. 미풍에 날린 꽃냄새가 희망처럼 휘날리던 계절에 올레크 펜코프스키 대령은 총살형이 집행돼 자신이 선택한 스파이의 생을 마감했다.

    돈을 좀 벌어볼 생각에 조국을 소련에 판 남자도 있다. 버지니아 노포크의 대서양 함대사령부에서 준위로 근무하던 존 워커. 수입을 늘리고 싶어 부업으로 술집을 했으나 본전마저 날리자 이런 일을 저질렀다.

    그는 해군의 일급비밀인 암호해독기의 기술 자료를 복사해 겹겹의 보안시설을 통과했다. 암호해독기는 국가안보국(NSA)이 제작한 것으로, 전 세계 미 해군의 모든 기밀전문을 타전하고 받는 첨단장비였다. 슈퍼 컴퓨터가 거의 무한대의 암호를 계속 만들어내는 이 장비는 똑같은 기계를 만들지 않는 한 해독은 불가능했다.

    1967년 12월, 워싱턴의 소련대사관을 찾아간 남자는 경비원에게 보안 담당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일급 비밀문서를 팔려고 왔는데, 살 생각이 있습니까?”

    보안 담당인 KGB 요원은 문서를 가지고 나갔다 돌아와 두툼한 봉투를 건네줬다. KGB의 협조로 대사관을 비밀리에 빠져나온 후, 봉투에 1000달러나 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환호작약했다. 한 달 급료를 500달러도 못 받던 그로서는 거금을 너무 쉽게 번 것이었다. 소련은 자료를 가지고 똑같은 기계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미 해군의 기밀전문을 모조리 해독할 수 있었다.

    몇 개월이 지나 그는 매달 4000달러를 받기로 계약하고 KGB가 요구하는 정보를 꼬박꼬박 빼내 전달했다. 그리고 1971년 전쟁 중인 베트남으로 파견돼 기밀자료 관리자가 되자 더 많은 고급정보를 소련으로 빼돌렸다. 그가 넘긴 정보로 북베트남군은 B-52의 폭격계획을 사전에 알게 됐고, 결국 미군 폭격기들은 적이 빠져나간 지역에 폭탄을 버리다시피 하고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은 아무리 폭격을 해도 성과가 없음을 의아해했으나, 소련과 북베트남이 자신들의 계획서를 모두 읽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소련은 한 달 4000달러로 존 워커를 고용하고 있었지만, 이 때문에 미군은 한 달에 400만 달러어치의 폭탄을 낭비하고 있었다.

    돈 때문에 스파이가 된 남자

    워커는 1974년 해군에서 전역하면서도 조국을 배신하는 범죄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75년 해군에 복무 중인 아들을 포섭했다. 아들 마이클은 핵추진 항공모함 니미츠(USS Nimitz)의 통신센터에서 일급비밀을 다루고 있었다. 마이클은 비밀이라고 생각되는 정보는 모조리 모아두었다가 아버지에게 전달했고 그것은 모두 KGB로 갔다.

    마이클이 빼낸 정보 역시 특급의 보안이 필요한 자료였다. 니미츠의 작전 절차가 기록된 매뉴얼, 전함의 미사일 방어체계, 미 해군의 비상작전 체계, 핵전쟁 시 탄도미사일 잠수함의 발사 위치 등의 기밀자료였다.

    워커 부자가 믿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정보를 끊임없이 가져오자 KGB도 기이하게 여길 정도였다. 워커의 간첩행각은 1985년까지 이어져 1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으나, 이혼한 전처의 신고로 마침내 FBI에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워커는 돈에만 눈이 멀어 조국을 소련에 팔았다. 그는 양심이 결여된 인간인 소셔패스(sociopath)의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소셔패스는 정신의학에서 사회병 환자로 분류되며, 미 보건후생국은 세계 인구의 4%를 이런 부류로 추정하고 있다. 마이클은 25년형을, 존 워커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이 검거된 후 미군은 모든 통신체계를 폐기하고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이 사건은 KGB의 스파이 작전 중 최대의 성과를 기록한 작전이었고, 워커가 소련 스파이로 일한 18년 동안 미국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워싱턴 소련대사관의 보안 담당관이던 KGB 장교 비탈리 유르첸코가 미국으로 망명한 후 이런 증언을 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신들이 우리와 전쟁을 했다면, 백번 패망했을 겁니다. 우린 당신들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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