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6

2009.12.22

‘홍길동’을 부르는 씁쓸함에 대하여

‘탐관오리’의 비리 끊이지 않는 한국, 부패 척결 여전히 멀고 험한 길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09-12-18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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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길동’을 부르는 씁쓸함에 대하여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쾌도 홍길동’.

    조선 후기 신유학인 실학(實學)의 학파를 형성한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80여 평생을 재야학자로 경기도 광주 첨성촌에서 은거하며 한우충동(汗牛充棟·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집에 쌓으면 대들보에 닿을 만큼 책이 많다는 뜻)의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백과전서인 ‘성호사설(星湖僿說)’이 유명하다.

    현실 개혁과 부국강병의 이상과 포부를 담은 ‘성호사설’은 천지, 만물, 인사, 경사, 시문의 5개 항목으로 구성됐다. 흥미로운 것은 ‘인사문(人事門)’ 임꺽정(林巨正)조에서 조선의 3대 도둑으로 홍길동(洪吉童), 임꺽정, 장길산(張吉山)을 들었다는 점. 홍길동은 시대가 너무 멀리 떨어져 알 수 없다면서 그의 행적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으나 시정 아이들이 맹세하는 말 속에 홍길동이란 이름이 들어 있다고 했다. 또 임꺽정은 명종 때의 가장 큰 괴수이고, 장길산은 숙종 때의 교활한 도적이라고 평하면서 그들의 활동에 대해 들은 얘기를 옮겨 적었다. 그리고 장길산을 끝내 붙잡지 못한 데 대해 국가가 지략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크게 한탄했다.

    ‘홍길동전’은 연산군 때 강도 洪吉同이 모티프

    조선의 3대 도둑 중 홍길동 이야기는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이 지은 최초의 한글소설이자 초유의 사회소설인 ‘홍길동전(洪吉童傳)’을 통해 조선 중기 이래 금서(禁書)였음에도 400여 년간 널리 읽혔다. 허균의 아버지는 초당(草堂) 허엽(許曄·1517∼1580)으로 바닷물을 간수로 사용해 초당두부를 만든 동인(東人)의 영수였으며, 형은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許筬·1548∼1612)과 중국 성절사(聖節使·황제 탄신 축하사절) 서장관으로 명(明)에 다녀온 허봉(許·1551∼1588)이고, 누이는 여류시인으로 유명한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이다. 이렇듯 허균 집안은 당대 천재가문으로 명망이 높았다.

    당대 최고의 장서가인 허균은 독서량이 엄청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중국의 ‘서유기’ ‘수호전’ ‘삼국지통속연의’ 등을 읽고 조선의 서얼 차별과 탐관오리 횡포를 바로잡으려 한 듯하다. 그래서 ‘홍길동전’을 저술,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유교의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제시한 것으로 분석된다. 도술에 관한 것은 ‘서유기’, 의적에 관한 것은 ‘수호전’과 통하며, 분신술로 팔도 감영에 방을 붙이고 초인(草人)을 만들어 속이는 것은 ‘삼국지통속연의’에 나오는 분신법과 통한다.



    ‘홍길동전’의 내용 가운데 조선의 소재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연산군 때 가평, 홍천을 중심으로 활약한 명화적(明火賊) 홍길동(洪吉同)과 명종대에 출몰한 양주 백정 임꺽정, 임진왜란 중 충청도 일대에서 일어난 민란인 송유진(宋儒眞·?∼1594)의 난(1594년)과 충청도 홍산을 중심으로 거사한 왕실 서얼 출신 이몽학(李夢鶴·?∼1596)의 난(1596년) 등이다. 그리고 율도국(島國) 건설에 대한 것은 조선 선비들이 이상향에 대해 품은 동경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허균은 이리한 여러 모델 중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나오는 홍길동(洪吉同)을 주요 모티프로 해서 자신의 분신으로 홍길동(洪吉童)이란 캐릭터를 창조했다.

    과연 홍길동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연산군일기’ 권39에 따르면 연산 6년(1500) 10월22일자에 짤막한 기사가 나온다.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좌의정 성준(成俊), 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계문(啓聞·신하가 글로 아룀)하기를 “강도 홍길동을 체포했으니 기쁨을 이기지 못하옵겠거니와, 백성을 위해 해(害)를 제거하기로 이보다 큰일이 없사옵니다. 청하옵건대 그 도당을 끝까지 잡도록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일반 범법자였다면 지방 수령의 재판을 받았을 것인데 ‘연산군일기’에 전하는 홍길동은 국사범을 다루는 의금부로 송치돼 추국(推鞫)을 받았다고 하니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 수석 재판관이던 한치형이 심리를 종결하면서 “강도 홍길동은 옥관자를 붙이고 홍대(紅帶)를 차고 첨지(僉知)를 자칭하고서 백주에 떼를 지어 병기를 소지하고 관부에 출입해 거리낌 없이 멋대로 행동했습니다. 권농(勸農), 이정(里正), 유향소(留鄕所) 품관(品官) 등이 그 정황을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체포, 고발을 아니했으니 징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한 데서 사건의 심각성을 엿볼 수 있다. ‘연산군일기’에는 홍길동의 옥사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중종실록’을 통해 홍길동 무리의 형세를 가늠할 수 있다.

    도둑, 혁명가, 농민지도자

    ‘홍길동’을 부르는 씁쓸함에 대하여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아치실에 국문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인 홍길동의 생가가 복원됐다.

    중종 18년(1523)에 역시 군도(群盜)사건을 처리하면서, 붙잡힌 자들을 모두 경옥(京獄)에 수감할 것이냐, 지방 감옥에 분리 수감할 것이냐를 놓고 논의가 분분했다. 결국 “지난 경신, 신유년(홍길동 사건을 다루던 1500년과 이듬해) 사이 홍길동의 옥사를 감계(鑑戒·본보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분리 수감으로 정해졌다. 경옥에 모두 수감할 경우, 그들이 옥중에서 말을 서로 통해 추국하는 데 난점이 있으며 반옥(叛獄·옥중에서 도망하는 것)의 우려도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연산군일기’ 연산 6년 12월28일자를 보면 홍길동을 도와준 당상무관인 엄귀손(嚴貴孫·?∼1500)의 처벌을 논의한 대목이 있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홍길동의 행동거지가 황당한 줄 알면서도 불고지(不告知)했고, 홍길동에게서 음식물을 받았으며, 홍길동을 위해 서울에 가옥을 주선해줬다는 죄를 물어 “엄귀손은 곤장 100대를 때려 3000리 밖으로 유배하고 고신(告身·직첩)을 모두 회수해야겠습니다”라고 했다. 엄귀손은 홍길동과 동당(同黨)으로 파악돼 남해로 유배지가 결정됐으나, 옥에서 대기하다 그해 12월21일 죽었다. 이처럼 관인 신분인 엄귀손도 홍길동에게 포섭됐다는 것은 그의 지도력이 탁발했음을 증명한다. 더구나 홍길동이 당상관 의장을 하고 관부에 드나들고, 향촌사회의 유력자들과도 소통한 것은 그가 농민지도자라 가능했을 것이다. 소설 속의 홍길동도 활빈당(活貧黨)의 두령으로 창고를 열어 백성을 진휼하고, 죄인을 잡아 다스리며, 옥문을 열고 무죄한 사람을 석방하는 영웅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허균은 ‘호민론(豪民論)’이라는 논문도 남겼는데, 여기서 그는 사람을 호민(豪民), 원민(怨民), 항민(恒民)의 세 유형으로 구분했다. 항민은 최저 의식수준을 가진 우민(愚民)이며, 원민은 나약하고 소시민적인 불평세력, 호민은 시대적 사명감을 자각하고 사회와 국가의 갖가지 모순을 개혁하는 지도자라고 했다. 그런데 허균은 여기서 우리 역사의 창업주인 왕건이나 이성계를 호민이라 보지 않고, 견훤과 궁예 같은 인물을 호민으로 보는 독특한 역사관을 표출해 홍길동을 자신이 꿈꾼 이상 속의 혁명가로 만들었다.

    홍길동에 관한 기록은 조선 후기 황윤석(黃胤錫·1729∼1791)이 엮은 ‘증보해동이적(增補海東異蹟)’에도 나오는데, 여기에서 홍길동의 해외 탈출이 그려졌다. 그런데 일본 오키나와의 야에야마 박물관에 소장된 홍길동의 처남 장전대주(長田大主) 가문의 족보에 홍길동 이름과 출생년도, 고향 등이 기록돼 그가 정통(명나라 6대 황제인 영종의 연호) 8년(세종 25년, 1443)에 전라도 장성군 황룡면 아차실에서 태어났음이 몇 해 전 밝혀졌고 소설 속의 율도국이 일본 오키나와임이 확인되기도 했다.

    성호 이익이 살던 18세기 기준으로 조선의 3대 도둑이 홍길 임꺽정 장길산인지 몰라도, 그 후 성호가 몰랐던 평서대원수 홍경래(洪景來·1771∼1812),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1855∼1895) 등 그들보다 훨씬 큰 ‘도둑’(사실은 농민지도자지만)이 우리 역사에서 나타나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품고 봉건사회 해체를 촉진했다. 홍길동의 후예인 홍경래는 19세기 농민전쟁의 서막을 열면서 반봉건의 기치를 드높였고, 그 후 전봉준이 농민전쟁을 완결지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홍길동의 후예’에서 교활한 기업사냥꾼을 처단하는 현대판 홍길동을 보면서, 현대판 탐관오리의 비리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한국 사회가 아직도 홍길동 같은 의적이 필요한 봉건제 사회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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