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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기자의 It-Week | 서른여덟 번째 쇼핑

마마호환 야동보다 무서운 공짜, 사은품

  • 김민경 holden@donga.com

마마호환 야동보다 무서운 공짜, 사은품

쇼핑에도 바둑이나 태권도처럼 단증제가 있다면 나는 몇 단일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뒤 혼자 9단 검은 띠를 주고 좋아서 웃곤 해요. 도를 닦았으면 하산할 때가 지난 거죠. 그래서 대폭 세일, 균일가 판매 등 벼락같은 백화점 광고문구들을 봐도 흔들리지 않는 평상심을 얻게 되었어요. 또 ‘공짜로 나눠드립니다’ 같은 ‘피싱’ 이벤트에 세상에 공짜란 없다고 고개를 흔드는 지혜도 생겼고요. 사은품에 대해선 ‘백화점이 입점업체에 부담시켰을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 좋은 제품을 줄 리 없지’라며 입맛을 다시기도 해요.

그러나 간혹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신종 인플루엔자처럼 새로운 유전자 서열을 가진 사은품이 출현하면 상황이 심각해집니다. 지난 금요일, 백화점 전단을 보던 저는 동공이 확 커질 만한 사은품을 보게 됩니다. 오오, 이것은! 혹시 식구들이 눈치챌까 조용히 전단지를 엎어뒀지만 머리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어요.

사은품은 다름 아닌 여행가방이었고, 여행을 무척 좋아하기에 이번 여름 그 가방이 저를 좋은 곳에 데려다줄 것만 같았습니다. 사은품용 여행가방을 받으려면 상당한 액수의 구매를 해야 한다거나, 가방 원가를 생각하면 하나 사는 게 낫다는 합리적 생각은 시원한 비치룩에 가방을 끄는 광고전단지 모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스르륵 증발해버렸어요. 이제 ‘합리화’를 하는 거죠.

평소 필요한 물건을 이번 기회에 사고, ‘공짜로’ 가방도 얻으면 좋잖아. 이 가방은 흔히 보던 시꺼먼 사은품 가방과 다른, 분홍색 하드커버 케이스. 15년 사용했으면 내 트렁크도 바꿀 때가 됐지. 미혹의 마녀인 사은품은 소비에 있어서 놀라운 절제력을 내재하고 살아온 사람들조차 한순간에 무너뜨립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 연배의 어르신들이 대부분 그러합니다.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절에 청춘을 보낸 어머니 세대는 딸들이 ‘잇 아이템’이라고 하는 것을 ‘쓸데없는 것’이라고 부르십니다.

하지만 사은품과 샘플을 챙기면서 면역성을 갖게 된 영악한 딸과 달리, 어쩌다 쇼핑을 나오신 어머니는 무균실에서 나온 아이처럼 사은품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되죠. 또 ‘공짜’는 그것이 양잿물일지언정 꼭 받아야 한다고 믿으세요. 수만원에서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에센스 병을, 마치 병으로 둔갑한 사기꾼을 보듯 냉랭하게 지나치시던 어머니는 화장품 매장 직원의 다음과 같은 말에 스윽 뒤를 돌아보십니다.



“사은품으로 10만원 상당의 여행용 화장품 세트와 최신 유행 핸드백, 우산과 냉장고를 드려요.”
완벽한 메이크업을 한 매장 언니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마술이 일어납니다.
“핸드백이 마음에 쏙 드네. 일부러 사러 다녀도 이런 디자인이 없던데.”

마마호환 야동보다 무서운 공짜, 사은품

사은품은 절제의 미덕을 갖춘 사람들조차 한순간에 쇼퍼홀릭으로 바꿔놓습니다. 이를 위해 사은품들은 눈부시게 진화하고 있고요. 충동구매로 받아온 사은품을 볼 때마다 나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요.

어머니는 핸드백을 얻기 위해, 용도도 모르는 에센스를 3개월 할부로 사는 불합리한 쇼핑 행각을 벌이게 됩니다. 제품보다 사은품으로 마케팅 전쟁을 수행하는 화장품 회사들은 패션 브랜드보다 더 빨리 소비자들이 원하는 가방을 사은품으로 내놓습니다. 톱디자이너들을 사은품 디자이너로 영입하기도 하고요. 지갑, 핸드백부터 여행용 가방, 우산, 커플 티셔츠, 목욕 가운, 탁상 거울, 진짜 다이아몬드나 진주 목걸이, 샌들, 심지어 냉장고(화장품용)까지 화장품 회사에서 주는 사은품은 실로 다양합니다.

백화점에서 주는 사은품으로는 휴지, 그릇, 세제, 각종 주방용품이 있고요. 동네 슈퍼마켓과 정육점에서도 질세라 플라스틱 볼이나 바구니를 나눠주곤 합니다. 사은품을 받기 위해 한두 가지를 더 충동적으로 쇼핑한 뒤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서면 늘 후회를 합니다. 사은품이야말로 가장 반환경적이고 비윤리적 소비라는 걸 깨닫는 거죠. 교통지옥과 인파 속에서 일요일 하루를 다 보낸 뒤에 얻어온 사은품들이 언제나 방구석으로 밀려나는 이유입니다.



주간동아 2009.06.23 691호 (p73~73)

김민경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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