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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편지

그래서 스토리다!

  • 이형삼 hans@donga.com

그래서 스토리다!

그래서 스토리다!
지난주, 두 가지 ‘첫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는 요즘 동네마다 인기 상한가라는 스크린 골프장 체험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실내에서 탁한 공기 마시며 꼼짝 않고 벽에다 공 때려대는 게 얼마나 따분할까 싶었는데, 의외로 재미있었습니다. 여기저기 달아놓은 카메라와 센서로 골퍼의 자세를 감지해 타구의 방향과 높이, 비거리를 추정해낸 결과는 실제 골프장에서 겪는 사정과 얼추 비슷했습니다.

재미를 배가한 건 ‘스토리’였습니다. 골프장 목록 중에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컴퓨터에 입력하면 평생 못 가볼 유수의 명문 골프장에서 라운딩하는 호사를 누립니다. 잭 니클로스가 2005년 브리티시 오픈을 끝으로 은퇴하면서 “더 이상 이곳에서 못 뛰는 게 슬프다”며 울먹였다는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 2007년 프로암대회 챔피언 필 미켈슨이 절묘한 세컨드 샷으로 태평양 해안 절벽을 넘기며 버디를 잡아내던 페블비치 8번홀-일명 ‘악마의 홀’-이 눈앞에 떡하니 펼쳐집니다. IT(정보기술)와 스토리를 접목한 비즈니스 모델의 놀라운 시장성!

중국 최고 명차 반열에 든다는 ‘용주차’를 맛본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용주차의 원래 이름은 ‘충시차’라고 합니다. 화향나무 잎을 갉아먹은 벌레의 배설물을 모아 덖은 차인데, 까놓고 벌레똥(蟲屎)이라 부르기 뭣해 여의주(龍珠)라는 우아한 이름을 붙였답니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마시다 입심 좋은 다원 팽주(烹主)가 쏟아내는 ‘스토리’에 홀딱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오래 묵은 용주차는 부르는 게 값이다, 문화혁명기엔 이런 귀한 차를 자본가의 기호품으로 매도해 불태웠다, 당시 뜻있는 이들이 목숨 걸고 숨긴 덕분에 겨우 화를 면한 차들이 몇십 년 동안 어둠 속에 묻혀 있다 극히 소량씩 발견되고 있다, 지금 당신 앞에 놓인 차도….

40대 중반을 향해 가니 친구들과 술잔을 주고받을 때면 잠자리 얘기가 종종 안주로 오릅니다. “아직도 마누라랑? 참 힘도 좋다”가 대세이고 “야 인마, 그걸 체력으로 하냐? 정신력으로 하지”라며 멋쩍게 받는 건 소수입니다. 정신력, 그거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음이 움직여야 몸이 따라오죠. 여건은 좋은 편입니다. 부부간에 얽히고설킨 별의별 ‘스토리’가 좀 많습니까. 결 따라 섬세하게 되살려낸 그 고운 추억 하나하나가 처방전 필요 없는 비아그라입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환자가 느닷없이 눈이 멀었다고 하자 안과의사는 실명이 아닌 ‘실인증’을 의심합니다. 실인증 환자는 그가 늘 보던 것-예컨대 책상-을 보면서도 뇌가 그 대상을-책상이라고-인지하지 못합니다. 시력 감소는 없지만 자신이 보는 대상을 아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겁니다. 우리는 혹 ‘배우자의 매력’만을 선택적으로 ‘실인’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주간동아 2009.02.24 674호 (p10~10)

이형삼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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