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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피살사건 갈수록 미스터리

60대 여성재력가 박모 씨 가족에 의혹 집중 재산 둘러싸고 수차례 충돌에 해결 실마리?

  •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필리핀 피살사건 갈수록 미스터리

필리핀 피살사건 갈수록 미스터리
4월3일(현지 시각) 오후 필리핀에서 발생한 한인 여성 재력가 피살사건. 그간 잠잠했던 한국 경찰의 수사가 최근 급물살을 타면서 피살자의 가족이 이번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고 있다.

사건을 맡은 서울 서초경찰서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진 박모(66) 씨의 청부살해 정황을 암시하는 녹음 CD 자료를 최근 필리핀 경찰에게서 넘겨받았다. 이 CD는 박씨가 필리핀을 방문할 때마다 관광가이드 겸 운전기사 노릇을 했던 필리핀 현지인이 한 여성과 나눈 대화를 휴대전화로 녹음한 것.

경찰에 따르면 채 1분도 안 되는 두 사람의 대화 중에는 문제의 여성이 현지인에게 “Your brother’s friend, did a perfect job, she’s gone” “So you can keep the money”라고 말한 대목이 있다.

박씨 사건에 대한 필리핀 경찰 수사에서 이 운전기사가 조사를 받은 정황과 연결해 이 대화를 번역하면, ‘당신 형제의 친구가 주어진 일을 완벽히 해내면, 그녀가 없어지면’ ‘그러면 당신이 그 돈을 가질 수 있다’가 된다. 누군가 청부살해를 의뢰해 박씨가 살해됐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내용일 수 있는 것.

그런데 한국 경찰은 운전기사가 필리핀 경찰 수사에서 CD에 등장하는 여성의 실체가 바로 박씨의 딸인 A씨라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A씨가 어머니의 청부살해를 의뢰했다는 상당히 충격적인 진술이 아닐 수 없다.



운전기사 “그러면 당신이 돈 가질 것” 녹음

이번 사건 수사를 경찰에 의뢰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박씨의 남동생 B씨. B씨는 누나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4월10일 박씨의 두 딸과 전남편, 즉 자신의 외조카들과 매형을 피진정인으로 해 경찰에 진정서를 접수했다.

운전기사의 진술이 허위일 수도 있어 단언할 상황은 아니지만, 현재까지 흘러온 수사의 정황대로라면 박씨 가족간의 미묘한 갈등이 사건의 한 계기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렇다면 숨진 박씨 가족은 대체 어떠한 관계에 있었을까. 경찰 관계자와 박씨의 지인 등에 따르면, 박씨와 전남편 그리고 딸들과의 관계는 예전부터 복잡했다고 한다. 노점상, 달러 거래 등으로 번 돈을 부동산에 투자해 큰 재산을 모은 박씨는 1980년대 이혼한 후 전남편과 갈취 등으로 인한 소송을 벌이다 결국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옥살이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전남편의 편을 든 딸 A씨와의 관계가 급격히 소원해졌다고 한다.
필리핀 피살사건 갈수록 미스터리
명문 여대 출신으로 행정고시에도 합격할 만큼 수재였던 A씨는 결혼 후 딸을 낳았고, 이 외손녀가 매개체가 돼 3, 4년 전부터는 모녀 사이가 회복됐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이다. 실제 A씨도 경찰 조사에서 “외손녀가 처음 본 손자라 매우 예뻐했다. 내가 이혼하고 나서도 (어머니가) 계속 아이를 맡아 키워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번 사건에 대척점에 서 있는 A씨와 외삼촌 B씨는 박씨 재산의 상속 문제와 관련해 충돌하는 처지다. 경찰에 따르면 원래 박씨의 재산은 절반이 외손녀, 나머지 반을 박씨 동생이 나눠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재산 절반은 외손녀 몫으로 그대로 놔두고 나머지 반에 대한 소유권은 두 딸에게 가는 것으로 박씨의 유언장 내용이 바뀌었다. 결국 B씨는 외조카에게 밀려 누나의 재산을 한 푼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된 셈이다. 이에 대해 A씨는 경찰에서 “유언장 내용이 바뀐 줄 전혀 몰랐다”며 상속 대상 변경에 아무 관여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은 경찰 수사과정에서도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다. B씨는 누나의 피살사건에 대해 경찰에 진정서를 내면서 이번 사건에 박씨의 딸 A씨가 관련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했다. B씨는 6월12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건 재산 다툼의 문제가 아니라 청부살인의 문제다. 나는 재산에 관심이 없고, 다만 억울하게 죽은 누나의 한을 풀어주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반면 A씨는 외삼촌인 B씨가 경찰에 누나의 죽음에 대한 진정을 의뢰하면서 자신과 아버지를 의심스러워하자 곧바로 서울 강서경찰서에 B씨를 고소했다. A씨는 고소장에서 “B씨가 어머니가 숨진 것을 알고 나서 남은 돈을 빼가고, 사망신고도 하기 전에 인감까지 바꾸려 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 피살사건 갈수록 미스터리

박씨가 피살된 후 박씨 소유인 골프연습장 건물과 대지 소유권의 절반이 외손녀에게 넘어갔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이에 대해 B씨는 “내가 누나에게 돈을 받은 것이 있는데 그걸 자기한테 주지 않으니까 소송을 낸 것”이라며 “통장에 돈이 다 있다. 돈을 빼돌렸다거나 인감을 바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한편 A씨 자매는 4월28일 B씨 소유 아파트에 대해 부동산 가압류 소송까지 제기한 것으로 확인됐다. 기자가 B씨의 아파트 등기부등본과 대법원 사건 기록을 확인한 결과, 서울중앙지방법원이 A씨 자매의 가압류 신청을 받아들였고, 이에 5월18일 B씨의 서울 화곡동 아파트가 청구금액 8억원에 가압류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경찰이 필리핀 경찰에게서 받은 CD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넘겨 정밀 음성분석 작업에 착수한 가운데 아직 범인을 단정지을 만한 뚜렷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계좌 추적과 통화내용 추적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필리핀 입국 과정·친권 문제 등 의혹투성이

하지만 의심스러운 정황은 몇 가지 있다. 먼저 박씨가 사망한 다음 날인 4월4일 전남편이 필리핀에 입국한 부분. 상식적으로는 전부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갈 수 있기는 하지만, 경찰에 따르면 전남편의 항공권은 다름 아닌 A씨가 예약한 것. A씨는 이에 대해 “원래 4월에 미국인과 결혼하기로 돼 있는데 아버지 비자가 만기라서 대신 필리핀 관광이라도 시켜드릴 겸 4박5일 일정으로 항공권을 예약해뒀다”고 경찰에서 말했다고 한다.

박씨 사망 전과 당일 A씨의 행적 또한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박씨와 함께 출국한 3월30일에 앞서서도 당일로 필리핀에 다녀왔다. 또한 4월3일 박씨와 헤어진 뒤 필리핀 현지에서 학원을 경영하는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 술을 마셨고, 다음 날까지 박씨와 전화통화를 일절 하지 않았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어머니 어학원과 거주할 맨션을 알아보러 미리 필리핀에 간 것이며, (어머니가 사망한 것은) 4월4일 저녁에 한국영사관에서 연락이 와서 알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가 일명 ‘대포폰’을 사용한 것도 의문스러운 대목이다.

경찰이 박씨 피살사건을 공식 발표하기 전날인 4월30일 박씨 소유인 서울 강서구 소재 지하 2층 지상 6층 골프연습장 건물과 대지 소유권의 절반이 외손녀에게 유증(遺贈)됐는데, 사실 이혼한 A씨의 전남편이 박씨 사망을 이유로 대신 등기접수를 한 것도 석연치 않다. 이에 대해 B씨는 “외조카(A씨)의 전남편이 이혼은 했지만 아직 친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실상 난데없이 A씨 전남편이 박씨의 외손녀이자 자신의 딸에게 유증된 골프연습장 건물과 대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된 셈이다.

A씨가 미국 남성과 재혼할 계획이면서 친권 문제를 정리하지 않은 점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B씨는 “골프연습장 지분 절반은 누나의 두 딸이 갖고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결국 박씨 재산 전부가 A씨자매와 A씨의 전남편에게 옮겨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행적의 전말과 CD 자료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기자는 6월12일 A씨와 전화통화를 했으나 A씨는 “더 할 말이 없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보통 가정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복잡한 가족관계, 그 중심에 서 있던 여성 재력가의 알 수 없는 죽음. 영화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 사실로 드러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주간동아 2008.06.24 641호 (p14~16)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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