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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시네마천국|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블랙 달리아’

40년대 누아르 스타일로 잔혹 살인사건 재구성

  • 심영섭 영화평론가 대구사이버대 교수

40년대 누아르 스타일로 잔혹 살인사건 재구성

40년대 누아르 스타일로 잔혹 살인사건 재구성
로스앤젤레스(LA)의 밤. 폭동이 휩쓸고 간 거리에는 군인과 시민 간의 주먹다짐이 오가고, 경찰은 싸움 장면을 구경하며 내기 걸기에 바쁘다. 밤은 험하고 길은 멀다. 그리고 이때 경찰 출신의 두 사내 미스터 아이스와 미스터 화이어가 만난다. 아수라장 같은 길거리, 어두운 그림자 속의 더 어두운 이야기, 필름 누아르의 막이 오른다.

할리우드의 최대 강점이라면, 거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만들 때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질을 보장하는 이른바 ‘웰 메이드’ 감독층이 두껍다는 것일 게다. 이들 장인 감독 리스트에는 커티스 핸슨이나 조엘 슈마허, 리들리 스콧과 함께 이 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자칭 히치콕의 후예로서 만드는 영화마다 미국의 욕망과 문드러진 자본주의의 병적 징후를 예리하게 묘사하던 브라이언 드 팔마가 시체 애호증, 포르노 필름, 불륜과 스캔들로 번들거리는 제임스 엘로이의 소설 ‘블랙 달리아’에 구미가 당긴 것은 당연해 보인다. 1947년 미국에서 벌어진 희대의 살인사건 ‘블랙 달리아’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미해결 사건으로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LA 전전하던 22세의 배우 지망생 의문의 피살

1947년 1월15일, LA의 빈 터에서 한 구의 여성 시체가 발견된다. 끔찍하게도 시체는 다리가 절단되고 내장이 적출된 채 입이 양쪽 귀까지 찢긴 상태. 살해 당시 스물두 살의 처녀이던 엘리자베스 쇼트는 부모의 이혼 후 LA를 전전하다 실패한 배우지망생으로 생을 마감했다. 경찰 수백 명이 동원돼 사건을 수사했고 블랙 달리아의 범인이라고 자백한 사람만 수십 명이었지만, 오손 웰스까지 용의자로 포함된 이 사건의 범인은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물결치던 피살자의 검은 머리와 검은 드레스만큼은 ‘블랙 달리아’라는 닉네임으로 남아 헛된 욕망의 추락, 타락한 도시의 상징, 할리우드의 검은 그림자로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미국 전역을 떠돌고 있다. 배우 지망생이던 엘리자베스 쇼트는 적어도 현실 속 누아르의 주인공으로 살아남게 된 것이다.



40년대 누아르 스타일로 잔혹 살인사건 재구성

‘블랙 달리아’는 할리우드의 대표적 ‘웰 메이드’ 감독인 브라이언 드 팔마의 신작이다.

드 팔마는 철저하게 1940년대 필름 누아르 스타일을, 조금씩 침몰해가는 40년대 LA의 뿌연 연기 속에 유려하게 버무려나간다. 블랙 달리아의 수사를 맡은 일명 미스터 아이스, 복서 출신 경찰관 버키는 전형적인 인물로 다소 타락하고 피곤에 지친 누아르 속 탐정의 모습을 복제해나가며 두 명의 팜므 파탈을 만나게 된다. 한 명은 자신과 복싱 경기를 벌여 일부러 져주었던 동료 리(미스터 화이어)의 애인인 케이이고 다른 한 명은 블랙 달리아 사건을 수사하면서 우연히 만난, 죽은 피해자와 꼭 닮은 브루넷 여인 매들린이다.

물론 이 수수께끼투성이 영화에서는 누구도 믿을 수 없으며, 누구도 검은 그림자를 숨기지 않은 이가 없다. ‘LA 컨피덴셜’의 킴 베이싱어를 떠올리게 하는 금발의 차가운 관능미를 자랑하는 케이(스칼렛 요한슨 분)나 부잣집 딸로 동성애 성향이 있어 보이는 매들린 역시 버키와의 육체적인 줄다리기 속에서 서서히 과거가 드러난다. 담배를 꼬나물고 애인의 복싱 장면을 보며 “적어도 벗은 게 멋있죠”라 말하던 당돌한 여자 케이는 거물 조폭의 학대받는 정부였고, 매들린의 가족은 의사소통조차 단절된 채 병적으로 타락해 있다.

LA 한 허름한 건물 뒷면의 빈 터와 시체 발견 장면까지 한 숏으로 연결하는 드 팔마의 연출 의도에서도 드러나듯 ‘숨은 뒷면’과 ‘검다’는 영화를 관통하는 이미지. 아마도 케이의 과거 속 포주 이름이 바비 드윗, 즉 이니셜 역시 블랙 달리아처럼 B. D.이고 케이 허리에 자신의 이니셜을 새겨 넣은 것을 보면, 영화 속 대사처럼 ‘다른 사람을 먹이로 삼는 인간들’의 희생자에 대한 약어일지도 모르겠다.

드 팔마는 낡은 흑백 속에 엘리자베스 쇼트의 인터뷰나 포르노 필름을 슬쩍 흘리면서 그녀야말로 겉만 번드르르한 천사의 도시 LA와 할리우드가 낳은 희생양이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입까지 잘려나간 시체의 의미를 울고 있는 피에로로 해석하는 마지막 장면에 가서 블랙 달리아 속 시체는 단순히 시체가 아니라 텅 빈 유령세계, 검은 LA의 표징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드 팔마 영화의 계보가 어디서부터 시작해 누구와 경쟁하려 했는지 눈치채게 된다. 금발 미녀에 대한 알 수 없는 집착과 죽은 시체와 닮은 여성을 쫓아다녔던 히치콕의 ‘현기증’ 속 제임스 스튜어트의 후예가 남자 주인공 버키라면, 자본가들의 흥청거림과 부패로 얼룩진 ‘블랙 달리아’의 LA는 역시 여배우를 닮은 창녀와 경찰이 얽히고설킨 ‘LA 컨피덴셜’에 가까운 모습이라 하겠다.

40년대 누아르 스타일로 잔혹 살인사건 재구성

‘블랙 달리아’의 스칼렛 요한슨.

스칼렛 요한슨의 관능미 ‘또 다른 볼거리’

그런데 어쩌자고 드 팔마는 고전 누아르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 그대로 물려받았을까. 이야기의 복잡함과 과도함, 탐정의 1인칭 내레이션으로 모든 동기와 감정을 설명하는 누아르 특유의 단점까지도 ‘블랙 달리아’는 40년대 장르를 빼다박았다. 그렇다면 드 팔마는 이번 작품에서도 ‘모사’ 이상의 창조는 하지 못했는가? 아니면 정교한 데생이 예술일 수 있듯, 정교한 고전 장르의 모사 또한 예술적 솜씨로 인정해줘야 하는 것일까.

‘블랙 달리아’ 또는 검은 필름 제국의 연대기. 영화는 ‘빌리지 보이스’의 평론가 짐 호버만의 말대로 ‘차이나 타운’과 ‘멀홀랜드 드라이브’ 사이 어딘가를 서성이고 있다. 단테 페레티의 세트, 조시 프리드먼의 각본, 마크 이샴의 음악, 그리고 이 영화로 오스카 후보에 오른 빌모스 지그몬드의 촬영까지 할리우드 일류들이 총출동한 ‘블랙 달리아’는 좋았던 그 시절, 표준규격 스튜디오 시스템 시대의 영화를 컬러로 번역한 복원판이다. 그러니 고전 누아르를 좋아하시는 분, 그도 아니라면 뜯겨져나가는 스칼렛 요한슨의 드레스 자락에서 관능의 하룻밤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블랙 달리아’는 최소한 상업영화가 자극할 수 있는 아드레날린 수치는 넘기고도 남을 만하다고 믿는다.



주간동아 610호 (p86~88)

심영섭 영화평론가 대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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