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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대 특파원의 중국 차세대 지도자 열전|② 리커창(李克强)

리틀 후진타오, 남다른 정치적 야심

빼어난 능력에 공청단 인맥 탄탄 … 허난·랴오닝성 黨서기로 지도자 수업

  • 하종대 동아일보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리틀 후진타오, 남다른 정치적 야심

리틀 후진타오, 남다른 정치적 야심
시진핑(習近平·54) 전 상하이시 서기와 함께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리커창(李克强·52) 전 랴오닝(遼寧)성 당서기는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 겸 국가주석 등 다른 7명의 상무위원과 여러 가지 면에서 확실히 다르다.

리 신임 상무위원과 시 신임 상무위원은 모두 50대 초중반으로 개혁개방 시기에 대학에 입학하고 사회에 진출한 ‘문화대혁명 이후 세대’라는 점과, 5년 뒤에는 중국 최고지도부의 핵심 멤버가 된다는 점에서 후 주석을 비롯한 4세대 지도부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또 이번에 이들과 함께 상무위원이 된 허궈창(賀國强·64) 전 중앙조직부장과 저우융캉(周永康·65) 전 국무위원 겸 공안부장은 60대 인사로, 5년 뒤엔 상무위원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4.5세대라는 점에서 이들과 차이가 있다.

리 신임 상무위원의 평소 신조는 ‘신초(愼初·시작할 때처럼 신중하고) 신미(愼微·작은 일에도 신중하며) 신독(愼獨·혼자 있을 때도 삼가고 경계하며) 신욕(愼欲·물욕을 내지 않는다)’이다.

리 상무위원의 주변 인사들은 그를 “능력이 출중해 일을 잘하면서도 성과를 자랑하지 않고 청빈한 삶을 즐기는 관리”라고 평가한다. 그만큼 그는 자신을 잘 제어하고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다. 성실하게 일하는 자세에서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지만, 그렇다고 남을 혹사하며 부려먹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를 옆에서 지켜본 랴오닝성의 한 고위 간부는 “리 전 서기는 일벌레였지만 그렇다고 주말에 간부를 불러모아 회의를 열진 않았다”고 말한다.



일을 할 때 그는 조리 있고 질서정연하다. 아랫사람을 질책할 때는 절대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리 상무위원의 주변 인사 가운데 그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중을 상대로 연설할 때는 대부분 원고 없이 즉석에서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해박함에 놀라곤 한다.

리 상무위원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자주 찾아가 그들과 정담을 나누고 고충을 들으면서 정책 아이디어도 얻는다. 2004년 겨울부터 시작한 ‘판잣집 주민들에게 집 지어주기’ 정책도 빈민촌 현장에서 바로 결정한 것이었다.

주위 평판 좋은 청빈한 삶 즐기는 관리

청빈한 삶을 즐기는 그는 공무와 관련된 연회가 아니면 모두 정중히 거절한다. 지난해 부친상을 당했을 때 현지 관리들이 보낸 선물을 완곡하게 거절했으며,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이 간소하게 장례를 치렀다.

리 상무위원은 대학시절 자유파 지식인들과 곧잘 어울렸다고 한다.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을 떠나 반체제 인사가 된 그의 대학 동기 왕쥔타오(王軍濤)는 “리커창은 예리한 말재주와 재능, 지혜를 갖춘 인물”이라며 그를 치켜세웠다. 왕쥔타오는 중국의 자유주의자이자 ‘톈안먼 사태’의 주역. 따라서 그의 찬사는 중국 정치체제하에선 오히려 감점 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리 상무위원과 함께 베이징대학 법률학과에서 공부한 베이징대학의 유명 법학자 장밍안(姜明安) 교수는 “리커창은 동료들과 관계가 좋았고 사상도 매우 분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학시절의 사상이 지금의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찍이 현(縣)장을 지내고, 성(省) 정부에서 일한 청렴한 공무원이었다. 그의 청빈한 삶은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런 점은 후 주석의 후계자로 내정된 시 상무위원과 크게 차이나는 대목이다.

그가 어렸을 때 고향 안후이(安徽)성 펑양(鳳陽)현에는 3년간 큰 자연재해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찾아 산과 들을 헤맸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한참 공부해야 할 시기엔 문화대혁명이 닥쳤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많지 않았다. 태자당(太子黨) 출신인 시 상무위원과 달리 출생과 성장 모두 불운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는 책을 좋아해 고등학교 졸업 뒤 농장에 파견됐을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77년 대학입시제도가 부활했을 때 그는 순조롭게 베이징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세상을 꿋꿋이 헤쳐나가는 그의 재능은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다. 리 상무위원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 농장에 배치됐으며, 2년 만에 농장의 당 지부 서기를 거머쥐었다. 23세의 늦깎이로 베이징대학에 들어간 그는 학생회 주석에 당선됐으며, 졸업할 때는 법률학과의 성적 우수생 4명에 포함됐다.

1982년 미국 유학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중국에 남기로 결정했다. 대학 공청단에서 일하던 그는 당시 공청단을 관장하던 후치리(胡啓立) 당시 중앙서기처 서기에게 발탁돼 공청단 중앙에 들어갔다. 출세길에 오른 것이다. 83년 그는 28세의 나이로 공청단 중앙서기처의 후보서기로 승진했고, 38세에는 중앙서기처 제1서기에 올라 최연소 부장급(장관급) 인사가 됐다.

공청단 제1서기를 시작으로 그는 최연소 행진을 계속했다. 1997년 리 상무위원은 ‘5세대 주자’ 가운데 처음으로 15기 중앙위원에 당선돼 ‘당 중앙’의 성원이 됐다. 차세대 지도자군에서 우위를 확고히 다진 것이다.

공청단의 후보서기와 서기로 재직했던 1983~85년 3년간 그는 후진타오 주석과 함께 일했다. 후 주석은 그의 조리 있는 말솜씨와 박식함에 매료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안후이성 지시(績溪)현 출신인 후 주석과 동향으로, 후 주석과의 인연으로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게 됐다. 하지만 그가 후 주석의 후광에만 기대 정치국 상무위원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그의 정치적 업적은 차세대 경쟁주자 가운데 누구도 따라오기 힘들 정도다.

리 상무위원은 1998년 허난성 당부서기로 시작해 2004년 당서기를 끝으로 허난성을 떠날 때까지 6년간 재직하면서 낙후된 ‘농업 대성’ 허난성을 ‘농공(農工) 혼합경제’로 바꿔놨다. 이를 위해 그는 ‘중원(中原) 굴기(·#54366;起)’를 처음 제창했다. 2004년 중앙정부가 제기한 ‘중부(中部) 굴기’의 원류가 바로 허난성의 ‘중원 굴기’다. 그는 98년 31개 성 가운데 21위를 기록했던 허난성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6년 만인 2004년 16위로 올려놨다. 그리고 98년 4308억 위안(약 58조9461억원)이던 허난성의 지역 총생산 역시 6년 만에 8554억 위안으로 2배나 늘려놨다.

능력보다 합리적 조정 요구하는 정치 상황이 마이너스 요인

2004년 12월 랴오닝성 당서기에 부임한 뒤에는 푸순(撫順)시의 34만5000호 판잣집에 대한 주택개량사업으로 120만명의 주택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인민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또한 동북진흥계획의 세부 항목으로 다롄(大連), 잉커우(營口), 단둥(丹東) 등 연해공업지구 개발을 위한 ‘5점1선(五點一線)’ 계획을 수립한 뒤 강력하게 추진함으로써 랴오닝성이 3년 만에 ‘낙후된 동북 3성’의 이미지를 벗을 수 있게 했다. 최근엔 단일 외자유치 규모로는 역대 최고인 인텔 반도체 공장을 다롄에 유치했다. 이 같은 치적으로 그는 언론에 얼굴을 내밀 기회가 많았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랴오닝성에서조차 그를 아는 서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후 주석과 같은 ‘퇀파이(團派)’다. 퇀파이는 ‘공청단(중국공산주의청년단)’ 계열을 가리키는 것으로, 후 주석의 집권 2기를 맞아 중국 정치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지만 퇀파이 출신은 ‘3다3소(三多三少)’의 장단점을 가진다는 평가가 많다. 즉 행정 관련 인사는 많지만 재경(財經) 인사가 적고, 지방 지도자 출신은 많지만 중앙 요직 경험자는 적으며, 학력이 높지만 현장 실무 경력이 적다는 것. 하지만 리 상무위원은 예외에 속한다. 그는 1995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그의 논문 ‘중국 경제의 삼원(三元) 구조’는 중국 경제학계의 ‘최고 논문상’인 ‘쑨예팡(孫冶方) 경제과학상’을 수상했다. 대충 학위를 딴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다. 지도자로서는 필수코스인 공업, 농업, 지방을 고루 학습했지만 중앙부처 근무 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허난성 재직 시절엔 탄광 가스폭발사고, 화재사고, 에이즈 감염사고 등 사회문제가 빈발했다. 특히 허난성 성장으로 재직하던 2000년 12월25일 뤄양(洛陽)에서 311명이 사망하는 큰 화재가 발생해 인책될 뻔했다. 하지만 후 주석의 구명으로 2년 뒤 오히려 성장에서 당서기로 승진했다.

후 주석의 최측근이라는 점이 상하이방(上海幇)과 태자당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계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시 전 상하이 당서기가 차세대 후계자로 급부상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중국 정치가 최고 지도자의 덕목을 개인의 능력보다는 다양한 집단의 요구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지에 둔 것도 그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시 서기 뒤에 자기 이름이 불리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학력으로 보나 연령으로 보나, 또 15년간 부장급 이상 직책을 역임한 정치 경력으로 보나 누구도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번 상무위원 진입에서 권력서열 7위를 기록해 6위인 시진핑에게 밀렸다. 중국에는 ‘머리 내민 새가 먼저 총을 맞는다(槍打出頭鳥)’라는 속담이 있다. 너무 빨리 후 주석의 후계자라는 점이 부각됐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던 것이다.

현재로서는 시 상무위원이 리 상무위원보다 한발 앞섰지만 그를 많이 따돌린 것은 아니다. 똑같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진입했고, 앞으로 5년간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싸움에서 어떤 예기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커창 신임 상무위원



·한족

·1955년 7월생

·안후이(安徽)성 딩위안(定遠)현 출신

1974~1976년 안후이성 펑양(鳳陽)현 다이먀오(大廟)공사 둥링(東陵)대대 당 지부 지식청년

1976~1978년 안후이성 펑양현 다이먀오공사 둥링대대 당 지부 서기

1978~1982년 베이징(北京)대학 법학과, 학교 학생회 책임자

1982~1983년 베이징대학 공청단 서기

1983~1985년 공청단 중앙학교 부부장 겸 전국 학련(學聯) 비서장

공청단 중앙서기처 후보 서기

1985~1993년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 겸 전국 청련(靑聯) 부주석

1988~1994년 베이징대학 경제학원 경제학 석사, 박사

1991년 9~11월 중앙당교 공부

1993~1998년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 겸 중국청년정치학원 원장

1998~1999년 허난(河南)성 당부서기, 대리성장

1999~2002년 허난성 당부서기, 성장

2002~2003년 허난성 당서기, 성장

2003~2004년 허난성 당서기, 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2004~2005년 랴오닝(遼寧)성 당서기

2005~2007년 랴오닝성 당서기, 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2007~현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제15~17기 중앙위원

제17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주간동아 610호 (p42~44)

하종대 동아일보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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