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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찾는 논술 비전|프라이데이 vs 방드르디

누가 더 보편적인가

  • 노만수 학림논술연구소 연구실장·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

누가 더 보편적인가

누가 더 보편적인가

1. 영화 ‘로빈슨 크루소’의 한 장면.
2. 문화상대주의를 주창한 문화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3.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

“덩치 큰 서양 수캐는 몽당연필만한 토종 암캐의 엉덩이 위에서 장군처럼 쾌락을 좇았다. 암캐의 감정과 의사는 없었다. 나는 외쳤다. ‘황구여, 꼬리를 내려라! 제발!’”

천승세의 소설 ‘황구의 비명’(1975년)은 조선 참외처럼 작은 황구를 미군기지촌 용주골로 떠난 ‘은주’(양공주)로, 수캐는 서양으로 빗대고 있다. 그리고 서구가 근대화를 빌미로 비서양을 폭력적으로 자기동일시한 제국주의 속성을 까발린다. 주인공은 “황구는 황구끼리, 황구는 황구끼리” 그리하여 “서럽지 않은 황구와 황구”로 살자고 한다. ‘황구는 황구끼리, 황구는 황구끼리’를 자민족 중심주의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황구와 수캐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어떨까?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1996년)이 그런 생각을 담고 있다.

투르니에는 파리의 인간박물관에서 문화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1991)에게 지도를 받을 때 대니얼 디포(영국)의 ‘로빈슨 크루소’(1719년)를 다시 읽는다. 그 순간 그는 ‘야만과 문명’ ‘문화상대주의’라는 문화인류학적 개념을 떠올리고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써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는 ‘매거진 문학’에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두 가지 큰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작품 속 프라이데이라는 인물은 온전한 인격체가 아니라 물건(종)일 뿐이다. 주체(백인-서양인-앵글로색슨-기독교)인 로빈슨만이 진리다. 프라이데이(흑인-비서양인-원주민-범신론)는 단지 주체가 정복해야 할 타자일 뿐이다. 둘째, 회고적 시각이다. 오직 ‘과거’ 영국의 위대함에만 몰입해 섬에 ‘짝퉁 영국’을 만들려 한다.



그래서 투르니에는 로빈슨의 의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깨닫게 하기 위해 ‘노예’ 프라이데이(금요일)를 ‘자유인’ 방드르디(프랑스어로 금요일)로 해방시켜 옛 주인의 ‘헛된 몽상’(서구우월주의)에 ‘벌침’(문화상대주의)을 쏜다. 이렇게 해서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당시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면서 ‘문화절대주의자’ 로빈슨의 오만을 까발려 ‘파리의 지가(紙價)’를 올렸다.

“프랑스의 유명한 문화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는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아프리카의 과학은 서양의 과학과 종류가 다를 뿐 결코 서양 과학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과학에서뿐 아니라 예술이나 관습, 제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모두 그 나름대로의 합리성이 있고, 수월성이 있는 것이다.” - 손봉호 ‘문화와 예술’, 서울교대 2003 정시

흔히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주체적 삶을 위해선 절대고독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주고 있고, 루소가 에밀에게 권한 ‘으뜸 소설’로 유명하다. 홀로 생존해야 하는 호모에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로서 무한한 자연을 개발해 자신의 소유로 삼은 로빈슨은 17세기 영국 정치철학자 존 로크가 ‘통치론’에서 주장한 ‘부르주아의 자연법적 소유권’을 실현한 인물이다. 모든 사회와 떨어져 있으면서도 절제·성실·믿음으로 청교도적 개인주의를 실현한, 막스 베버식 합리적 인간의 전형이다.

하지만 투르니에는 서구의 우월성을 알리는 ‘지구촌 근대화론’의 대표주자 로빈슨을 탈식민주의의 눈으로 해체한다. (1) 로빈슨은 돈을 위해 노예무역을 한 중세의 상인이다. (2) 무인도에서 농사짓는 것을 신의 섭리, 즉 기독교의 세계적 전파로 해석한다. (3) 영국인 반군들이 섬에 남게 되면서 영국 영토(식민지)가 된다. 무인도는 현실의 아메리카다. 식민지 개척신화의 욕망을 확대재생산한 소설이다. (4) 브라질에서 식민지 농장을 경영한 로빈슨은 원주민을 ‘문명화’하려 한 식민주의자다. (5) 원주민에게 ‘프라이데이’라는 영어식 이름을 지어주고 영어와 기독교를 가르치면서, 프라이데이의 종교와 의식은 미신과 야만풍습으로 간주한다. 서구일방주의다.

물론 방드르디도 처음엔 로빈슨이 제물로 바쳐진 자신을 구해주자 “삼천년 서구문명으로 가득 들어찬 머리를 쳐들고 서 있는 백인(로빈슨)의 발”을 목 위에 올려놓으면서 복종을 표시한다. 두 사람은 모든 측면에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 공식에 따라 ‘백인/혼혈아, 경험 많은 장년/철부지 소년, 이성적/광란적, 과학적 정확성/미개의 무질서, 지식/무식, 주인의식/노예 도덕, 선/악, 책임/무책임, 문명/야만’ 등의 대립 개념으로 나타난다. 여기까지는 투르니에와 디포의 생각이 같다.

하지만 로빈슨의 아지트 동굴이 폭발한 뒤 모든 것이 역전된다. 방드르디는 로빈슨에게 ‘자연친화적 삶’을 가르친다. 로빈슨은 결국 자연을 개발하는 호모사피엔스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노는 ‘호모루덴스(유희적 인간)’로 변해, 문명의 껍질을 벗고 자연과의 교감을 이루는 순수한 인간으로 변화한다. 로빈슨은 영국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스페란차 섬에 남는다. 이게 바로 디포와 투르니에의 결정적 차이다.

서구의 타자였던 ‘비서구’는 서구와 다른 방식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뿐이지 야만이 아니라는 것, 서구가 비서구보다 결코 우월한 보편문명이 아니라는 것, 도시문명이 자연보다 풍요로운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삶의 방식은 아니라는 것 등을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프라이데이에게 ‘노예 도덕’을 던져버리고 계급혁명을 권했지만, 투르니에는 방드르디에게 ‘근대적 인간중심주의까지 벗어나라’는 탈근대성을 권하며 로빈슨에게 ‘자연과 함께 즐기는 삶’(생태철학)을 가르쳤다. 로빈슨과 방드르디, 사제관계만 바뀐 게 아니라 교육이념·내용도 이렇게 완전히 다르다. 19세기 사회진화론과 인류학이 서구제국주의를 위해 복무했다면, 20세기 문화인류학은 서양우월주의 혹은 문화절대주의를 비판해 문화상대주의라는 방드르디의 시각을 지적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하지만 아직 ‘보편문명담론’ 또한 거세다.

“보편문명(universal civilization)은 18세기 이후 전개되고 있는 광범위한 근대화 과정의 결과다. 가장 먼저 근대화에 도달한 문명으로서 서구는 근대화의 문화를 남보다 한발 앞서 터득했다. 다른 사회도 이와 유사한 교육, 노동, 부, 계급구조의 패턴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면 근대 서구문화는 보편문명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 헌팅턴 ‘문명의 충돌’, 이화여대 2007 정시

미셸 투르니에게 문화인류학을 수혈한 레비스트로스는 브라질 기행문 ‘슬픈 열대’(1955년)에서 문명과 미개의 이분법은 서구인의 욕망이 ‘발명한’ 상상의 이론이라고 한다. 그는 서구가 왜곡한 이런 ‘슬픈 열대’의 현실에 분노하며 결국 ‘문화의 우열이나 보편문명은 없다(문화상대주의)’면서도 ‘보편적 가치는 있다’라는 구조주의 인류학의 핵심사상을 정립한다. 레비스트로스와 그의 ‘소설가 제자’ 투르니에에게는 로빈슨의 (제국주의) 문명보다 방드르디의 자연친화적 삶이 더 보편적 가치였던 셈이다. 그래서 방드르디는 ‘보편문명 = 서구문명’이라는 문화절대주의를 부순 레비스트로스의 소설적 인물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적 잡지 ‘소년’(1908년)에 처음 번역, 연재된 이래 최고의 아동문학으로 자리잡아온 ‘로빈슨 크루소’는 로빈슨의 이름으로 이 땅의 수많은 ‘프라이데이의 의식구조’(서양 콤플렉스)를 형성해왔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영어제국주의, 세계화 등이 연일 언론에서 언급되는 요즘 여전히‘황구의 비명’(대한민국 파행적 근대)은 날카롭고 높기만 하다. 따라서 방드르디의 입으로 “황구여, 꼬리를 내려라! 제발!” “황구는 황구끼리, 황구는 황구끼리” “서럽지 않은 황구와 황구”란 말을 외쳐보는 것은 ‘세상 보는 눈의 지평(논술)’을 넓히는 것 아닐까.

“영국인들은 아무리 헐벗은 땅이라도 사나운 기세로 달려들어 식민지를 세우고 있소. 당신들의 선(善)과 우리 아라비아 사람들의 선은 다르다오. 억지로 강요된 것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백성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는 법, 강철이 자신을 담금질하는 불길에 대해 고맙게 생각할 것 같소?”

- 로렌스 ‘지혜의 일곱 기둥’, 이화여대 2007년 정시

추천도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미셸 투르니에, 김화영 옮김, 민음사)

생각 & 토론거리



1. 더 우수한 문명이 존재하는가? 경제적 우위가 문명의 우위인가?

- 프랑스 바칼로레아

2. 방드르디(비서양)를 신화적으로 접근한 미셸 투르니에 또한 오리엔탈리스트이지 않은가?

3. ‘로빈슨’을 투르니에가, ‘허생전’을 이광수가, ‘구운몽’을 최인훈이 다시 쓰는 의미는 무엇인가?

4. ‘허클베리 핀의 모험’(마크 트웨인)에서 핀이 흑인노예 짐을 친구로 대하는 것, ‘로빈슨 크루소’에서 로빈슨이 프라이데이를 하인으로 삼거나 자신을 도와주었던 동료 노예를 팔아넘긴 것에서 핀과 로빈슨의 차이를 자연법과 실정법에 빗대 비교 분석하시오.

5.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처럼, 우리 안에 문화절대주의 모습을 찾아보자.

6. 문화상대주의자에게 보편문명은 없다. 문화는 상대적 가치가 있고 다양할 뿐이다. 하지만 ‘극 단적 상대주의’는 불가지론, 몰가치론에 빠질 수 있다. ‘식인문화’ ‘노예제’ ‘전족’ ‘영아살해’ ‘순장’ 등 보편성에 어긋나는 문화는 있다. 그럼, 보편적 가치의 기준은?

- 서울교대 2003년 정시




주간동아 2007.04.03 579호 (p10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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