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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 괴물이 우릴 삼켰죠”

일산 옛 강촌마을 사람들의 인생유전…농부에서 아파트 경비원으로 어느 순간 빈민층 전락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신도시 괴물이 우릴 삼켰죠”

“신도시 괴물이 우릴 삼켰죠”

옛 강촌마을이 있던 경기 일산 마두동 일대. 강촌마을 향우회 윤태옥 회장.

“일산 신도시 건설 때문에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칠 것만 같습니다. 군 제대 뒤 농협에서 대출받은 50만원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사서 여덟 마리까지 늘렸어요. 그렇게 해서 작은 집도 마련했고 결혼식도 올렸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호박순과 들깻잎을 길러 내다파는 재미가 쏠쏠했지요. 2년만 더 있으면 논 몇 마지기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정말 악착같이 일했습니다. 그런데 신도시가 건설된다고 나가라는 겁니다. 어찌나 화가 나던지….”

경기 일산의 옛 강촌마을(현 마두동 일대) 주민 윤태옥(56) 씨는 떠나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강제 철거로 집이 부서지고서야 1991년 마을을 떠났다. 그는 아버지의 논 덕분에 토지 보상금으로 2억1300만원을 받았지만 목돈을 받았다는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그 돈을 어떻게 굴려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고, 실제로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데만 2년을 보냈다.

목돈 받은 기쁨 잠시…낯선 땅의 새 삶 번민

그는 농사 외에 다른 직업은 생각해보지도 않은 영락없는 농사꾼이었다. 당시 한국토지공사에서 대토(대체농지)로 서산 지역을 제시했지만 윤씨는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우선 그곳이 고향마을과 너무 멀고, 연로한 부모를 모시고 낯선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생소한 중장비업에 뛰어들었지만 자본금만 날리고 지금은 후배가 운영하는 납골당 회사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2년 전에는 뇌출혈로 쓰러져 건강도 예전 같지 않고, 사는 집도 전셋집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 납골당 사업이 번창하면 투자금을 회수해 강원도 산골에서 농사꾼의 삶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



“지금도 제 꿈은 농사꾼입니다. 언젠가는 땅을 사서 채소를 기르고, 소도 키우며 살고 싶습니다.”

신도시 건설은 서울의 주택난을 해소하고 서민들에게 내 집 마련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윤씨 같은 원주민들은 대대로 살아오던 집과 땅 그리고 직업을 잃었다. 삶의 뿌리가 일시에 흔들리는 그 아픔은 고향을 떠난 지 17년째인 지금도 치유되지 않는다. 보상을 받았지만 경제적으로도 나아진 게 별로 없다. 윤씨는 “고향 사람들 가운데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80%는 된다”며 그 심각성을 제기했다.

행정중심복합도시(행복도시), 혁신도시 등 수많은 개발로 지금도 전국이 몸살을 앓고 있고 원주민과 시행사의 마찰이 연일 뉴스를 장식한다. 문제는 원주민들의 보상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그들이 일시에 목돈으로 보상금을 거머쥔다는 점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들 가운데 다수는 새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일산 옛 강촌마을 사람들의 현주소가 바로 이를 입증한다.

사기·보증 등으로 보상금 날리기 일쑤…부자 된 사람은 소수

강촌마을 사람들은 평균 3억~4억원의 토지 수용 보상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적게는 6000만원에서 많게는 100억원대까지 분포돼 있다. 당시 3억~4억원은 서울 강남의 중형(30~35평) 아파트 한 채(현재 시가 10억~12억원대)를 너끈히 살 수 있었던 금액이었다.

그러나 마을사람 가운데 보상금을 잘 굴려 부자가 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사기를 당하거나 친인척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보상금을 날리는 경우도 많았다. 8억원대 토지 보상금을 받았던 A씨는 새 인생을 꿈꾸었지만 보증을 잘못 서 재산의 상당액을 날리고, 택시운전으로 연명하다 15년 만인 2005년 결국 위암에 걸려 사망했다. B씨는 10억원대 보상금을 모두 사기로 날리고 지금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농사만 짓고 살던 사람들이라 재테크라고는 아무것도 몰랐던 탓입니다. 생활이 갑자기 바뀌자 혼란스러워서 몇 년씩 일거리를 찾아 헤맨 이들이 많았습니다.”(박복남 씨)

“신도시 괴물이 우릴 삼켰죠”

개발 전 평화로웠던 경기 고양군 중면 마두리 일대 마을 전경.

강촌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도시 빈민으로 전락한 것은 직업 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강촌향우회 회원 105명을 대상으로 직업을 파악한 결과 전직 농업인은 49명(47%)이었지만 현재도 농사를 짓는 이는 단 한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아파트 경비원(9명), 식당 등 소규모 자영업자(8명), 막일(6), 공장노동자(5) 등 다수가 서민층 직업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이 밖에도 부동산업자, 봉제업자, 화훼업자, 택시운전사, 한의원 보조, 이삿짐센터 노동자, 정원사 등 무척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다. 경제활동연령이면서도 무직자로 있는 사람들도 10여 명이나 됐다. 회사원, 군인, 공무원 등 중산층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은 10여 명으로 파악됐다.

농사꾼 출신으로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는 ‘단 한 명’인 경규엽 씨(경기 평택 거주). 평택 지역에 대토를 마련한 그는 지금 3만여 평의 땅을 소유하고, 소 200여 마리를 기르는 부농이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계속 짓고 싶어했지만, 고향 주변에서는 이전 규모로 농사지을 대토를 구입하기 어려웠고 고향을 떠나기도 부담스러워 전직(轉職)을 택했다고 한다.

호수마을 3단지에서 아파트 경비로 일하는 송명길(61) 씨는 “농사지을 땅을 찾지 못해 직업을 바꿨다. 어쩌다 보니 경비원이 되었다. 내가 농사짓던 땅 근처 아파트에서 경비로 일하는 것이 처음에는 속상했지만,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일해왔다”고 말했다.

이들의 현 상황을 단순히 개인적인 무능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박영한의 소설 ‘왕룽일가’에는 대도시 변두리 땅값이 치솟아 앉은자리에서 수십억 원대 갑부가 된 왕룽 필용 씨가 나온다. 자기 가족에게는 인색하지만 하룻밤 뜨내기 여자에게 거액을 날리는 어수룩한 인물이다. 강촌마을 사람들을 여기에 비유해보면 마을 주민 전체가 도시화라는 ‘뜨내기 여자’(경쟁 사회)에게 당한 꼴이다.

단순 돈의 논리보다 정착교육 등 제공해야

이처럼 원주민들은 삶의 새 터전을 마련하거나 직업을 찾는 등 연착륙할 장치를 거의 갖지 못했다. 단국대 조명래 교수(도시지역계획학)는 원주민들에게 경제적 보상만 제공하기보다는 삶을 영위하는 기술에 대한 재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개발이 이뤄질 때 해당 지역 원주민에 대한 보상이 단순히 돈의 논리로만 이뤄져서는 안 됩니다. 물론 정착에 필요한 적당한 보상금도 지급돼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에 대한 고용과 교육, 재테크 같은 부분까지 제도적으로 배려해야 합니다. 그래야 원주민들이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시행사 단독으로 그런 부분까지 챙기는 게 불가능하다면 해당 지자체가 함께 노력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을까요.”

한국토지공사 택지사업처 장옥선 팀장은 “시행사가 원주민의 실질적인 이주·생활 대책까지 고민해줘야 했지만 그동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충남 연기·공주의 ‘행복도시’ 조성사업부터는 영세민 주거안정 대책의 일환으로 공사현장과 공공기관 취업 알선, 직업전환 교육 등 개선책을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토지공사는 2006년 2월 취업은행을 설치해 82명에게 분묘조사, 건설청 일용직 등 일자리를 제공했으며, 7월에는 직업전환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2007년부터 4억7000만원(180명분)의 예산을 책정했다. 그러나 이는 ‘행복도시’ 전체 원주민들에 대한 지원 규모로는 너무 적은 액수다.

하지만 강촌마을 사람들에게 이 정도 배려라도 있었다면 그들의 삶이 지금보다는 덜 팍팍하지 않았을까.

일산 신도시 옛 강촌마을 향우회

“십수년 만에 찾은 고향의 훈훈한 정 영원히”


“신도시 괴물이 우릴 삼켰죠”

3월4일 열린 강촌마을 향우회

“살기 힘들 때, 쉬고 싶을 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없다는 것은 삶의 뿌리를 잃은 것과 같습니다. 한숨을 쉬면 세상이 꺼지는 듯 깊고, 그 허전한 느낌은 부모님을 잃었을 때와 같습니다.”(경모 씨)

신도시 건설로 고향을 떠나 17년 동안 그리움을 키웠던 옛 강촌마을 사람들이 3월4일 저녁 7시 정발산역 근처 한 음식점에서 향우회 발족식을 가졌다. 회원 105명 가운데 40여 명이 참석한 이 모임을 주관한 이는 향우회 회장 윤태옥(56) 씨와 총무 최희수(55) 씨.

두 사람이 없었다면 향우회는 조직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강촌마을을 떠난 직후만 해도 토지보상 문제로 의견이 충돌해 골이 깊어진 탓에 남남처럼 멀어졌고, 이후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십수 년을 지내왔다. 그러나 윤씨는 “어느 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미칠 듯이 보고 싶어져” 그들의 애경사(哀慶事)에 참석하는 등 연락처 수소문에 나섰다.

그렇게 찾은 사람이 모두 105명. 지난해 네 차례 예비모임을 가지면서 확인된 숫자다. 연령은 40대 중반에서 70대까지 다양하다. 특이한 것은 향우회 가입자 가운데 절반이 넘는 64명이 고향마을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고양시 일대에 살고 있다는 점. 대부분 낯선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200여 년 전에 조성된 마두2리의 강촌(姜村)마을은 글자 그대로 강씨 집성촌이었다. 이후 다양한 성씨들이 합류해 살았는데, 마을이 없어지기 직전에는 경씨가 강씨보다 조금 더 많이 살았다. 60여 가구 320여 명이 오순도순 살던 마을은 지금 흔적도 없다. 지금의 일산 마두동 여래사 앞 고급 주택가가 바로 그 자리.

“강촌마을은 백석리, 마두리 일대 15개 부락 가운데 가장 단합이 잘되고, 막강한 힘을 행사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남의 집 일에도 팔을 걷어붙이고 도왔습니다. 자기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누구네 집 생일이면 마을 사람들을 불러 같이 식사하고, 남의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친하게 지냈지요.”(송명길 씨)

구성원 사이에 불화가 생겨도 마을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함께 살다 보면 절기마다 품앗이를 해야 하고, 매일 마주쳐야 하는 상황이어서 척을 지고는 오래갈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을을 떠난 지금은 형제간, 친척간에도 서로 얼굴을 보지 않는 집안도 있다.

“신도시라는 게 (마을 사람들) 정 끊어놓는 데 일인자야.”(박복남 씨)

마을을 떠난 이후 이들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그러나 꿈마저 잃어버리진 않았다. 향우회를 만들어 마음속에서나마 고향마을을 되찾기로 뜻을 모은 것이 단적인 예다. 그들은 앞으로 3개월에 한 번씩 향우회를 갖고 서로 안부를 묻고 힘이 되기로 했다.

“향우회를 통해 정다웠던 옛날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어요.”(최희수 씨).




주간동아 2007.03.27 578호 (p48~50)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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