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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다산(茶山)과 다작(多作)

빛나는 천재성 책으로 말하다

경학에서 음악학까지 인문학 섭렵 … 후손들이 펴낸 ‘여유당전서’ 154권 76책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빛나는 천재성 책으로 말하다

빛나는 천재성 책으로 말하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에 있는 다산초당(茶山草堂).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유명한 사람이다. 굳이 이 자리에서까지 다산에 대해 발언을 보탠다는 것이 부질없게 느껴질 정도다. 더욱이 나는 다산의 저작을 작심하고 공부한 적이 없다. 다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 넘은 짓거리인 것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책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최고 수준의 저술가이자 가장 많은 저서를 생산한 다산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산 선생에 대한 크나큰 결례가 될 터다. 해서 객쩍은 말이나마 늘어놓는다.

거의 30년 전 대학생 시절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6책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영인본을 보았지만, 그 조밀하고 검은 상형문자의 숲으로 한 걸음도 걸어 들어갈 수 없었다. ‘다산’과 ‘여유당(與猶堂)’ 그리고 ‘실학’이란 어휘는 귀에 익숙했지만, 기실 대학 입시를 위한 단순 암기의 결과였을 뿐이다. ‘여유당전서’를 구입한 것은 대학원 석사과정 첫 학기 때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자못 정중한 자세로 책을 펼쳤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훑어본다는 말도 과분한 언사다. 그냥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역시 사정이 많이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오로지 호한(浩瀚)한 양과 내용의 다양함 앞에 감탄만 거듭할 뿐이다.

빛나는 천재성 책으로 말하다

정약용의 저서들. 경세유표, 마과회통, 목민심서(왼쪽부터).

조선왕조가 끝나기 전 다산의 전집은 공식적으로 발간된 적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산의 저작은 당대에는 결코 잉크 맛을 보지 못했다. 다산은 자신이 당면한 사회현실에 대해 절절이 발언했으되, 그 발언은 저작의 형태로 유포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기야 다산만 그런 것이 아니다. 박제가의 ‘북학의’가 그랬고, 박지원의 ‘열하일기’ 역시 그러했다. 이른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이 저 귀중한 저작들에 왜 그리 인색했던가. 한심한 일이다.

다산의 저작에 전서(全書)란 이름을 붙여 전집 형태로 출판한 것은, 1936년 신조선사(新朝鮮社)가 간행한 ‘여유당전서’가 최초다. 당시까지 알려진 다산의 모든 저작을 모아 간행한 것이고, 다산 저작의 대부분은 이 전집에 실려 있다. 편자는 다산의 외현손인 김성진(金誠鎭)인데, 이 양반이야 별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교열자의 면모는 화려하다. 근대 한학의 최고봉인 정인보(鄭寅普)와 안재홍(安在鴻)이 참여했던 것이다.

신조선사판 ‘여유당전서’는 154권 76책의 거창한 분량이다. 내용을 대충 훑어보자.



빛나는 천재성 책으로 말하다

정약용의 초상화.

제1 시문집 25권 12책

제2 경집(經集) 48권 24책

제3 예집(禮集) 24권 12책

제4 악집(樂集) 4권 2책

제5 정법집(政法集) 39권 19책

제6 지리집(地理集) 8권 4책

제7 의학집 6권 3책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조선의 개인 문집으로 가장 많은 양을 자랑하는 송시열(宋時烈)의 ‘송자대전(宋子大全)’은 200권 100책을 조금 넘는다. 하지만 ‘송자대전’은 의도적으로 ‘주자대전’의 규모와 맞추려 한 혐의가 있고, 또 오로지 주자학 하나로 쏠리고 있다. 이에 반해 ‘여유당전서’의 저작들은 주제와 내용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고, 어느 하나 무겁지 않은 것이 없다. 제1집인 시문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그의 사상을 글로 담았지만, 다른 문인들도 동일한 성격의 문집을 남기고 있으니 일단 제외하고 다른 책들을 보자. 총 24책으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제2집 경집은 ‘대학’ ‘중용’ ‘맹자’ ‘논어’ 등 사서와 ‘시경’ ‘상서’ ‘춘추’ ‘주역’ 등 사경(四經)에 대한 노작들이다. ‘맹자요의(孟子要義)’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시경강의(詩經講義)’ ‘상서고훈(尙書古訓) 등이 대표적인 저작이다. 제3집 예집은 ‘상례사전(喪禮四箋)’ ‘상례외편(喪禮外編)’ ‘상례절요(喪禮節要)’ ‘제례고정(祭禮考定)’ ‘가례작의(嘉禮酌儀)’ ‘예의문답(禮疑問答)’ ‘풍수집의(風水集議)’ 등이다. 마지막의 ‘풍수집의’는 말년(1825)에 쓴 책으로 풍수설의 비합리성을 논파했다. 21세기에 뜬금없이 풍수설에 열광하는 이들이 다산의 풍수설 비판을 읽으면 뭐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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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정약용의 묘.

제4집은 악집으로 ‘악서고존(樂書孤存)’ 하나뿐이다. 음악에 관한 저작이다.

제5집 정법집이 대중에게 가장 알려진 저작의 모음이다. 이른바 일표이서(一表二書), 곧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가 수록돼 있다.

6집 지리집에는 ‘강역고(疆域考)’와 ‘대동수경(大東水經)’이 들어 있다. ‘강역고’는 한국 역대 국가들의 판도를, ‘대동수경’은 지금의 북한을 중심으로 한 강들에 대한 고찰이다.

제7집 의학집에는 천연두 치료법을 개괄한 ‘마과회통(麻科會通)’과 부록‘의령(醫零)’이 수록돼 있다.

이상이 ‘여유당전서’ 수록 저작들인데, 이것이 다산 저술의 전체는 아니다. 1973~74년 다산학회가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지 않은 저작들을 모아 방대한 분량의 ‘여유당전서보유(與猶堂全書補遺)’ 5책을 간행했다.

퇴계·율곡보다 뛰어난 독서량

다산의 저작은 문학은 물론, 경학 예학 역사학 지리학 언어학 음악학 의학 법학 정치학 행정학 등 거의 모든 인문학 분야를 포괄한다. 그뿐이랴. 그의 저작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그의 천재성은 찬연히 빛나는 항성 같은 것이다. 하지만 다산의 천재성 역시 시대의 산물임은 췌언이 필요치 않다. 그의 장대한 저작은 박학(博學)의 소산이다. 박학을 학문의 초역사적인 성격으로 생각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박학 역시 18세기 이래 조선 학계에서 일어난 변화의 산물이다. 예컨대 조선 중기 최고의 학자 퇴계와 율곡의 문집을 검토해보면, 두 사람의 독서량은 다산을 따라가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학문적 주제의 범위 역시 훨씬 좁다. 나는 퇴계의 진지하고 엄밀한 학문 자세를 존경해 마지않는다. 하지만 그의 학문적 관심은 오로지 성리학에 집중됐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퇴계의 학문은 1543년 조선 최초로 인쇄된 ‘주자대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퇴계는 그 책을 철두철미하게 읽음으로써 퇴계가 되었던 것이다. 율곡의 독서록을 검토해보아도 역시 동일한 결과를 얻을 것이다. 퇴계와 율곡의 학문은 ‘주자대전’에 관한 한 정밀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 다산처럼 온갖 학문 분야를 휘갑하는 박학의 소산물은 아니다.

다산의 학문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앞에서 여러 번 언급한 베이징(北京) 지식계의 변화였다. 다산의 경학을 예로 들어보자. 다산의 ‘매씨서평(梅氏書評)’은 ‘서경’ 58편 중 25편이 가짜임을 논증한 것이었다. 다산의 이 저작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염약거(閻若 1636~1704)의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과 모기령(毛奇齡, 1623~1716)의 ‘고문상서원사(古文尙書寃詞)’의 ‘서경’ 위작설을 둘러싼 대립이었다. ‘매씨서평’은 청대 경학의 문제 설정 위에서 제출된 것이었다. 이처럼 다산의 학문은 18세기 이래 수입된 베이징 학문의 연장에 있었던 것이다.

유배 기간에 낙심치 않고 저술 전념

또한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베이징 유리창에서 공급된 막대한 서적이 다산 학문의 하드웨어가 됐다. 다산은 권기(權夔)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래 또 일종의 견해가 있어, “군서(群書)를 박람하면 점차 박잡(駁雜)한 병통이 생겨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숭상하는 병폐에 쉽게 빠진다”고 합니다. 하나 이것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패관소품(稗官小品)이나 이단잡학(異端雜學)의 책은 모두 물리쳐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 유가(儒家)의 정경(政經) 문자인 구경(九經)의 전석(箋釋)과 역대 사책(史策) 같은 것들이야 어떻게 폐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군서를 박람하면…” 하는 말은 곧 18세기 말 19세기 초 유리창에서 쏟아져 들어온 서적으로 인해 생긴 다독(多讀), 박학의 풍조에 대한 비판이다. 다산은 소설이나 소품, 이단적 서적의 탐독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경학과 역사 등 스스로 정학이라 생각하는 학문의 연구를 위한 다독과 박학은 적극 옹호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독과 박학이 창조적 저술로 이어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랴. 1801년 신유사옥에 걸려든 다산은 1818년 유배가 풀릴 때까지 귀양지를 떠날 수 없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이었지만, 역으로 저술에 몰두할 시간을 확보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큰 다행이었다. 특히 1808년 강진의 다산(茶山)으로 옮겨 초당을 짓고 난 이후 그의 연보는 오로지 저작(著作)의 역사가 된다. 유배지에서 그는 제자들을 길렀고, 그 제자들과 학단(學團)을 이뤄 저작들을 쏟아냈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는 학단의 저작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공은 20년 동안 유폐되어 다산에 있으면서 열심히 연구와 편찬에 전념하여 여름 더위에도 멈추지 않았고 겨울 밤에는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 제자들 가운데서 경서와 사서(史書)를 부지런히 살피는 사람이 두어 명이요, 입으로 부르는 것을 받아 적어 붓 달리기를 나는 것같이 하는 사람이 서너 명이요, 옆에서 도와 먹으로 줄친 종이에, 잘못 불러준 것을 고치고 종이를 눌러 편편하게 하며 책을 장정하는 사람이 서너 명이었다. 무릇 책 한 권을 저술할 때에는 먼저 저술할 책의 자료를 수집하여 둘씩 둘씩 서로 비교하고 서로 참고하고 정리하여 정밀하게 따졌다.(번역은 宋載邵, ‘茶山詩硏究’의 부록에 실린 ‘사암선생연보’에서 취함)

자료를 읽고 채록하고, 구술을 받아쓰고, 교정을 보고, 책으로 엮고 하는 등의 분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 연구의 분업이 다산의 호한한 저작을 낳게 했던 것이다. 물론 저작의 아이디어는 다산이 냈고, 분업의 총지휘자 역시 다산이었다. 유배지에서 다산은 절망하지 않고 지방의 인재를 길러 학단을 만들고 그 학단이 세상을 구원할 학문적 저작을 쏟아냈던 것이다. 다산의 제자들 역시 스스로 학문을 성취했음은 물론이다.

다산은 자신의 저술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던 것인가. “대개 책을 저술하는 법은 경적(經籍)이 종(宗)이 되고, 그 다음은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들에게 은택을 미칠 수 있는 학문이어야 하며, 외적을 막을 수 있는 관문이나 기구와 같은 것도 또한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한때의 농담을 취한 소소하고 변변치 못한 설과 진부하고 새롭지 못한 담론이나, 지루하며 쓸모없는 의론 같은 것들은 한갓 종이와 먹만 허비하는 것이니, 손수 진귀한 과일나무나 좋은 채소를 심어서 생전의 생계나 풍족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사암선생연보’) 앞서 제시했던 다산의 저작 목록을 보면 다산의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짐작 갈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온갖 사료와 선인들의 방대한 문집, 저 비할 데 없이 거창한 ‘사고전서(四庫全書)’까지 연구실에 앉아 컴퓨터로 읽고 검색할 수 있는 세상이다. 원문 역시 일일이 내 손으로 베끼지 않고 마우스의 간단한 조작으로 복사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고민 없는 학문을 하는 인문학자로서 심히 부끄러울 따름이다.



주간동아 2007.03.20 577호 (p82~84)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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